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카페] 샴푸 향으로 추억 속 연인 소환한다
VR 게임, 3D 영화 몰입도 높일 수 있어
향수 대신 전기 자극으로도 후각 전달
향기는 뇌 편도 자극, 감정 담긴 기억 강화
봄이 오면 항상 소환되는 노래가 있다. 장범준은 ‘벚꽃엔딩’에서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라고 노래했다. 누구나 꿈꾸는 봄날의 풍경이지만, 사랑하던 사람이 떠났다. 이제는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의 시간이다. 늘 뒤돌아보지만, 그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뇌에 향기의 추억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 샴푸 향은 옛 사랑을 떠올리게 하고, 구수한 청국장 냄새는 어머니를 그리게 한다. 그렇다면 향기만 제대로 제공하면 가상현실(VR) 속 벚꽃 휘날리는 봄날에 떠난 연인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마스크가 게임 속 향기 구현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홍콩 시티대의 싱게 유(Xinge Yu) 교수와 베이징 항공항처대의 유항 리(Yuhang Li) 교수 연구진은 지난 10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에 “가상현실에서 꽃 향기를 실제로 느낄 수 있는 착용형 후각 발생 장치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VR 기술이 발전하면서 완벽한 가상 세계를 만드는 기술들이 잇따라 개발됐다. 3D(입체) 영상과 소리로 실제 세계를 그대로 구현했으며, 손에 닿는 촉감마저 현실화됐다. 남은 것은 후각이다. 옅은 샴푸 향에 마음이 흔들리듯 후각은 생리적, 심리적 영향이 크지만 다른 감각만큼 구현하기 어려웠다. 게임 장면에 맞춰 향기를 뿜어주는 장치가 있었지만, 부피가 크고 다루기 어려웠다.
이번 연구진은 웨어러벌(wearable·착용형) 후각 발생장치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코 밑에 붙이는 패치형과 얼굴에 쓰는 마스크형 장치다. 5㎝ 길이의 패치형은 2가지 향기를 제공하며, 마스크형은 9가지가 가능하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둘 다 원리는 같다. 작은 칩 안에는 향이 나는 파라핀 왁스층이 있다. 외부 무선 신호를 받으면 칩이 전류를 흘려 왁스층을 섭씨 50도까지 가열해 1.5초 안에 향을 발생시킨다.
연구진은 실험에서 11명에게 파인애플, 생강, 녹차, 캐러멜, 사탕 등 30가지 향기를 맞춤형으로 제공했다고 밝혔다. 참가자들은 93% 정확도로 어떤 향기인지 맞췄다. 착용형 후각 장치를 이용하면 가상현실 게임이나 영화를 더 실감 나게 즐길 수 있다. 연구진이 착용형 장치로 꽃 향기를 제공하자 VR 헤드샛을 쓴 실험 참가자기 가상현실 속 꽃으로 손을 내밀었다. 게임이나 영화 같은 엔터테인먼트뿐 아니라 심리 치료, 교육에도 활용할 수 있다고 연구진은 전망했다.
◇전기 자극으로 후각 회복 가능성도
영화관에서 향기까지 제공하려는 시도는 이전부터 있었다. 1959년 미국에서는 영화관 천장에서 파이프로 향기를 뿜는 장치를 ‘아로마라마(AromaRama)’ 기술이 개발됐으나 장치가 복잡하고 작동이 어려워 실패했다. 1960년에는 비슷한 방식의 ‘스멜 오 비전(Smell-O-Vision)’ 영화관이 나왔으나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2010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스멜 오 비전을 50대 최악의 발명품의 하나로 선정했다.
최근에는 스마트폰 앱(app·응용프로그램)으로 구동되는 향기 발생장치도 나왔다. 업체들은 ‘디지털 향기 스피커’라고 홍보했지만, 향초나 방향제와 다른 바 없다는 혹평을 받았다. 이번 착용형 장치는 복잡한 장치 없이 코에 바로 필요한 향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향수가 필요 없는 본격적인 디지털 후각 발생기도 가능하다. 미국전기전자공학회(IEEE)가 발간하는 스펙트럼지는 지난 2018년 말레이시아 상상공학연구소(Imagineering Institute)의 카순 카루나나야카(Kasun Karunanayaka) 박사 연구진이 전기 자극으로 후각을 제공하는 장치를 개발했다고 전했다.
연구진은 콧구멍 7㎝ 안쪽에 가는 전극을 집어넣고 미세 전류를 흘렸다. 실험 참가자 31명은 과일 향이나 박하 향, 나무 향 등 10가지 다른 향기를 느꼈다고 밝혔다. 전극이 코 안의 후각상피세포에 전류를 전달하자 그곳 신경세포가 자극돼 뇌로 후각 신호를 보낸 것이다.
당시 연구진은 연구가 발전하면 게임이나 영화를 보면서 화면에 맞는 향을 느낄 수 있다고 기대했다. 의료계에서도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 모넬 화학감각연구센터의 조엘 메인랜드(Joel Mainland) 박사는 당시 미국 NBC방송 인터뷰에서 “전기 후각 기술은 질병이나 사고로 후각을 잃은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며 “인공 달팽이관을 귀에 이식해 청각을 복원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최근 향기을 모방하는 방법이 잇따라 개발된 것은 전자코 기술이 발전한 덕분이다. 향기를 모방하려면 일단 향을 내는 분자부터 알아내야 한다. 전자코는 사람이 코로 향기를 맡듯 각종 향기를 유발하는 휘발성 유기화합물(VOC)을 센서로 감지하고 식별하는 장치이다. 센서가 향기 분자에 반응하면 전류가 변해 알 수 있다. 전자코가 식별한 정보대로 향기 분자를 똑같이 만들어 코에 직접 분사하거나, 아니면 해당 분자에 맞는 전류를 흘리면 된다.
국내에서는 실제 코를 모방한 바이오 전자코도 개발됐다. 서울대 박태현 교수와 한국생명공학연구원 권오석 박사는 사람의 후각세포와 전자센서를 결합한 바이오 전자 코를 개발해 사람처럼 바나나와 살구 향을 구분했다. 연구진은 같은 방식으로 육류가 부패할 때 나오는 유해 인자를 실시간으로 감지하는 휴대용 전자 코를 개발해 지난해 국제 학술지 ‘바이오센서스 앤드 바이오일렉트로닉스’에 발표했다.
◇향기가 기억 되살리는 원리도 규명
과학자들이 향기에 매달리는 이유는 후각이 기억과 심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샴푸 향이나 청국장 냄새가 추억을 되살리는 것은 ‘프루스트(Proust) 현상’이라고 한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어느 겨울날 홍차에 마들렌 과자를 적셔 한입 베어 문 순간, 어릴 적 고향에서 숙모가 내어주곤 했던 마들렌의 향기를 떠올렸다. 프루스트의 머리에 펼쳐진 고향의 기억은 1913~1927년 장편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권을 낳았다. 프루스트 현상은 여기서 나왔다.
이스라엘 와이즈만연구소의 야라 예슈런(Yeshurun) 박사는 지난 2009년 국제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향기와 기억 간의 연관 관계를 추적한 실험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16명의 성인에게 사진을 보여주면서 달콤한 배나 눅눅한 곰팡내를 맡게 했다. 90분 뒤엔 같은 사진에 다른 냄새를 맡게 했다. 사람들은 1주일 전 두 번의 실험 중 첫 번째 맡았던 냄새에 노출될 때 사진을 더 잘 기억했다. 이때 뇌에서는 기억을 담당하는 영역인 해마에 불이 켜졌다.
특히 해마는 곰팡내처럼 기분 나쁜 냄새에 더 강한 반응을 보였다. 에슈런 박사는 “뇌는 좋든 싫든 가장 먼저 맡았던 냄새의 기억을 각인한다”며 “나쁜 냄새에 대한 기억이 강한 것은 진화 과정에서 독초나 썩은 음식물, 천적의 나쁜 냄새를 빨리 알아채야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대로 좋은 향기는 기억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 2007년 3월 독일 뤼벡대 얀 본(Born) 박사는 깊은 잠에 들었을 때 장미 향을 맡으면 기억력이 높아진다고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본 박사는 장미 향이 뇌 기억 중추인 해마를 활성화한다고 설명했다.
향기는 단순히 기억뿐 아니라 그 당시 감정까지 불러온다. 향기가 추억이 되는 이유이다. 프루스트 효과의 세계적 전문가인 미 모넬화학감각연구센터 레이철 헤르츠(Rachel Herz) 박사는 향기가 뇌의 감정 영역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헤르츠 박사 실험에서 사람들이 특정 향기를 맡으면서 감정이 들어간 개인적 기억을 떠올리면 뇌에서 감정 중추인 편도가 활발하게 작동했다. 헤르츠 박사는 “향기는 감정이나 향수(鄕愁)와 깊이 연결돼 있다”며 “추수감사절 때 오랜만에 찾은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요리나 거실의 양초에서 나는 향이 없다면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참고자료
Nature Communications(2023), DOI: https://doi.org/10.1038/s41467-023-37678-4
Biosensors and Bioelectronics(2022), DOI: https://doi.org/10.1016/j.bios.2022.114551
Current Biology(2009), DOI: https://doi.org/10.1016/j.cub.2009.09.066
Science(2007), DOI: https://doi.org/10.1126/science.1138581
Psychonomic Bulletin & Review(1996), DOI: https://doi.org/10.3758/BF0321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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