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논단] 설탕인형과 2주 진단 그리고 주체성의 포기에 관하여
러시아 대통령 푸틴이 우리 현충일에 해당하는 날 무명용사 묘를 참배할 때 일이다. 푸틴이 헌화할 순서에 갑작스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늘던 빗줄기는 폭우로 변했고, 일대 혼란이 빚어졌다. 보좌관은 급히 커다란 우산을 씌웠는데, 푸틴은 당장 우산을 치우라고 호통쳤다. 그는 단호히 말했다. "나는 설탕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소." 푸틴은 중단 없이 헌화하며 우산 없이 폭우를 맞았다. 대중 정치인이 보여준 쇼맨십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조국에 목숨 바친 이들 앞에서 일국의 대통령이 겨우 비에 젖는 것을 겁낼 수 없음을 잘 보여준 것이라 칭송하기도 한다. 저의가 무엇이었건, 사람이 고작 빗줄기에 설탕처럼 녹아내릴 만큼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런데 내 재판사건에서 설탕인형보다 연약한 사람들을 쉽게 만난다. 예컨대, '어깨빵' 같은 사소한 일이 주먹다짐으로 번진 사건에서 양쪽 모두 재판에 부쳐지는데, 여기에는 대부분 '2주 진단서'가 붙어 있다.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폭행했고, 나는 오로지 피해자이다"라며 양측은 경쟁적으로 '2주 진단서'를 낸 것이다. 많은 경우 거기에는 겉으로는 상처가 확인되지도 않는 좌상(挫傷) 혹은 염좌(捻挫) 등의 병명이 붙어 있다. 그러면 양쪽 모두 폭행죄가 아니라 상해죄로 재판에 부쳐진다. 그리고 잘 아시다시피 대부분 이른바 '쌍방'으로 양쪽 모두 벌금이건 징역이건 유죄판결을 받는다. 이럴 때 보면, 우리 인간은 설탕보다 더 녹아내리기 쉬운 재료로 빚어진, 그야말로 춘삼월 봄바람에도 산산이 흩어질 부토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솟구친다.
이런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기소된 대로 폭행죄가 아니라 상해죄를 적용해 판결을 한다. 다만 선고되는 형은 사실상 폭행죄에 대한 것과 다르지 않다. 폭행죄는 2년 이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 벌금이지만, 상해죄는 7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 벌금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어서, 천양지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무상 상해죄 하한으로 수렴해 마침내 폭행죄 영역으로 들어가 버리는 왜곡 혹은 법기술(?)이 펼쳐진다. 이것은, 겉으로는 진단서를 믿는 듯해도 실제로는 이를 버렸다는 말이다. 비전문가인 법관이 의학전문가의 소견을 무시하기는 쉽지 않은 것임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데, 이는 기본적으로 그 사건의 실체가 상해사건이 아니라 폭행사건으로 평가될 경우에 벌어진다. 여기에다가 진단서 자체로도 그것의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우면, 예를 들어 X선촬영과 같은 기본적이고 간단한 검사도 없이 그저 환자의 주장 혹은 억지와 고집(?) 때문에 억지춘향으로 발행된 진단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 판사는 의사의 상해진단서를 무시하고 폭행사건이라고 평가해 형을 정하게 된다.
굳이 상해를 입었다며 진단서를 낸 것은 상대방의 악성(惡性)을 부각시켜 중한 처벌을 받게 하고자 하는 것일 터인데, 이런 원리로 형량이 결정되고, 상해죄로 벌금 200만 원을 내건 폭행죄로 그 벌금을 내건 실제로 차이가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이고 보면, 결국 적지 않은 돈을 들여 무리하게 받아 온 '2주 진단서'는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반면 폭행사건이 상해사건으로 바뀌면 매우 중요한 변화가 생긴다. 반의사불벌죄인 폭행사건에서는 피해자가 상대방을 용서하면 판사라도 더 이상 문제를 삼을 수 없다. 그러나 상해사건에서는 쌍방이 화해를 하고 서로 처벌을 원치 않아도 여전히 처벌을 받는다. 내 사건이지만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게 되는 것이다. 그저 '지엄하시고 고명하신 판사'에게 나와 상대방의 운명을 맡겨 '관대한 처결'을 간구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서 결코 버리지 말아야 할 '주체성'을 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결과에서도 별 차이가 없을 수 있는데, 억지로 돈과 시간을 들여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서로를 '상해범'으로 몰아세우느니, 서로 당당하게 '폭행범'임을 시인하되 대신 합의와 화해로 상호 간 전과자 전락을 피하는 길을 모색하심이 어떠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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