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식의 시론]퇴행하는 ‘5·18 광주’
민주투쟁 경력 없다는 이유로
박서보 예술상 폐지는 충격적
‘광주의 비엔날레’ 위축 자초
“피해 당사자가 화해 적임자”
全·盧에 손 내민 DJ 정신 중요
尹 “자유민주 투쟁” 지평 넓혀
박서보(92) 화백은 살아있는 한국 현대미술사(史)로 불리는 세계적 예술가다. 제14회 광주비엔날레 개막식이 지난달 6일 ‘제1회 박서보 예술상’ 시상식과 함께 열렸다. 그런데 비엔날레 재단은 상을 폐지하고 기탁금은 돌려주기로 했다. 광주 미술계가 “4·19 혁명에 침묵하고 5·16 정권에 순응한 인물로, 광주 정신에서 출발한 비엔날레 취지에 어긋난다”고 한 데 따른 조치다.
민주화 투쟁 경력이 없으면 함께할 수 없다는 황당한 발상이다. 문재인 정부가 ‘국제행사 국비 지원 일몰제’ 예외를 적용토록 기획재정부 규정까지 개정해 영원히 세금을 지원받게 됐음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이런데도 전국적 관심은 시들하다. 다른 지역의 많은 사람이 ‘광주니까 그럴 만하다’며 지나친다는 의미다. 광주비엔날레는 1995년 시작 때에 비해 ‘광주의 비엔날레’ 수준으로 위축됐다. 광주시장 초청에도 김건희 여사의 개막식 참석은 무산됐다. 이번 일로 순수 예술전과 더 멀어졌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광주 5·18’에 큰 빚을 졌다. 지금 60대 초중반인 77∼80학번 세대는 더 특별한 집단기억을 갖고 있다. 당시 구전(口傳)과 지하 유인물로 참상이 전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로 인한 부채의식은 지금도 남아 있다. 윤석열 대통령도 필자도 79학번이다. 윤 대통령은 재학 중 12·12 사태 모의재판에서 판사 역할을 맡아 전두환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지하철 출입문이 열릴 때 유인물 뭉치를 선반에 놓고 잽싸게 내리거나, 신문 배달을 가장해 유인물을 던져넣을 때의 무섭게 떨리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민주화운동의 산 증인 김정남은 “1970년대 긴급조치 시대는 악랄, 1980년대 국보법 시대는 살벌, 1990년대 집시법 시대는 교활했다”고 했다.
이런 한(恨)들을 승화시킨 지도자가 김대중(DJ) 대통령이다. 5·18 내란 음모 혐의로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DJ는 1997년 대통령 당선 직후 전두환·노태우 사면에 앞장서고, 취임 뒤 청와대로 초청했다.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결정한 뒤 국고 200억 원을 지원했으며, 기념사업회 명예회장도 맡았다. DJ는 줄곧 “피해 당사자가 화해 적임자”라면서 보복의 악순환을 막아 “역사의 진일보”를 이루자고 했다. DJ의 ‘영원한 비서실장’ 권노갑(93)은 인터뷰에서 “반성과 사과가 없어도 용서와 화해를 추구했던 것이 DJ의 위대함”이라면서 “살아계셨다면 전두환 빈소에도 조문했을 것”이라고 말했다.(시사저널 2022년 3월 18일)
물론 그에 앞선 노력도 있었다. 정부 차원에서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180도 바꾼 사람은 노태우 대통령이다. 스스로 신군부 2인자였고 폭동으로 보는 세력이 당시 권력 주류였음에도, 1987년 대통령 당선 뒤 정부 인수기구가 그렇게 건의하자 자신에게 족쇄가 될 것을 예상하면서도 수용했다.(남재희 저 ‘시대의 조정자’ 129쪽)
결정적 역할은 김영삼 대통령이 했다. 전두환·노태우 임기는 공소시효에서 뺀 파격적인 5·18 민주화운동 특별법을 제정해 직전 두 대통령을 처벌했다. 25년 지난 뒤 문재인 정부에서 허위사실 유포 금지를 삽입(광주왜곡처벌법)하면서 악법 비판을 듣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다. DJ 정부 때 제정된 ‘광주민주유공자 예우법’도 무려 40여 차례 개정되면서 보상·교육·취업·의료·주택·금융·양로 혜택까지 담아 유공자 명단 공개 요구가 나오는 배경이 됐다.
윤 대통령은 이런 5·18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넓혔다. 지난해 기념식에 참석해 5·18을 ‘자유민주주의 투쟁’으로 규정, 보수 이념의 연장선에도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현지에선 박서보 예술상 철폐가 상징하듯 퇴행 조짐이 보인다. 야당의 온갖 타락상에도 ‘묻지 마 지지’는 그대로다. 오월정신이 광주를 넘어서려면 배타적 피해자 인식과 민주화 투쟁 선민(選民)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DJ처럼 가해자에게 손 내밀어야 확장이 가능하다. 박정희·이승만 동상 건립에 동참한다면, DJ-오부치 선언처럼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에 앞장선다면, 아직 묻히지 못한 전두환 유골의 안장을 주선한다면, 광주는 민주화와 화해의 성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요원해 보인다. 여야 공약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5·18의 헌법 전문 수록이 어불성설인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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