대러 제재 ‘구멍’ 숭숭…‘옛 소련’ 중앙아시아 통해 교역
[러, 우크라 침공]
옛 소련의 구성원이었던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미국과 유럽의 대러시아 제재를 우회하는 주요 통로가 되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은 14일 유엔(UN)의 무역통계 자료를 분석해 미국과 유럽이 지난해 아르메니아·조지아·키르기즈스탄·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에 수출한 상품 물량이 한해 전 145억달러(19조4100억원)에서 243억달러(32조5400억원)로 66% 남짓 늘었다고 전했다. 지난해 이들 나라에서 러시아로 수출된 물자 역시 150억달러(20조800억원)로 전년보다 50% 가까이 증가했다.
신문은 이를 근거로 지난해 2월 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국·유럽의 제재를 피해 미국·유럽→중앙아시아→러시아로 이어지는 교역로가 활성화되고 있다고 결론 냈다. 특히 이렇게 새로 부상한 교역로를 통해 러시아가 서방의 첨단 컴퓨터 칩과 레이저 등 민수·군수 겸용의 이른바 ‘이중용도’ 물품을 조달 받아 우크라이나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분석이 이어지고 있다. 파벨 루친 터프츠 대학 방문연구원 “전자부품은 항공기, 미사일, 지휘통제통신시스템 등 안 들어가는 곳이 없다”며 러시아가 전쟁을 수행하는데 서방의 물품이 계속 공급되는 게 핵심적이라고 말했다.
좀 더 구체적인 내역을 보면, 아르메니아는 지난해 미국과 유럽에서 850만달러(113억8000만원)어치의 집적 회로를 수입했다. 이는 한 해 전 수입액 53만달러(7억970만원)의 16배가 넘는 물량이다. 마찬가지로 지난해 아르메니아에서 러시아에 넘어간 집적회로도 한해 전의 2천달러(267만원)에서 1300만달러(174억원)로 폭증했다. 카자흐스탄은 레이저 관련 교역,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전기전력 점검 도구를 포함한 여러 측정기구 수출입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은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국가를 통해 조달하는 물량은 제재 이전 직접 수입하던 물자의 5% 남짓하다고 추산했다. 러시아가 중국이나 튀르키예를 통해 확보하는 물량에 견주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다.
러시아 기업들은 이런 우회 수입을 버젓이 광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멕스-엑스포트’란 러시아 기업은 누리집에 “제재 물품을 유럽과 미국에서 카자흐스탄을 통해 러시아로 수입한다”며 “제재 우회 100%”라고 적어놓고 있다. 또 통관 대행업체 ‘스탠더드 그룹’ 역시 아르메니아에 있는 자회사가 미국과 유럽에서 물품을 수입해 부가가치세 납부 등 통관절차를 거친 뒤 다시 러시아로 들여온다고 제재 물품의 수입 경로를 소개했다.
미국과 유럽의 제재 당국은 이런 허점을 막기 위해 최근 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카자흐스탄을 직접 방문해 이들이 러시아의 제재 회피 통로가 되지 않도록 적극 나서달라고 압박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지난 2월 말 카자흐스탄을 방문한 자리에서 “미국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제재 규정을 잘 이행하는지 면밀히 지켜보고 있다”고 경고했다. 유럽연합(EU)도 최근 처음으로 러시아에 이중용도 물품을 넘긴 혐의로 우즈베키스탄 기업 2곳과 아르메니아 기업 1곳을 제재명단에 올렸다.
그러나 카자흐스탄·아르메니아·키르기스스탄 등은 러시아와 함께 ‘유라시아경제연합’(EEU)에 속해 있다. 유라시아경제연합 가입국 사이에는 통관 장벽이 거의 없어서 이중용도 물품 등 제재 대상 물자의 교역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이에 대해 아르메니아 정부 대변인은 신문에 “우린 서방의 제재를 우회하기 위한 (개인 기업의) 행위와 아무 관련이 없다”며 제재와 관련해 미국과 협의하고 있으며 제재 물품에 대한 통관절차를 더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연합의 제재 책임자 데이비드 오설리번은 지난달 기자들과 만나 중앙아시아 등이 러시아의 제재 우회 통로가 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필요하면 수출금지나 추가 제재 등 더 강력한 수단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우리 대화 상대국의 주권과 자결권을 존중한다. 다만 그들의 영토가 제재를 우회하는 플랫폼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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