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보단 실력... 개발 잘 하는 개발자 뽑는 방도를 연구합니다"
임성수 국민대 소프트웨어학부 교수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낀 심각한 문제 중 하나.
고학년이 될수록 프로그래밍을 더 열심히 해서 잘 해야 되는데, 왜 오히려 프로그래밍엔 손을 놓는 학생들이 많아지는 걸까?
말 그대로 '개발을 잘 하는 사람'이 개발자가 되는 게 맞는데, 현실에선 프로그래밍 실력이 아니라 토익 등 영어점수나 입사시험, 학력 등 '스펙'을 토대로 개발자를 뽑다 보니 생긴 현상이었다.
'이건 개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도, 개발자를 뽑으려는 회사에도 손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 그는 고교·대학 동기인 이확영 카카오 전 최고기술책임자(CTO)와 이런 구조를 바꿀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머리를 맞댔다. 2016년 두 사람이 세운 기업 '그렙'(Grepp)은 그 고민의 결과물이었다.
[곧, 유니콘] 임성수 그렙 대표
그렙은 각 회사에 맞는 코딩 시험(역량 평가)을 개발해 판매하는 스타트업이다. 지금까지 네이버·카카오 등 굴지의 회사들이 그렙의 시험을 활용해 개발자를 채용했다. "이거 하나는 정말 자부심이 있어요. 우리 사회에 개발자의 실력을 보고 채용하는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데 적잖게 기여했다는 거요." 임 대표의 말이다.
임 대표는 교수와 대표직을 겸직하다 회사 일이 바빠지며 지난해 국민대에 휴직계를 냈다. 이후 그렙의 미국 법인이 있는 캘리포니아 어바인에 거주하면서 한국과 미국을 오가고 있다. 최근 사업차 실리콘밸리를 찾은 임 대표를 만나 그렙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 기회
모두 공정한 기회를 갖는 사회를 꿈꾸다
임 대표는 인터뷰 내내 '기회'라는 말을 여러번 꺼냈다. 실력이 아닌 스펙으로 개발자를 뽑는 현상의 가장 문제는 기회의 박탈이라는 것. 학생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고 싶단 바람에서 회사를 창업하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15년 넘게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한국에서 대학이란 학생들에게 더 큰 기회를 주는 게 아니라 외려 제한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런 문제 의식은 '어느 대학 출신인지에 관계 없이, 실력이 뛰어난 사람을 선별하는 시험'을 개발하는 일로 이어졌다.
그렙은 코딩 시험과 더불어 온라인 시험 감독 프로그램(모니토)도 만들고 있다. 코딩 시험같은 비대면 시험이 확산하려면 커닝의 가능성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험 감독도 개발하게 됐다. 임 대표는 이 시험 감독 역시 기회의 평등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유독 한국에는 대면(對面) 시험이 많습니다. 국가공인 시험뿐 아니라 대기업 입사시험까지 주말에 학교 하나 빌려 치르는 경우가 많죠. 지역은 대부분 서울이고요. 그런데 이건 서울 사는 사람한테 훨씬 유리한 방식이에요. 서울 아닌 지역에 사는 친구들은 전날 서울 와서 숙소 잡아서 자고 다음날 시험 치러 가야 하죠. 그만큼 시간, 비용을 더 써야 된다는 거거든요."
그렙의 시험 감독은 응시자의 컴퓨터에 달린 카메라와 스마트폰 카메라를 통해 응시자 시선이나 자세 등을 관찰하고, 부정행위 가능성이 보이면 즉시 시험 주최 측에 경고를 보낸다. 이 프로그램은 코로나 팬데믹 때 이용이 확 늘었고, 최근에는 공인회계사시험 등 국가공인 시험까지 진출했다다고 한다.
#2. 겸허
교수든 아니든 중요한 건...
교수 창업가가 많은 미국과 달리, 한국은 상대적으로 교수가 스타트업 설립에 참여하는 일이 많지 않다. 임 대표처럼 직접 최고경영자직을 맡는 건 더 드물다.
여기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교수 창업가를 향한 선입견이 작지 않은 몫을 차지한다. "교수가 창업하면 유리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막상 투자자들에겐 교수 창업자가 인기가 많지 않아요. 소위 특권층이라 절박하게 뛰지 않을 거란 인식이 있는 것 같아요." 학교를 설득하는 것도 일이다. 교수가 창업을 하면 '학교 일에 소홀해질 수 있다'고 보는 시선 때문이다.
그렇다고 물론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다. 전문 지식이나 인맥 등은 교수의 강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교수건 아니건, 스타트업을 하는 데는 결정적 변수가 되지 않는다는 게 그가 내린 결론이다. 정말 중요한 건 '절박하게 임할 수 있느냐'라고 그는 말한다. "교수라고 대우해주는 것도,특별히 손해볼 것도 없더라고요. 저절로 겸허해질 수밖에 없어요. 정말 정글이거든요."
#3. 배움
인공지능 시대에도 배우는 사람이 살아 남는다
주 고객사인 테크기업들의 사정이 안 좋아진 지난해는 그렙에도 힘든 한 해였다. 테크기업들이 개발자 채용 규모를 확 줄인 탓에 테스트 서비스가 주 매출원이었던 그렙이 직격타를 맞았다. 이 때문에 그렙은 지난해 한국 직원 일부를 내보내는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최근엔 사업을 다각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업체들에 코딩 테스트를 만들어주는 기업간거래(B2B)를 주로 하던 데서, 프로그래밍 등의 '교육'에 중점을 둔 온라인 플랫폼으로 변화하는 중이다.
그런데 여기서 든 의문. 생성 인공지능(AI)이 개발자 자리까지 위협할 것이란 전망이 잇따르는데, 과연 코딩 교육에 대한 수요가 지속될 수 있을까. "오히려 더 필요할 겁니다." 임 대표는 자신있게 말했다. "지금도 AI가 코딩을 한다지만 사람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해요. AI가 한 일을 검수하고 보완하려면 그만큼 개발자 수준이 높아야겠죠."
더욱이 앞으로는 거의 모든 직군에서 AI와 함께 일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그의 말이다. "개발과는 전혀 상관 없는 사람도 AI를 더 잘 다룰 수 있어야 일을 잘 하고, 또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올 겁니다." 배움의 끝은, AI 시대에도 없을 것이란 얘기였다.
실리콘밸리= 이서희 특파원 sh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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