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심 세계화'는 끝…가속화되는 ‘분열된 세계화’ [세계는 핵분열 중]
[스페셜리포트] G2 그리고 T25
“동맹이라는 것은 속국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가 스스로 생각할 권리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 4월 중국 방문 직후 남긴 발언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친분을 한껏 과시한 그가 대만을 둘러싼 미·중 갈등과 관련, ‘독자 노선’을 취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유럽이 미국의 추종자가 돼선 안 된다”는 다소 수위가 센 그의 발언은 미국과 유럽을 발칵 뒤집었다. 오랜 시간 미국의 전통적 우방 국가인 유럽의 강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느 편에도 서지 않겠다’는 것은 미국으로선 뼈아픈 배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미국의 속을 긁는 곳은 프랑스만이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실권자인 무함마브 빈 살만 왕세자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껄끄러운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지난해 에너지 위기 대응을 위해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빈 살만 왕세자를 찾아 원유 증산을 요청했지만 거부했다. 오히려 빈 살만 왕세자는 지난해와 지난 4월 초 두 차례에 걸쳐 OPEC+의 감산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3월에는 중국과 원유 거래에 ‘위안화 결제’를 선언하기도 했다.
미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감산 결정은 지난 50년간의 ‘페트로 달러’ 체제가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며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 안보의 속국이 아니라 국제 정치에서 독립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강국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영국의 경제학자인 앵거스 매디슨은 1995년부터 2005년까지를 ‘세계화의 황금 시기’라고 분류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경제 통계 관련 업무를 오랫동안 지속해 온 그는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장기간에 걸친 경제 성과를 기록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 따르면 ‘세계화의 황금 시기’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을 정도의 ‘평화와 번영’을 누린 시기였다. 미국을 중심으로 경제적인 효율성의 추구가 결합된 ‘세계화’는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패러다임이었다.
이 강력한 패러다임이 깨지고 있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세계화’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미국에 반기를 들 수 있는 국가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이라는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한 지금, 미국의 전통적인 우방이라고 여겨졌던 국가들조차 미국에 등을 돌리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 속에서 자신들의 이익이 명확해질 때까지 어느 한쪽 편에 ‘줄 서기’를 거부하고 있다.
지난 30년간 미국을 중심으로 견고하게 구축돼 있던 ‘세계화’는 이제 정말 종말을 맞고 있는 것일까. ‘탈세계화’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지금, 그동안 전 세계의 정치와 경제 논리를 지배해 왔던 ‘세계화’의 역사를 되짚어 봤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완성, 브레튼우즈와 GATT
세계경제포럼(WEF)은 2019년 ‘세계화의 간략한 역사(A brief history of globalization)’라는 글을 통해 세계화의 의미를 설명했다. WEF에 따르면 세계화는 상품만이 아니라 서비스·기술·투자·사람 정보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이를 통해 경제적인 연결 외에 각 국가의 문화와 인적 교류를 통한 상호 의존도가 높아지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WEF는 이 세계화를 역사적으로 세 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영국의 산업혁명이 기반이 됐던 ‘세계화 1.0’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 2.0’ 그리고 1991년 소련의 해체 이후 ‘팍스 아메키라나’ 체제에 기반한 ‘세계화 3.0’이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지금의 세계화는 ‘패권 국가로서 미국의 역사’와 같이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패권 국가로서 존재감을 명확히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44년 ‘브레튼우즈 협정’부터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만 하더라도 외환 거래의 기본 통화는 ‘금’이었다. 한 국가의 중앙은행이 화폐를 발행하면 반드시 그 가치만큼의 금을 갖고 있어야 했다. 은행에 화폐를 가져가면 은행은 이에 해당하는 액수만큼 금으로 바꿔 줬다. 당시 기축통화 구실을 했던 것은 영국의 파운드화였다.
하지만 ‘금 1온스(31.1g)를 35 미국 달러에 고정’하기로 한 브레튼우즈 협정 이후 영국은 공식적으로 경제 패권을 미국에 넘겨줘야 했다. 다른 나라들은 미 달러에 대해 자국 통화의 교환 비율을 고정했다. 달러 중심의 국제 경제와 무역 체제가 완성됐다.
미국의 안정적인 통화 패권을 구축한 게 ‘브레튼우즈 협정’이었다면 국제 무역에서 미국의 패권을 공고히 한 것은 1947년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이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미국을 비롯한 23개국이 맺은 이 협정은 관세 장벽과 수출입 제한을 제거하고 국제 무역과 물류 교류를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당시 협정의 참가국들은 새로운 국제무역기구(ITO)의 설립을 추진했다. GATT는 ITO가 설립될 때까지 참여국들 간의 국제 무역 규율을 ‘임시’로 성문화한 협정이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기구가 미국 내부 경제에 간섭할 것을 우려한 미국 의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ITO의 출범은 무산됐고 이를 대신해 GATT가 거의 50여 년간 국제 무역 질서를 지배했다. 미국은 국제 무역 질서를 좌지우지하는 파워를 보여줬다.
통화와 무역 시스템에서 패권을 거머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경제는 이후 대호황을 누렸고 국가 간 상품과 서비스의 거래는 더욱 활발해졌다. 미국의 리더십 아래 자동차·비행기·라디오·TV 등 2차 산업혁명의 기술 발전은 전 세계 사람과 정보·자본의 거래를 더욱 촉진했다.
‘세계화 황금 시대’의 상징 WTO, 새로운 라이벌의 등장
GATT 체제 아래에서 새롭게 활짝 열린 자유 무역의 시대에 수혜를 본 것은 미국만은 아니었다. 그중 대표적인 국가가 일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나 다름없던 일본은 1950년부터 1970년 사이 빠른 속도로 경제 발전을 이루며 1968년 일본의 경제 규모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할 정도까지 성장한다.
수출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 경제적인 영향력을 키워 가는 일본에 놀란 미국은 1974년 일본을 향해 ‘슈퍼 301조’ 카드를 꺼내 든다. 강제로 일본의 고정 환율제를 폐지하고 변동 환율제로 바꿔 엔·달러 환율을 달러당 360엔에서 260엔으로 낮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강력한 조치에도 첨단 기술을 등에 업은 일본의 수출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세계 2위 경제 대국’이라는 자신감에 가득 찬 일본은 1985년 엔화를 기축통화로 만들겠다는 의도를 공식화하기에 이른다. 미국은 일본을 제압하기 위해 칼을 빼 들었다. 1985년 ‘플라자 합의’다.
1985년 9월 미국·영국·프랑스 재무장관이 플라자호텔에 모여 일본을 압박할 방안을 마련했다. 일본이 의도적으로 엔화의 화폐 가치를 낮추고 있다고 본 이들은 국제 무역 수지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엔화의 화폐 가치를 평가 절상하기로 했다. 일본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합의문에 서명하지 않으면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돼 무역 보복 등의 제재를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 1주일 만에 일본의 엔화는 달러화 대비 가치가 약 8.3% 올랐다. 그 후에도 엔화는 계속 평가 절상됐고 1995년에는 달러당 100엔 밑으로 하락했다. 이후 일본은 ‘엔고 현상’으로 인해 버블 붕괴 등의 타격을 받아야 했다. ‘잃어버린 30년’의 시작이었다.
반면 미국은 달러 약세를 기반으로 가격 경쟁력이 높아져 수출 시장에서 승승장구했다. 일본과의 경제 패권 전쟁에서 미국은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이다.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평화)’의 정점이 된 것은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의 설립이다. 소련의 붕괴로 경쟁자가 사라진 미국은 자유로운 상품과 자본의 이동을 통한 세계화를 추진했다. WTO는 무역 장벽을 낮추고 회원국 간의 무역을 장려하는 GATT를 이어 받았다. 상품·서비스는 물론 지식재산권까지 아울러 분쟁 해결 등의 문제에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영구적인 기구’가 탄생한 것이다. ‘진정한 세계화’ 시대를 위한 자유 무역 시스템의 토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 160여 개가 넘는 회원국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이들 회원국 간의 교역이 세계 교역의 99%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다자주의 원칙에 기반한 WTO가 자리 잡으면서 양자주의·지역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자유무역협정(FTA)도 더욱 활발해졌다. 국가와 국가 간의 개별적인 직접 협정을 통해 WTO를 보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WTO는 세계화를 가속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역시 2001년 중국의 WTO 가입이다. 중국은 1970년대 덩샤오핑의 등장 이후 개방 경제로의 전환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었고 1990년 후반 즈음에는 전통적인 사회주의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내수 시장을 넘어 세계를 무대로 성장의 과실을 원했던 중국은 1986년 GATT 체제에서부터 세계 시장의 문을 두드려 왔다. 하지만 공산주의 체제에 기반한 중국을 ‘자유로운 무역에 기반한 세계화 시스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중국은 서비스와 투자를 개방하고 관세와 비관세 장벽을 완화하는 등 많은 노력 끝에 2001년 WTO 가입에 성공할 수 있었다.
중국의 WTO 가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것 역시 ‘미국의 입김’이었다.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중국의 WTO 가입을 지지하며 “WTO를 통해 경제적 자유를 도입하면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이 정치적 자유의 길을 따르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리고 공화당 온건파와 연합해 중국을 세계 경제 질서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였다.
여기에서 비극이 싹트기 시작했다. WTO 체제 아래서 세계화의 수혜를 보며 빠르게 성장한 중국은 자신들만의 ‘국가 주도형 경제 발전’ 모델을 구축했다. 사회주의 체제 변화 또한 용납하지 않았다.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2001년 1조3300억 달러에서 2015년 10조8700억 달러로 증가했다.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4.02%에서 14.78%로 높아졌다. 수출입 총액은 2001년 5100억 달러에서 2015년 3조9600억 달러로 약 8배 증가했고 세계 교역량에서 차지하는 비율 또한 4.02%에서 11.89%로 높아져 있었다.
중국을 끌어들여 미국 중심 세계화의 패러다임을 더욱 공고히 하려던 미국의 의도는 오히려 자신들의 패권을 위협할 새로운 라이벌을 탄생시키는 데 일조한 꼴이 됐다.
세계화의 종말?…‘분열된 세계화’에 대한 경고
잘 굴러가는 듯 보였던 ‘미국 중심의 세계화’가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2008년 금융 위기였다. WTO 체제에 기반한 30여 년간의 세계화는 많은 국가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줬지만 그만큼 불평등도 심화됐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불평등의 대가’라는 그의 저서를 통해 “세계화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지금의 세계화는 부를 집중시키고 노동자들과 소비자들을 착취하고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시장은 도덕성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각국 정부가 이를 관리해야 하지만 이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지금의 세계화는 ‘불평등’하고 ‘불공정’하게 됐다. 상위 계층은 부와 권력을 되물림하지만 세계화로 인해 손해를 보는 패자는 대부분 중하위 계층이다. 세계화가 지금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관리’되지 않으면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는 경고였다.
이 세계화로 인해 피해를 본 소위 선진국의 중산층들의 반발이 커져 갔고 이를 등에 업은 포퓰리스트들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은 ‘세계화에 대한 반발 심리’를 불쏘시개 삼아 나타난 현상들이었다.
패권 국가로서 중국의 야심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2013년 시작된 ‘일대일로(一帶一路·One Belt One Road)’ 사업은 육상과 해상을 묶는 새로운 ‘실크로드 경제권’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육로와 동남아시아·서남아시아·아프리카·유럽으로 이어지는 해로를 하나의 커다란 경제 벨트로 묶겠다는 구상이다.
발톱을 숨기지 않는 중국의 야심에 미국은 2018년 중국과 본격적인 무역 전쟁에 돌입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중국 제품에 고율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행정 명령에 서명한 뒤 중국 또한 미국에 보복 관세를 매기는 등 치열한 관세 전쟁이 벌어졌다. 이는 머지않아 통화 전쟁에 이어 기술 전쟁으로 확전되기 시작했다.
2019년 타결된 역내포괄경제적동반자협정(RECP)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커지는 중국의 영향력을 여실히 보여줬다. 아세안 10개국과 한국·중국·일본·호주·뉴질랜드 등 총 15개국이 참여한 이 협정은 인구 23억 명의 전 세계 약 30%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 FTA다. 미국은 2020년 10월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를 제안하며 맞불을 놓았다. 미국은 ‘경제 협력체’의 성격이 짙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결국 중국을 첨단 기술과 부품 공급망에서 배제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분석이다.
미국과 중국을 둘러싼 패권 전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3년여간의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과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은 세계를 갈갈이 찢어 놓았다. 전 세계 공급망은 붕괴됐고 심화되는 에너지 위기 속에서 석유와 같은 자원은 강력한 무기가 됐다.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에 서방 국가들은 강력한 경제·금융 제재를 가했지만 이는 러시아를 무너뜨리기보다 오히려 러시아의 오일 수출이 ‘중국’과 ‘인도’라는 새로운 방향을 찾는 계기가 됐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달러 패권’의 위협도 한층 거세지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 국가들이 중국과 원유·천연가스(LNG)를 거래하는 데 ‘달러’ 대신 ‘위안화’로 대금을 결제하기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중남미 국가인 브라질은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 거래하는 데 ‘달러’ 대신 ‘위안화’를 사용하기로 최근 합의했다.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신흥국들 대부분도 중국과 아시아판 국제통화기금(IMF) 창설을 논의하는 등 ‘달러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위안화의 힘을 키우는 것을 선택하고 있다.
국제 미디어 조직인 프로젝트 신디케이트는 지난 3월 ‘분열된 세계화(Fragmented Globalization)’라는 칼럼을 통해 “세계 경제는 지금 매우 빠른 속도로 블록화되고 있고 몇몇 국가들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명확한 태도를 밝히지 않고 줄타기에 나서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전 세계의 인플레이션은 더욱 심화할 것이고 세계 경제의 성장 잠재력 또한 현저히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다. 이 칼럼은 “이미 극도로 연결돼 있는 전 세계 국가들은 앞으로도 완전히 ‘탈세계화(deglobalization)’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이것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분열된 세계화’에 대한 우려를 낮춰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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