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질환 흑인 노숙인 닐리, 지하철서 살해…‘누구의 범죄’인가
미국 뉴욕 지하철에서 흑인 노숙인의 목을 졸라 숨지게 한 전직 미 해병대원이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됐다. 사건 당일 백인 승객이 흑인 노숙인을 숨지게 했음에도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곧바로 풀려나면서 인종차별 논란이 일었다. 뉴욕 사회가 정신 질환을 가진 노숙인을 대하는 방식을 둘러싸고 사회적·정치적 갈등으로도 번지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나: 과잉대응 vs 정당방위
<뉴욕타임스>는 뉴욕 지하철 안에서 흑인 노숙인 조던 닐리(30)를 목 졸라 숨지게 한 백인 남성 대니얼 페니(24)가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됐다고 12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지난 1일 오후 전직 미 해병대원인 페니는 지하철에서 소란을 피우던 노숙인 닐리에게 다가가 뒤에서 목을 조르며 제압을 시도했고, 닐리는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페니를 말리거나 닐리를 도우려고 시도한 승객은 한 명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목격자들은 닐리가 다른 승객들에게 ‘적대적’으로 굴었다고 경찰에 진술했지만, 닐리가 누군가를 물리적으로 공격한 정황은 드러나지 않았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던 닐리는 사건 당시 이상행동을 보이며 ‘나는 배가 고프다’ ‘감옥으로 돌아가도 상관없다’ ‘나는 죽을 준비가 됐다’고 고성을 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백인 승객 페니의 변호인은 닐리의 폭력적인 행동을 막기 위한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페니가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된 것은 검찰이 페니의 ‘과잉대응’을 인정했다는 의미다. 당시 사건 현장을 담은 4분 분량의 영상에는 발버둥을 치던 닐리가 움직임을 멈춘 뒤에도 50초 이상 목을 계속 조르고 있던 페니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뉴욕타임스>는 페니가 닐리의 목을 조를 때 해병대에서 훈련받은 기술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닐리는 한때 뉴욕 지하철에서 마이클 잭슨을 모사하는 공연으로 이름을 알린 유명인사여서 미국 사회의 충격을 더하고 있다. 닐리의 가족들은 그가 14살 때 어머니를 살인 사건으로 잃은 뒤 정신 질환을 앓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춤을 좋아하던 닐리는 마이클 잭슨의 춤을 따라 하는 것으로 상실의 어려움을 견뎌왔지만, 결국 학교를 자퇴하고 탈선의 길을 걸었다. 노숙 생활을 하던 중에도 닐리는 뉴욕 지하철에서 마이클 잭슨의 춤을 추곤 했고, 그의 길거리 공연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서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쟁점 ① 인종차별 논란
무장하지 않은 노숙인 닐리가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만으로 전직 해병대원이 목을 조르는 고도의 기술을 사용해 제압할 필요가 있었는지부터 논란이다. 닐리는 곤경에 처해 배고픔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흑인이기에 승객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됐다는 것이다. 캐시 호컬 뉴욕 주지사도 “그(닐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며 “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닐리)를 억누르는 영상은 매우 극단적인 대응이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흑인 남성이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면서 ‘공권력의 인종차별’에 대한 대대적 시위가 촉발된 바 있다. 흑인 문화를 주로 취재하는 칼럼니스트 타요 베로는 닐리 사건을 다룬 <가디언> 칼럼에서 “대명천지에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 방관자들 앞에서 취약한 흑인을 살해하는 것은 이제 경찰만이 아니다”라며 “지하철에서 도움을 청하는 흑인이든, 실수로 초인종을 잘못 누른 십대든, 흑인에게 가능한 치명적인 무력을 사용하려는 의지는 미국 기풍의 버그(오류)가 아니라 특징”이라고 썼다.
사건 당일 밤 페니를 조사하고도 ‘도주의 우려가 없다’며 석방한 경찰의 조처도 문제가 되고 있다. 에이드리언 아담스 뉴욕시의회 의장은 “이번 사건에서 우리 법체계의 초기 대응은 충격적”이라며 “흑인과 다른 유색인종이 직면하고 있는 이중잣대를 전 세계에 보여줬다”고 밝혔다. 경찰의 안일한 대응에 대해 인종차별이라는 비판이 일자 검찰이 곧장 페니에 대한 기소 계획을 밝혔고, 페니는 지난 12일 오전 경찰서에 자진 출석했다. 닐리가 숨진 지 11일 만이었다.
쟁점 ② 지하철 안전 강화 vs 노숙인 대책 개선
이번 사건은 인종차별 논란을 넘어 더 큰 사회적 갈등으로 번지고 있다. 일부 뉴욕 시민들은 이번 사건을 “뉴욕시가 정신질환자를 돌보는 데 실패한 결과”로 보고 있지만, 또 다른 시민들은 “뉴욕시의 공공안전, 특히 지하철 안전에 대한 우려”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사건이 “도시를 가르는 정치적 로르샤흐 테스트(잉크 반점 카드를 이용한 인격진단검사)가 되고 있다”고 평했다.
닐리가 정신 질환을 앓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페니의 대응을 지지하는 시민들도 나타났다. 일부 보수 정치인들은 페니를 ‘선한 사마리아인’이나 ‘슈퍼맨’에 비유하고 있고, 한 기독교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에서는 페니의 변호사비를 위한 모금 캠페인에 186만 달러(한화 약 25억원)가 넘게 모였다.
이런 분위기는 정신질환자를 ‘일반’ 승객들로부터 격리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으로 흐르고 있다. 지난주 에릭 애덤스 뉴욕시장은 “상황은 다 다르지만 ‘심각한 정신질환자들은 지하철에 태울 수 없다’는 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며 “누군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대응해서는 안 된다”고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반면 미국의 진보 진영은 이번 사건을 ‘공적인 살인’으로 보고 있다. 미국 민주당 소속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은 이 상황을 “역겹다”고 일갈했다. 그는 “이 도시가 임대료를 올리고 사회 서비스를 박탈하는 동안 닐리는 집이 없었고 음식이 필요해 울부짖었다. 권력자들이 가난한 사람을 악마화하는 동안 살인범은 소극적인 헤드라인으로 보호받았다”고 비판했다.
노숙인에 대한 강경 대응보다 그들을 지원하기 위한 사회 서비스를 고민하는 것이 먼저라는 주장이다. 지난 10일 일부 뉴욕 시민들은 사건이 벌어진 뉴욕 지하철역 플랫폼에 모여 “경찰이 아닌 주택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지하철에 더 많은 경찰을 배치해 노숙인을 통제할 것이 아니라 노숙자를 위한 주거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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