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의 디지털 문익점···35년간 사법정보화에 혼신"
(지디넷코리아=방은주 기자)19세기 초반과 후반, 현대철학을 이끈 두 철학자가 있다. 유물론의 아버지로 불리는 포이어바흐와 실존주의 선구자 니체다. 니체는 흔히 '망치를 든 철학자'로, 포이어바흐는 '불꽃을 품은 철학자'로 불린다.
강민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의 지난 35년 삶도 그랬다. 그는 자주 '망치'를 들었고, 이에 "괴짜 같다"는 반발과 질시가 뒤따랐다. 하지만 옳은 길을 간다는 가슴에 품은 불꽃이 있었기에 계속 갈 수 있었다.
파이어니어들이 그렇듯, 그도 35년간 사법부에 있으며 최초 '흔적'을 많이 남겼다. 전자소송이 그의 손을 거쳐 국내서 탄생했고 '음악 법정' '미술 법정'을 만들어냈다. 특히 전자소송의 경우 그가 미국에 노하우를 배우러가 배운 것 전부를 240쪽의 보고서와 650MB CD롬에 담아 귀국, 우리나라가 전자소송을 시행하게 한 모멘텀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그는 '디지털 문익점'이기도 하다.
2017년 1월 부산지방법원장을 떠나며 그 곳 오피니언 리더들과 법원 구성원에게 한 강연(제목:'혁신의 길목에 선 우리의 자세')은 유튜브 조회수가 136만회나 기록했다. 숏폼(짧은 영상)까지 합치면 220만뷰가 넘는다. 이 강연으로 그는 구글 등을 매우 잘 쓰는 'SW 파워유저' 인상을 대중에게 강력히 심어줬다.
중학교때 시계와 라디오를 분해하는 걸 좋아할만큼 엔지니어 기질이 다분했음에도 홀로 6남매를 키운 어머니에게 효도하기 위해 강 부장판사는 서울대 법대(77학번)에 진학했다. 1958년생으로 1982년 사법 시험에 합격(24회)했다.
연수원을 마치고 군 복무로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있으며 그곳에서 처음으로 컴퓨터(중대형 터미털)와 만나 디지털 세상에 눈을 떴다. 이후 사법부에 돌아와 디지털 전도사가 됐고 사법정보화에 큰 역할을 했다. 독서도 많이해 법원도서관장 이임때는 30여 년간 읽고 수집한 자연과학 대중서 전부를 법원도서관에 기증했고, 현재 서초동 법원도서관 분실(대법원)에 강민구 서가가 따로 있다.
1988년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을 시작으로 서울, 진주, 대구, 성남, 대전 등에서 판사 생활을 했고 창원과 부산에서는 법원장으로 근무했다. 대법원 사법정보화발전위원회위원장(2016년)과 대법원 법원도서관장(2017~2018.2.)도 지냈다. 그는 36년의 법관 생활을 마치고 내년 1월말 정년퇴직한다. 이후에는 디지털 문맹 퇴치에 여생을 보낼 작정이다.
따스한 햇살이 비추던 지난 9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 서관 사무실에서 강 부장 판사를 만나 '망치'와 '불꽃'의 35년 판사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터뷰는 그가 경남 하동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녹차를 마시며 시작했다.
-녹차 잎을 하동에서 직접 만들었다고? 차 마니아인가? 하루에 차를 몇잔 정도 마시나?
"2005년부터 경남 하동에서 내가 직접 녹차 잎을 만들어 내 방에 오는 사람들에게 차(茶)로 주고 있다. 벌써 18년째다. 녹차는 마음을 차분히 풀어줘 소송을 해결하는데도 도움을 준다. 이 방에서 녹차를 마시며 소송을 해결한 적도 많이 있다. 새벽에 일어나 직접 덖은 하동 녹차 한 잔을 연하게 마시고 머리와 폰을 리부팅한 후 출근한다. 출근해서는 핸드드립으로 간 커피를 먼저 마시고 이후 일과중 녹차를 몇 잔 더 마신다."
-최근 ‘디지로그 명심보감’ 27개 영상을 작성해 온라인에 공개했다. 어떤 내용인가?
" 2017년 1월 부산지법원장을 마치고 부산을 떠나며 한 고별강연(제목:혁신의 길목에 선 우리의 자세)'이 유튜브에서 시청자가 135만 명이나 됐다. 당시 강연과 최근 업데이트한 강연이 분량이 너무 길더라. 100분이 넘는다. 그래서 이를 5분 안팎으로 쪼개 숏폼으로 다시 만들었다. 그게 '디지로그 명심보감'이다. 지난 6일 하루만에 1~12, 26~27편을 제작했다. 13~25편은 기존 영상을 재구성했다. 이 과정 모두를 나 혼자 스마트폰으로 했다."
-부장판사가 파워유저라 흥미롭고 신기하다. 파워유저가 된 동기나 계기가 있나?
"1985~1988년 육군사관학교 교수부에 배치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군 복무때 배치받은 곳이 육사 교수였는데 중·대형 서버에 연결된 더미터미널을 업무에서 사용하며 당시 유행하던 코딩언어인 파스칼 등을 익혔다. 이후 1988년 법관 임관 후 조립 XT급 PC를 개인돈으로 장만했고 지금까지 컴퓨터와 디지털에 몰입하고 있다. 내가 PC를 사비로 구매하고 3년뒤인 1991년을 전후해 국가가 법관에게 PC를 지급했다."
-소송을 대신해주는 인공지능(AI) 솔루션 개발이 현재 진행 중이다. 이의 개발이 끝나는 연말에는 전통적인 소송은 AI가 다 써주는 세상이 올 거라고 예상했다. 이렇게 되면 구체적으로 변호사, 판사, 검사에는 어떤 변화가 올까?
"한국 법조에 컴퓨터 도입 이후 가장 큰 충격이 올 것이다. 대형 로펌은 인건비 절감과 더 많은 사건 수임이 예상된다. 반면 개인이나 소규모 변호사 사무실은 많이 힘들어질 거다. 반대의 상황도 상상할 수 있다. 브랜드, 경력, 실무 노하우, 마케팅 등이 약한 소형 로펌 혹은 개인 변호사는 GPT같은 생성AI 기술을 잘 활용하면 대형 로펌과 다른 새로운 법률 서비스 시장을 만들어갈 수도 있다. 특히 판결문 작성 특급 도우미인 AI 출현으로 1주당 3건의 판결문 작성 관행이 사라질 거다. AI는 검찰의 공소장 작성 도우미와 경찰의 의견서 자동 작성 도우미 역할도 잘 할 것이다."
-사법 발전을 위해 법원에 있는 수백만 건의 하급심 판결문을 실시간으로 공개해야 한다고 여러번 강조했다
"초임 판사 시절부터 일관되게 판결문 공개를 주장해 왔다. 국민을 위해 판결문 공개가 전면 실시돼야 한다. 개인정보보호법 등 여러 현안을 국회에서 주도적으로 정리해 줬으면 한다. 하급심 판결문 공개는 생성형 AI 발전은 물론 빅데이터 산업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 그 이득은 국민이 볼 것이다."
-법원 시스템을 바꿀 권한이 생긴다면 무엇을 어떻게 바꾸고 싶은가?
"그럴 일도 없고, 가상적이라 매우 조심스럽지만, 가장 먼저 형사 전자소송의 속도를 최단기간에 이루겠다. 법원·검찰·경찰 기관별 내부 업무처리 특급 도우미로 법원 내부용 GPT를 최단기간 내에 개통할 거다. 또 판결문 전문을 익명 처리 과정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전면 공개하고 싶다. 과도한 익명화는 판결문을 암호 책으로 변질시킨다. 법원 내부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원장 선거 선출제도 즉각 폐지해야 한다. 법관에게 동기부여를 할 공정한 인사제도 확립과 엄정한 평가 제도도 시행할 거다. 후임 대법원장이 누가 되던 이런 점을 유념해 주면 좋겠다."
-대법원 사법정보화발전위원회 위원장(2016년)과 대법원 도서관 관장(2017년)으로 일했다. 당시 어떤 일을 했나?
"기존 종합법률정보 시스템을 중지시키지 않은 상태에서(백그라운드 작업) 검색엔진 개선 등 효율성을 많이 향상시켰다. 또 위원회에서 내·외부 전문가들과 긴밀한 토론과정을 거쳐 1000쪽이 넘는 차세대 사법정보화 시스템에 관한 기술 쟁점 방향을 결정했다. 일종의 차세대 정보화 마스터플랜을 만든 거다. 이 시스템은 내년에 개통한다."
-2011년에 대한민국 판사 최초로 구글, 페이스북, 이베이 등 실리콘밸리 소재 미국 IT 기업을 방문했다
"당시 실리콘밸리 리더스클럽에서 분야별 한국 IT 전문가 10여 명을 초청했다. 당시 받은 디지털 충격이 매우 컸다."
-제일 기억나는 거나 보람된 일은 뭔가?
"몇 가지 변곡점이 있었는데 가장 첫 번째로 기분 좋았던 거는 1998년 9월 1일 종합법률정보를 클라이언트 서버 버전으로 내부망에 깔은 거다. 훗날 대법관이 된 당시 김용담 수석재판연구관이 "강 판사가 재판연구관 목숨을 연장해 줬다"며 좋아했다. 일부연구관들은 식사를 사기도 했다. 얼마나 고마웠으면 그랬겠나. 당시 재판연구관 일이 크게 줄었다.
전자소송 관련 책을 발간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750쪽 자리 원고를 탈고해 2003년 이메일로 박영사에 보냈는데, 그날은 한국의 전자소송 꽃이 피우는 씨앗을 뿌린 날인데, 마침 어버이날 하루 전에 탈고를 끝냈다. 당시 바깥에는 비가 억수같이 왔는데 탈고 엔터키를 치고나서 울면서 차를 몰고 고향 어머니한테 갔다.
법원 내부 DB에 업로딩 된 내 판결문이 1만156건이나 된다. 이 수치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치 일거다.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 에버노트 전자메모에 1만8000건 이상을 기록한 것도 나에게는 매우 의미있는 자산이다. 또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2020년 3월부터 1년 6개월간 1만1,000쪽이 넘는 외신기사를 엄선해 정리하고 번역해 SNS로 국민에게 제공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작년 6월 10일 서울법대 총동창회에서 (자랑스러운) 창의적인 동문상 받은 것도 기뻤다."
-35년간 사법부에서 있으면서 수많은 '최초'를 만들었다
"기존 사법부의 관행을 많이 깬 건 맞다(웃음). 지금은 없어진 밤샘 수사도 2018년 내가 없애자고 처음 주장했다. 당시 이 주장을 하며 눈 밝은 후배들의 분발을 기대한다고 내부망에 올렸더니 무슨 댓글이 달린지 아나. "우리는 눈도 어둡고 지혜도 없으니 선배나 잘하세요"라는 취지의 댓글이 달렸다. 후배들에게 이런 일도 당하며 살아왔다."
-전자소송 도입할때도 반대가 심했다고 들었다
"그렇다. 특히 일반직원들이 심하게 반대했다. 기득권 침해로 본 거다. 거의 미친놈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해보니, 특히 직급이 가장 낮은 실무관들에게 이 시스템이 구세주였다. 이전에는 종이 기록을 송곳으로 뚫고 묶어야 하고 또 항소의 경우 1, 2, 3, 4 넘버링해가며 수백페이지, 심하면 수만 페이지를 다 찍어야 했다. 거의 죽을 노릇의 노동인데, 이걸 엔터키 한 번 치면 항소 기록이 쫙 올라가게 하니 너무 좋아했다. 그렇게 욕하던 사람들이 6개월 뒤 화장실에 가서 웃더라. 지금은 우리 법원서 전자소송 없는 세상은 상상하지 못한다."
-우리나라가 전자소송을 어떻게 하게 된 건가? 미국에서 배워와 하게 됐다고 들었다
"이걸 하려고 나 포함해 두 명의 판사가 특명을 받고 2000년에 미국에 갔다. 당시 미국이 50개주 법원을 지원하는 행정처인 NCSC를 버지니아주 일리암스버그에 뒀다.
이 곳에서 3개월간 하루 8시간씩 빡세게 공부하며 배웠다. 배운 걸 캠코더에 다 담았다. 여기에 있으면서 "이거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자소송은 당시 미국에도 미래의 법정일만큼 선진적이였다. NCSC옆에 있는 월리엄앤메리 대학에 '21세기 법정(Courtroom to 21)'라고 부른 쇼룸이 있었는데, 이 곳에서 파일럿으로 전자소송 시스템을 운영했다. 우리나라도 이를 도입해야 하겠다는 생각에 밤낮을 잊고 배웠다. 프린트물을 하나하나 다 스캔했고, 관련 자료를 650메가 CD롬에 모두 담아왔다. 미국은 일본과 다르다. 달라고 하면 다 준다. 내가 훔쳐온 게 아니다.(웃음)."
-당시 보고서 분량이 엄청났다던데
"240쪽 연수보고서를 냈다. 당시 연수를 가면 보통 보고서가 30쪽 내외였다. 평상시 보고서보다 분량이 8배 많았다. 인사실에 있는 후배 판사들이 "1년 유학가도 20페이지나 30페이지 보고서를 내는데 3~4개월 갔는데 250페이지 보고서를 내면 다들 죽는다"며 난리가 났었다. 일부 일선 구성원들은 전자소송을 시행하자고 하니 황당한 소리를 한다고도 했고."
-전자소송과 관련해 또 다른 에피소드도 있다고...
"미국에서 보고서를 쓰던 중 하드를 깨먹어 내용이 다 날아갔다. 눈앞이 깜깜했다. 2월 12일 귀국비행기로 김포에 도착했는데, 18일자로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로 발령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보고서는 써야하는데 발령지인 대구로 가야하고... 정말 속에서 불이 났다. 시차 때문에 잠도 안오고 해서 5일만에 248쪽 되는 보고서를 새로 다시 썼다. 책으로 만들어 전달하고 차를 타고 대구로 내달렸다."
-우리나라 법원에서 전자소송이 언제 이뤄진건가?
"2010년 4월 26일 특허법원에 제기된 사건을 대상으로 한 특허전자소송서비스를 시작으로 다음해인 2011년 5월 2일 민사전자소송을 개시했다. 현재 형사사건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전자소송이 실시중이다. 형사는 일부 재판부가 시범으로 하고 있는데 내년 이후 본격 시행한다. 한국 전자소송시스템은 세계 톱3에 들만큼 우수하다. 처음 시작할때는 돈도 없었고 이걸 해야하는 인식도 부족했지만 우리에게 종합법률정보라는 데이터베이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
-2017년 1월 부산에서 시행한 강연이 유튜브 조회가 136만회를 넘었다
"전혀 생각치 못한 일이다. 원래 부산 법무사회에서 특강을 해달라고 해 한거다. 법원 판사들과 직원도 같이 들었다. 다른 부산 관내에서도 강의 요청이 많았는데 못 간 곳이 여러 군데였다. 그들에게 주려고 비디오로 찍어 유튜브에 올린 거다. 유튜브에 올리면 대량으로 메일을 안보내도 되고 링크만 보내면 되니까. 그래서 전문가가 아닌 총무과 직원이 영상을 찍었다. 그런데 이게 136만 조회까지 갔다."
-국내 첫 음악 법정 도입은 무엇인가?
"2000년 초반 성남법원에서 형사 단독판사를 할때다. 판사 세명이 업무를 하다 한명이 나가 두 명이 사건을 맡다보니 일이 넘쳤다. 법정도 북새통이였다. 법정에 들어오면 앉을 자리가 없었다. 이게 안돼보였다. 우리 집에서 노는 오디오시스템을 가지고 와 법정에 설치했다. 오전 9시부터 10시까지 기다리는 피고인하고 보호자들에게 틀어줬다. 초조하게 기다리는 사람들 마음을 위로해 주려고 한 거다. 주로 크로스오버나 명상음악을 틀었다. 법정 경위를 비디오쟈키 시켰다(웃음). 120년 근대 사법 역사에서 처음으로 한 거다. 당시 강금실 법무부 장관 비서실에서 전화가 와 우리 아이디어를 쓰겠다고 하더라. 교도소 구치소 식사시간에 음악을 틀어주겠다면서."
-미술 법정 도입은 뭔가?
"2011년 노르웨이와 스웨덴, 핀란드를 8박 9일간 견학을 갔다. 가는 곳마다 카페처럼 법정에 미술품이 걸려있었다. 지역 로컬 작가들의 그림이 쫙 걸려 있었다. 오슬로 시청에 가봐라. 높이가 3층이 넘는데 그림으로 덮여 있다. 마치 미술관 같다. 당시 나에게 권한이 주어지면 대한민국 법정을 완전히 갈아엎어 버리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세계적으로 이런 곳이 한두군데가 아니였다. 그래서 내가 창원 법원장으로 간 2014년 2월에 행정처나 대법원장에게 사후보고 하고 법정을 미술품으로 채웠다. 법원에 돈이 없으니 지역 미술가협회 도움을 받았다. 표구는 우리가 했다. 도록을 만들어 주니 지역 미술가들도 좋아했다. 나중에는 지역 미술가들이 서로 법원에 그림을 걸려고 했다."
-우리나라 사법부에 처음으로 시도한 일이 이들말고도 많다
"그렇다. 꽤 된다. 법률 데이터베이스와 미술 법정, 음악 법정 외에 국내 사법사상 처음으로 실제 재판장에서 음악을 틀어 엄마하고 딸을 합의시켰다. 또 수백억짜리 특허 재판중 판사실로 일본과 한국 회사 중역을 불러 녹차를 마시며 중재해 몇백억 사건을 해결했다. 밤샘 수사와 포토라인 없애자고 주장한 것도 처음으로 지금은 70년된 이 악습이 없어졌다. 이외에도 퍼스트가 많다. 35년간 판결한 데이터베이스가 1만 건이 넘는 것도 내가 유일무이하다. 이 기록은 앞으로도 영원히 안 깨질거다. 에버노트에 개인 메모가 1만 8천 건이 넘은 것도 처음이다. 또 전자책을 최단기간에 내 것 11권과 다른 사람 것 6권 등 총 17권을 만든 것도 내가 사법부에서 처음이다."
-빛에는 어둠이 따른다. 시기나 질시는 없었나?
"왜 없었겠나. 그런데 2년전에 다 사라졌다. 계기가 있었다. 대학 1년 후배이자 연수원 동기로 작고한 윤성근 판사가 3개월간 투병할때다. 윤 판사가 신문에 쓴 에세이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걸 다 모아 전자책으로 만들었다. 이 책에 넣을 동기생들 격려사도 카톡으로 하루만에 모아 추가했다. 책 제목이 '법치주의를 향한 불꽃'이다. 이 책을 내가 혼자 몰입해 48시간만에 만든 걸 보고 더이상 나에 대한 험담이나 질투를 하지 않았다. 그전에는 강민구 판사 뒤에 엄청난 인력이 있다는 루머가 많았다. 그런데 윤성근 판사 전자책 발간을 계기로 이런 오해가 싹 없어졌다. 전화와 카톡과 메일로 사과 문자를 많이 받았다. 인생이 참 묘하다. 현재 내가 일하는 마지막 부서가 고 윤성근 부장판사 집무실이고, 그 분 업무를 이어받아 일하고 있다."
-군 복무때 육사에서 교수로 일한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고 했다. 컴퓨터도 그때 처음 봤다던데
"사법시험에 붙으면 군 법무관 교육받고 3년을 장교(중위)로 야전 부대에 가야한다. 군 미필자는 이게 의무다. 이 3년짜리를 나는 육사에서 한거다. 육사 교수로. 그때 처음 컴퓨터를 봤다. 눌리면 밀리고, 지우면 땅겨오는데 도깨비도 그런 도깨비가 없더라. 기계식 타자기를 갖고 육사에 갔는데 기계식 타자기를 바로 내던졌다.(웃음). 육사 교수 3년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일주일에 12시간씩 생도들에게 강의를 했다. 3년했으니 1500시간이다. 이게 재판할때 큰 도움이 됐다. 내가 대화나 강연을 막힘없이 하는 이유도 육사 교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창원과 부산에서 법원장 할때 지역TV에 5분이나 10분정도 기관장 인터뷰를 했는데, NG를 한 번도 안 낸 유일한 기관장이 나였다고 하더라(웃음).
육사 교수 시절이 힘들었지만 돌아보니 보약 중에 상보약이였다. 육사가 오늘날의 나를 만든거다. 군대 생활이 자랑스럽다고 떠드는 판사 중 하나가 나다. 사실상 육사 홍보대사를 맡은 격이기도 했다. 2018년 전역후 30년만에 육사 1~4학년 생도 1200명 전부를 모아놓고 육사 강당에서 2시간 강연을 한 적도 있다. 정말 감격 그 자체였다. 올해 4월5일 식목일에는 40년이 지나 용산고 모교 강당에서 후배 재학생들에게 강연을 했다. 고향 떠난 아이가 어른되어 간 것처럼 40여년이 지나 졸업식때 시상을 받던 그 강당에 서서 강연했다. 이 역시 감격 그 자체였다. 육사 강연은 불러주면 또 한번 하고 싶다(웃음)"
-어렸을적에도 기계에 호기심이 많았나?
"그렇다. 중학교 때 시계하고 라디오를 분해하고 그랬다. 지금 다시 대학교에 입학한다면 아마 공대에 갔을 것 같다. 내가 대학에 들어갈때만해도 법대가 최고니 어머님게 효도하느라 거길 들어갔다. 내가 6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37살부터 6남매를 키워온 어머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서울대 법대 입학이 최선이였다."
-공대 갔으면 돈도 많이 벌었을듯 하다
"친구들도 하나같이 그런 말을 한다. 내가 판사 안하고 IT기업을 창업했으면 떼돈을 벌어 재벌이 됐을 거라고(웃음). 그래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전자소송 등 무형의 가치로 수십 조원을 대한민국 국민에게 줬으니."
-사법부 정보화 1세대인가?
"아니다. 나는 1.5세대다. 최근 작고하신 윤종수 변호사님, 법무법인 대표인 황찬현 전 감사원장님 등이 1세대다. 내가 초임 판사 할 때 윤 변호사님은 검사직을 그만 둔 변호사였다. 이 분도 하늘에서 떨어진게 아니고 임준호라고, 사법시험 수석한 작고한 내 대학과 연수원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가 법무관할 때 디베이스 쓰리라는 도구로 판례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데이터 입력이라 밑빠진 독에 물 붓기여서 이를 윤종수 변호사한테 넘겼다.
돈이 있는 윤 변호사는 이를 수작업 인력으로 입력했고, 당시 법원에 있던 강봉수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가 이 DB 데이터를 인수했다. 강 부장판사가 법원 도서관장으로 왔고 내가 이 분 밑에서 조사심의관으로 있으며 이 분을 도와 '법고을 LX'라는 650메가 크기 데이터베이스를 CD로 만들어 전국 판사들에게 나눠줬다. 이걸 기초로 역사적인 종합법률정보시스템 버전 1.0 CS 버전이 98년 9월 1일 나온 거다. 한국정보법학회장 1기 회장인 황찬현 전 감사원장과 2기 회장인 최성준 전 방통위원장이 1세대고 나는 1.5세대다. 한국정보법학회 3대 회장을 했다. 현재 회장인 이규홍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는 3세대쯤 되겠다."
-무엇을 처음 주창하는 파이어니어는 외롭다. 외롭지 않았나? 사람은 밸류(가치)만 갖고 살 수 없다. 재미있는 건 무엇인가? .
"외로웠지만, 내가 가는 길이 정당했으니 여기까지 왔다. 딴 사람들이 오해하거나 음해해도 새로운 것을, 새로운 가치 창조를 했다는 점에서 재미있고 엔돌핀이 막 돈다. 크리에이티브한 사법 행정과 재판을 한 것이, 만족하는 정도가 아니라 엔돌핀이 그때마다 막 1천%씩 나오는 것 같다. 법원 고위층 누구보다 내가 더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친 게 아닐까. 나는 이것으로 만족한다."
-디지털시대, 똑똑하게 살아남는 방법 5가지를 강조했다
"생각하는 힘인 '생각근육'을 키우는 게 핵심이다. 쉼 없는 양질의 독서와 하루 한 줄이라도 적는 글쓰기의 생활화도 중요하다. 명상과 사고실험 생활화, 각계 전문가 고수에게 온오프라인으로 묻고 배우는 것도 필요하다. 여기에 디지털 기술을 잘 쓰는 파워 유저 습관을 만들면 디지로그 내공을 갖춘 고수가 된다."
-판사님의 생각근육과 육체근육은 어떤가?
"나는 2002년부터 약 15년간 108배 수련을 했다. 지금은 1일 1만보 걷기와 주말 산행을 습관으로 만들었다. 마음 맞는 고교 친구들과 일요일 산행을 매주 하고 있다. 20년이 넘는다. 항상 소식하고 탄수화물을 적게 먹으며 야채나 단백질을 먼저 먹는다. 내 키가 180센치고 몸무게가 72kg인데 30년째 플러스마이너스 1kg를 유지하고 있다. 독서는 전자책과 종이책을 불문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다. 우리 아이들 성장기에는 손잡고 주말마다 대형 서점 방문이 하나의 일과였다."
-나를 바꾼 책이나 아이 오프닝(eye opening) 책은? 또 나를 바꾼 사람이나 롤 모델은?
"책은 윤석철의 '삶의 정도', 멘토는 지리산 사시암 진문 스님이다. 스승이자 롤 모델은
초임법관시 지도부장이였던 고 손지열 대법관이다. 내 인생의 전환점은 육군사관학교 근무다."
-좌우명이나 묘비명이 있다면?
"적선지가 필유여경(선한 일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넘쳐흐른다)이다"
-하루 일과는 어떻게?
"새벽에 기상해 직접 덖은 하동 녹차 한 잔을 연하게 마시고 머리와 폰을 리부팅한다. 이후
명상과 가벼운 걷기로 시작해 사무실에 출근한다. 이후 재판업무에 몰입하고 퇴근 후 걷기와 독서, 넷플릭스 영화 보기 등을 한다. 잠은 6시간 이상 충분히 잔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건 무엇인가?
"취미로 사진과 여행을 즐긴다. 할머니, 어머니의 공덕과 집사람을 배우자로 만난 것을 인생의 행운으로 알고 있고, 일상에서 명상과 기록을 습관화 한 것이 현재의 나를 존재케했다."
-은퇴후 하고 싶다는 디지털 상록수 이야기를 해달라
"2017년 1월 영상이 국민 136만 명이 볼 거라고 생각도 안했는데 숏폼 영상까지 220만이 봤다. 국민 5%가 이 영상을 봤다. 내가 책임을 다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법부에서 은퇴하면 디지털 문맹과 디지털 격차 해소에 여생을 보내고 싶다. 앞으로 자유인이 되면 변호사업과 함께 디지털 사각지대를 깨부수는 역할을 하고 싶다. 일제강점기 시대 농민 계몽운동을 다룬 심훈의 상록수처럼 디지털 분야에서 그런 일을 하고 싶다. 내년 2월1일부터 자연인이다."
-마지막으로 지디넷 독자와 국민에게 한마디 해주신다면
급변하는 디지털화의 파도에 슬기롭게 올라타서 '호기심과 탐구심, 열정, 이타심'으로 무장했으면 좋겠다. 자신이 가진 재산, 지혜, 시간 등을 주변에 나눠주는 인생이 참된 승리자의 인생이다."
방은주 기자(ejbang@zd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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