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를 공동묘지로? …무덤과 동거, 짓밟힌 인권

전북CBS 김용완 기자 2023. 5. 15.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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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맺힌 47년…공동묘지에 버려진 사람들①]
대부분 양잠업, 화전민으로 몰려 공동묘지에 강제 이주
피난민 방불, 한동안 무덤 사이 움막 생활
무덤과 42년 기나긴 동거, 밤엔 귀신소리 착각도
짐짝 취급 버림받아, 사과 커녕 지원 약속도 감감무소식
편집자 주
천년 사찰 전북 김제 금산사 뒤 3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김제 금동마을 일대 주민, 뽕밭 등을 일구며 살던 평범한 일상이 한순간 송두리째 무너졌다. 47년 전, 화전민으로 몰려 마을 전체가 헐리고 공동묘지로 내쫒겨 짐짝처럼 내팽개쳐졌다. 대신 지원한다던 땅은 지금까지도 감감무소식. 어느덧 대부분 촌로로 변한 마을 주민들, 수십 년의 한과 설움을 간직한 채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전북CBS는 5회에 걸쳐 산림녹화사업의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있는 화전민 공동묘지 집단 이주 사건의 이면을 짚어본다.
1973년 김제시 성덕면 공동묘지로 내쫓긴 주민들이 임시로 움막을 짓고 생활하고 있다. 마을 주민 김창수씨 제공
▶ 글 싣는 순서
①왜 우리를 공동묘지로? 무덤과 동거, 짓밟힌 인권
②땅 준다며 내쫓더니…반세기 가까이 나몰라라
③밀어붙이기식 화전정리, 행정도 우왕좌왕
④'화전정리법'의 빛과 그림자, 우려가 현실로
⑤사과와 치유을 위하여, 정치권·법조계의 시각은?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동 마을 일대 주민 100여 명이 공동묘지로 내쫓긴 것은 1976년 3월.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제군은 금동마을 일대가 '화전정리에 관한 법(이하 화전정리법)' 규정에 따라 △경사도 30도 이상이고 △도립공원인 금산사 경관 저해 이유 등을 들어 철거 계고장을 잇따라 보내며 으름장을 놓았다.

마을 주민들은 "마을의 역사가 100년이 넘고 뽕밭을 일구거나 약초를 재배하는 등 화전민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 주민은 "당시 김제군이 양잠을 장려하면서 지원받은 보조금으로 잠실을 마련하는 등 마을 주민들이 대부분 잠업에 종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선 보상을 요구하며 철거 반대대책위원회를 이끌었던 주민 김창수(78)씨를 상대로 경찰이 구속영장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까지 전해지는 등 주변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김제군은 '철거를 재고해 달라'는 주민들의 건의와 호소에 아랑곳하지 않고 끝내 '행정대집행'을 실시했다.

김제 금동마을 주민들은 한동안 무덤 사이 여유 공간에 가마니와 거적 등으로 임시 거처를 마련해 피난민처럼 생활했다. 마을 주민 김창수씨 제공


김제군은 트럭과 예비군을 동원해  동네 주민들을 서북쪽을 20km 가량 떨어진 김제군 성덕면에 내려놓은 뒤 그대로 떠나버렸다"는 것이 주민들의 주장이다.

그런데 이들 주민이 도착한 곳은 무덤 340기가 즐비한 공동묘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공동묘지(김제군 군유지)로 내쫓긴 이들 주민은 당장 생존의 문제에 맞닥뜨렸다.

공동묘지 무덤 사이 빈 공간에 가마니 등을 이용해 움막을 짓고 추위, 더위와 싸웠고 식량 사정도 여의치 않아 어떤 때는 구걸할 수 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렸다.

당시 31세였던 마을 주민 김창수씨(78)는 "마을 주민들이 개, 돼지 취급을 받았다"면서 "식량과 땔감이 없어 가장 힘들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김제군에서 씨누에 생산단지로 지정하는 등 주로 양잠을 하면서 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었던 금동마을.

금산사 뒷편 철거된 금동마을 자리에 가면 현재도 흔적(좌부터 공동 우물터, 돌절구, 호미)이 남아 있다. 김용완 기자


하지만 스스로를 '상거지중의 상거지'라고 말할 정도로 공동묘지로 집단 이주 후 마을 주민들의 삶은 한동안 말 그대로 피난민, 그 자체였다.

당시 국민학생이던 한 주민은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피난민'이라고 놀렸고 요즘 말로 왕따를 당하면서 피난민 소리가 가장 듣기 싫었다"고 회상했다.

또 다른 주민은 "밤에 무슨 소리가 나면 귀신 소리처럼 느켜져서 밖에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며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기구한 이들의 삶은 이웃한 마을 주민의 증언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당시 공동묘지에서 1km가량 떨어진 곳에 살던 주민(현재 김제시 공무원)은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한센병 환자들이 사는 곳"이라며 "그 마을에 가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전했다.

공동묘지로 쫓겨난 주민들은 새로운 터전이 된 공동묘지 마을을 '개미마을'이라고 불렀다.

주민 김창수씨는 "어떻게 든 개미처럼 서로 서로 힘을 모아 잘 살아보자는 의미에서 그렇게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마을 주민 김창수씨가 과거 공동 묘지였던 곳을 가르키고 있다. 김용완 기자


1977년부터 시작된 개미마을 공동 묘지 이전 사업이 완전히 마무리된 것은 지난 2018년, 무덤과의 기나긴 동거가 42년 만에 끝났다.

이들을 공동묘지로 집단 이주시킨 법적 근거는 '화전정리법'

'산림황폐화를 막고 화전경작자의 삶을 안정하게 한다'는 것이 법 제정 취지였지만 이들 개미마을주민들에겐 허상에 불과했다.

대신 준다던 땅, 당시 김제군의 '대토' 지원 약속도 여태껏 감감무소식이고 정당한 보상 요구에 대해서도 역시 답이 없다.

특히 화전정리법을 들이대며 산 사람들을 공동묘지에 마치 짐짝처럼 내팽개친 폭압적인 공권력 집행 그리고 짓밟은 인권에 대해서 그 어느 누구도 공식적인 사과의 말 한마디가 없다.

1976년 철거 당했던 32가구 중 8가구는 당시 자녀 등 연고가 있는 타지로 거처를 옮겼고 갈 곳이 없어 공동묘지로 강제 이주 당한 24가구 가운데 절반이 마을을 떠났다.

한 맺힌 47년의 세월, 치유되지 않은 이들의 설움과 고통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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