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환의 중국은, 왜] #103. '메이지유신의 산실' 조슈와 조선의 제로썸 운명
정용환 기자 2023. 5. 15. 07:00
조선침탈의 본진
'조슈번' 답사기
규슈(九州)와 혼슈(本州). 그리고 일본 열도(列島)를 이루는 4개의 큰 섬 가운데 가장 작은 시코쿠(四國) 사이의 바닷길은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라고 합니다. 물길이 잔잔해 예부터 교통과 물류(物流)의 간선도로 역할을 해왔습니다.
세토나이카이의 입구에 자리 잡은 도시, 시모노세키(下關)입니다.
19세기 중반 미국 페리 제독에 의한 개국과 개항의 격동기 전까지 외부 세계와 일본을 연결하던 관문이었습니다.
세토나이카이를 이용해 오사카(大阪)에 상륙했던 조선통신사들도 부산에서 출발해 시모노세키를 경유했습니다.
이제는 규슈의 후쿠오카현과 혼슈의 시모노세키 사이를 흐르는 폭 650m의 간몬 해협(關門海峽) 위를 간몬대교가 이어주고 있어 항공편으로 후쿠오카 공항을 통해 시모노세키에 닿을 수 있습니다.
지난주 간몬대교를 건너 시모노세키와 야마구치(혼슈 남서쪽)현, 그리고 하기시 일대를 돌아봤습니다. (※시모노세키는 아베 전 총리의 중의원 지역구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관문이자 물류의 허브를 끼고 있던 이 지역은 과거 조슈(長州)번으로 불리던 곳입니다. 과거 도막(倒幕ㆍ막부타도)과 유신의 거점이었습니다.
조슈라는 역사적 지명은 들을 때마다 구한말 우리의 역사를 반추할 수 밖에 없고 그럴 때마다 밀려오는 회한을 면키 어려운 정말 특수한 곳입니다.
일본을 근대화로 이끈 메이지유신의 초석을 놓았고, 유신 성공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수많은 인사들이 쏟아져 나왔던 조슈번.
봉건 시대와 쇄국 정책이 뒤집히는 패러다임 전환기. 격동의 조짐을 예리하게 읽어내고 거친 물살에 올라탄 결단의 씨앗이 조슈번에서 뿌려졌고 발아했으며 메이지유신과 근대화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메이지유신은 봉건체제였던 일본을 제국주의체제로 바꾼 구조적 변혁이었습니다. 반면 정한론(征韓論)과 식민통치라는 긴 터널의 입구였습니다.
260개 번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조슈가 막부와 일대일로 내전을 벌이고 막부체제를 뒤집어 메이지유신을 거머쥐었던 성공 스토리는 우리의 치욕과 통한의 역사와 포개집니다. 정말 동전의 양면 같았고 제로썸 관계였던 조슈번과 조선의 운명이었습니다.
일개 번의 성공이 어떻게 조선 합병과 식민통치 전체를 아우를 수 있었을까요. 어떤 인과관계가 저변에 흐르고 있는 걸까요.
첫째, 인물들입니다.
둘째, 특수한 이념과 사상으로 무장한 타협불가의 신념체계입니다.
청일전쟁 후 경복궁에 난입해 '국모'시해사건에 관여한 전현직 조선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와 미우라 고로,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초대 조선 통감)을 비롯해 2대(소네 아라스케)와 3대(데라우치 마사다케) 조선 통감이 모두 조슈번 출신입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합병 이후 초대 총독(데라우치 마사다케)과 2대 총독(하세가와 요시미치)도 조슈번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가쓰라-테프트 밀약의 주인공 가쓰라 다로도 조슈번 하기(萩) 출신입니다. 세 차례 총리를 역임하면서 조선합병을 진두 지휘했습니다.
어떻게 한 세대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유독 조선 침탈의 주역들이 특정 지역에서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올 수 있었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슈에 대체불가의 인적 맥락과 이를 묶어주는 연결고리가 존재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
신분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덕에 풍부한 인재풀을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혈기 왕성하고 감수성 예민한 10대들이 몰려왔습니다. 이곳에서 시대를 규정하고 변혁의 비전을 품은 쇼인의 제자들은 격변의 물살을 향해 몸을 던졌습니다.
그중 가장 탁월했던 인물이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ㆍ1839~1867)였습니다. 쇼인이 뿌리였다면 수많은 가지들이 뻗어나갔던 줄기가 신사쿠였습니다. 야마구치(山口)현 하기(萩) 출신입니다. 신사쿠의 28년 생애는 파란과 반전이 씨줄과 날줄로 직조된 풍운(風雲) 그 자체였습니다.
의기양양했던 조슈번이 서양함들을 선제 공격하며 기세를 올렸던 1863년 시모노세키 포격. 서양 함대의 위력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저지른 무모한 도발이었습니다. 이듬해 막강한 서양 함포의 반격을 받고 시모노세키 포대가 쑥대밭이 된 뒤 열린 강화협상. 괴멸적 타격을 입은 조슈번을 대표해 신사쿠가 협상에 나섭니다.
영국 쪽 협상 대표 쿠퍼 제독은 배상금 대신 간몬 해협의 입구에 있는 섬 히코시마를 달라고 합니다. 아편전쟁 후 난징조약 때 할양받은 홍콩처럼 말입니다.
먼저 도발하고 쑥대밭이 됐으니 조슈로선 영국이 강하게 나오면 버틸 재간이 없던 상황입니다. 당시 신사쿠가 했던 발언 요약입니다.
" 나는 항복하러 온 게 아니다. 포대가 파괴되고 포를 빼앗겼다고 전쟁에 진 게 아니다. 우리에겐 수 만 명의 사무라이가 있다. 영국은 3000명의 상륙 전력이 있다. 그 정도 전력으로 우리를 제압할 수 없다. "
전황을 꿰뚫어보고 상대를 압박하는 신사쿠의 패기에 쿠퍼 제독도 '제2의 홍콩' 욕심을 접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신사쿠에 매료됐던 당시 통역이 이토 히로부미였습니다. 신사쿠는 막부와 조슈의 1차 조슈토벌전쟁으로 조슈의 지도부가 친막부 성향으로 바뀌자 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이 쿠데타는 '공산사(功山寺) 거병' 으로 불립니다. 평민·천민들과 사무라이가 뒤섞인 민병대 성격의 기병대(奇兵隊) 80여명이 그가 동원한 병력 전부였습니다. 번의 정부군 1000명을 상대하기엔 중과부적이었습니다.
패기 넘치는 신사쿠는 병력 셈법을 뒤집어 대담한 기습을 감행했습니다. 확실한 목표와 죽을 자리를 알고 목숨을 거는 사무라이의 강심장을 정부군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대역전이 일어났습니다. 조슈번은 다시 반막부 노선에 섰습니다.
토벌에 나선 막부. 신사쿠는 2차 조슈전쟁에서 해군을 지휘하며 막부군을 패퇴시켰습니다. 이 전쟁의 연쇄 작용으로 막부는 몰락했습니다. 결과는 메이지유신이었습니다.
2차 조슈전쟁의 중핵 역할을 한 인물들이 이토와 미우라 고로(시해사건 때 조선공사), 그리고 징병제를 도입해 일본 군국주의 시스템의 백본 역할을 한 야마가타 아리토모(제국육군원수ㆍ내각총리 2회 역임)였습니다. 모두 조슈 출신입니다.
요시다 쇼인과 다카스키 신사쿠라는 양대 인맥에서 뻗어나간 가지들이었습니다.
패러다임이 바뀌는 역사의 변곡점이 있습니다. 역사는 늘 언제나 똑같이 반복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패러다임 전환 때 발견되는 패턴이 있습니다.
19세기는 기술문명의 대도약기였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기술적 진보가 꽃을 피웠습니다.
15세기말 대항해시대의 개막으로 동양의 정신ㆍ물질문명의 우세가 서구로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패러다임 대전환의 물꼬가 트이고 300여년만에 서구 우세가 명확해졌습니다.
시대의 잠재력이 팽창하고 그렇게 역동적이었던 변화의 시대에, 그 흐름에 올라탔던 국가ㆍ민족공동체는 근대국가로 올라섰고 그 반대는 치욕의 나락을 헤맸습니다.
평지에서 보면 단면만 보이지만 고지에서 보면 입체적으로 조망적 시점을 거머쥘 수 있습니다.
일본은 문명의 우열이 엇갈리는 시점을 포착했고 봉건 시스템을 뒤집어 새 시대의 물살에 올라탈 수 있는 체질로 국가 시스템을 바꿨습니다. 내전이 벌어졌고 혼돈의 강을 건넜습니다. 기민하게 포착한 변혁의 기세를 안으로 끌어들여 기술과 과학의 토대를 구축했고 이를 기반으로 제국주의 강국으로 올라섰지만 너무 나가 '지옥맛'을 보기도 했습니다.
소련 공산주의 본진의 붕괴로 냉전이 해체되고 40년 중국의 도광양회 탐색전이 끝났습니다. 신냉전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패러다임 전환이 시작된 겁니다.
일본의 패망으로 갑자기 찾아온 해방과 소련ㆍ중국ㆍ북한 조합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 그리고 70년의 산업화ㆍ민주화의 절치부심 끝에 맞은 패러다임 전환기입니다. 이번 주 열리는 일본 히로시마 G7 회의는 이제 '근대화 지각생'의 지평선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다시 돌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의 패턴은 반복될 텐데, 시대가 결단을 요구할 때 우리는 메이지유신을 이끈 '젊은 그들'처럼 시대의 흐름을 꿰뚫는 통찰을 보여줄 수 있을지, 다다미 8장짜리 초라한 시골 학숙이 분화구가 되어 마그마 같은 인재들을 폭발적으로 쏟아냈듯이 우리도 그런 인재풀을 준비하고 있는지, 패기 있는 리더십으로 공동체를 단합시켜 패러다임 전환의 안갯속으로 이끌고 나갈 수 있을 것인지...
비 내리는 하기의 사적지들 앞에서 흔쾌히 답할 수 없는 이런 질문이 꼬리를 물고 머리 속을 맴돌았습니다. 다음 칼럼에서 이어가겠습니다.
'조슈번' 답사기
세토나이카이의 입구에 자리 잡은 도시, 시모노세키(下關)입니다.
19세기 중반 미국 페리 제독에 의한 개국과 개항의 격동기 전까지 외부 세계와 일본을 연결하던 관문이었습니다.
이제는 규슈의 후쿠오카현과 혼슈의 시모노세키 사이를 흐르는 폭 650m의 간몬 해협(關門海峽) 위를 간몬대교가 이어주고 있어 항공편으로 후쿠오카 공항을 통해 시모노세키에 닿을 수 있습니다.
지난주 간몬대교를 건너 시모노세키와 야마구치(혼슈 남서쪽)현, 그리고 하기시 일대를 돌아봤습니다. (※시모노세키는 아베 전 총리의 중의원 지역구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관문이자 물류의 허브를 끼고 있던 이 지역은 과거 조슈(長州)번으로 불리던 곳입니다. 과거 도막(倒幕ㆍ막부타도)과 유신의 거점이었습니다.
조슈라는 역사적 지명은 들을 때마다 구한말 우리의 역사를 반추할 수 밖에 없고 그럴 때마다 밀려오는 회한을 면키 어려운 정말 특수한 곳입니다.
봉건 시대와 쇄국 정책이 뒤집히는 패러다임 전환기. 격동의 조짐을 예리하게 읽어내고 거친 물살에 올라탄 결단의 씨앗이 조슈번에서 뿌려졌고 발아했으며 메이지유신과 근대화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메이지유신은 봉건체제였던 일본을 제국주의체제로 바꾼 구조적 변혁이었습니다. 반면 정한론(征韓論)과 식민통치라는 긴 터널의 입구였습니다.
일개 번의 성공이 어떻게 조선 합병과 식민통치 전체를 아우를 수 있었을까요. 어떤 인과관계가 저변에 흐르고 있는 걸까요.
첫째, 인물들입니다.
둘째, 특수한 이념과 사상으로 무장한 타협불가의 신념체계입니다.
청일전쟁 후 경복궁에 난입해 '국모'시해사건에 관여한 전현직 조선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와 미우라 고로,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초대 조선 통감)을 비롯해 2대(소네 아라스케)와 3대(데라우치 마사다케) 조선 통감이 모두 조슈번 출신입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합병 이후 초대 총독(데라우치 마사다케)과 2대 총독(하세가와 요시미치)도 조슈번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가쓰라-테프트 밀약의 주인공 가쓰라 다로도 조슈번 하기(萩) 출신입니다. 세 차례 총리를 역임하면서 조선합병을 진두 지휘했습니다.
어떻게 한 세대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유독 조선 침탈의 주역들이 특정 지역에서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올 수 있었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슈에 대체불가의 인적 맥락과 이를 묶어주는 연결고리가 존재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요시다 쇼인을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
조슈번 북쪽의 작은 마을, 하기(萩)시에 자리 잡은 요시다 쇼인의 학숙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지난주 비 오는 주말 오후 이곳을 찾았습니다. 쇼카손주쿠는 일본 정부에 의해 성지화한 쇼인 신사 경내에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가뜩이나 심사가 복잡한 곳인데 비까지 굵게 내렸습니다. 빗발 치던 외세에 정신 없던 구한말, 답 없이 표류하던 조선. 회한에 젖어 말문이 닫히고 말았는데, 신발 바닥이 흥건하게 비에 젖어 감정도 곤두박질쳤습니다. 신발 때문인지 장소의 유별난 정체성 때문인지 지금 와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곳에서 쇼인은 역성혁명ㆍ막부타도ㆍ개국ㆍ조선정벌의 이념과 시대의 아젠다를 제자들에게 심어줬습니다.
쇼카손주쿠는 신분과 계급을 따지지 않고 학생들을 받았습니다. 사무라이 계급사회에서 초유의 파격이었습니다. 이 학숙은 쇼인의 참수로 13개월(1857년 11월∼1858년 12월)만에 문을 닫았지만 영향은 지대했습니다.
조슈번 북쪽의 작은 마을, 하기(萩)시에 자리 잡은 요시다 쇼인의 학숙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지난주 비 오는 주말 오후 이곳을 찾았습니다. 쇼카손주쿠는 일본 정부에 의해 성지화한 쇼인 신사 경내에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가뜩이나 심사가 복잡한 곳인데 비까지 굵게 내렸습니다. 빗발 치던 외세에 정신 없던 구한말, 답 없이 표류하던 조선. 회한에 젖어 말문이 닫히고 말았는데, 신발 바닥이 흥건하게 비에 젖어 감정도 곤두박질쳤습니다. 신발 때문인지 장소의 유별난 정체성 때문인지 지금 와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곳에서 쇼인은 역성혁명ㆍ막부타도ㆍ개국ㆍ조선정벌의 이념과 시대의 아젠다를 제자들에게 심어줬습니다.
쇼카손주쿠는 신분과 계급을 따지지 않고 학생들을 받았습니다. 사무라이 계급사회에서 초유의 파격이었습니다. 이 학숙은 쇼인의 참수로 13개월(1857년 11월∼1858년 12월)만에 문을 닫았지만 영향은 지대했습니다.
혈기 왕성하고 감수성 예민한 10대들이 몰려왔습니다. 이곳에서 시대를 규정하고 변혁의 비전을 품은 쇼인의 제자들은 격변의 물살을 향해 몸을 던졌습니다.
그중 가장 탁월했던 인물이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ㆍ1839~1867)였습니다. 쇼인이 뿌리였다면 수많은 가지들이 뻗어나갔던 줄기가 신사쿠였습니다. 야마구치(山口)현 하기(萩) 출신입니다. 신사쿠의 28년 생애는 파란과 반전이 씨줄과 날줄로 직조된 풍운(風雲) 그 자체였습니다.
영국 쪽 협상 대표 쿠퍼 제독은 배상금 대신 간몬 해협의 입구에 있는 섬 히코시마를 달라고 합니다. 아편전쟁 후 난징조약 때 할양받은 홍콩처럼 말입니다.
" 나는 항복하러 온 게 아니다. 포대가 파괴되고 포를 빼앗겼다고 전쟁에 진 게 아니다. 우리에겐 수 만 명의 사무라이가 있다. 영국은 3000명의 상륙 전력이 있다. 그 정도 전력으로 우리를 제압할 수 없다. "
전황을 꿰뚫어보고 상대를 압박하는 신사쿠의 패기에 쿠퍼 제독도 '제2의 홍콩' 욕심을 접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신사쿠에 매료됐던 당시 통역이 이토 히로부미였습니다. 신사쿠는 막부와 조슈의 1차 조슈토벌전쟁으로 조슈의 지도부가 친막부 성향으로 바뀌자 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이 쿠데타는 '공산사(功山寺) 거병' 으로 불립니다. 평민·천민들과 사무라이가 뒤섞인 민병대 성격의 기병대(奇兵隊) 80여명이 그가 동원한 병력 전부였습니다. 번의 정부군 1000명을 상대하기엔 중과부적이었습니다.
2차 조슈전쟁의 중핵 역할을 한 인물들이 이토와 미우라 고로(시해사건 때 조선공사), 그리고 징병제를 도입해 일본 군국주의 시스템의 백본 역할을 한 야마가타 아리토모(제국육군원수ㆍ내각총리 2회 역임)였습니다. 모두 조슈 출신입니다.
요시다 쇼인과 다카스키 신사쿠라는 양대 인맥에서 뻗어나간 가지들이었습니다.
패러다임이 바뀌는 역사의 변곡점이 있습니다. 역사는 늘 언제나 똑같이 반복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패러다임 전환 때 발견되는 패턴이 있습니다.
19세기는 기술문명의 대도약기였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기술적 진보가 꽃을 피웠습니다.
15세기말 대항해시대의 개막으로 동양의 정신ㆍ물질문명의 우세가 서구로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패러다임 대전환의 물꼬가 트이고 300여년만에 서구 우세가 명확해졌습니다.
평지에서 보면 단면만 보이지만 고지에서 보면 입체적으로 조망적 시점을 거머쥘 수 있습니다.
일본은 문명의 우열이 엇갈리는 시점을 포착했고 봉건 시스템을 뒤집어 새 시대의 물살에 올라탈 수 있는 체질로 국가 시스템을 바꿨습니다. 내전이 벌어졌고 혼돈의 강을 건넜습니다. 기민하게 포착한 변혁의 기세를 안으로 끌어들여 기술과 과학의 토대를 구축했고 이를 기반으로 제국주의 강국으로 올라섰지만 너무 나가 '지옥맛'을 보기도 했습니다.
소련 공산주의 본진의 붕괴로 냉전이 해체되고 40년 중국의 도광양회 탐색전이 끝났습니다. 신냉전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패러다임 전환이 시작된 겁니다.
일본의 패망으로 갑자기 찾아온 해방과 소련ㆍ중국ㆍ북한 조합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 그리고 70년의 산업화ㆍ민주화의 절치부심 끝에 맞은 패러다임 전환기입니다. 이번 주 열리는 일본 히로시마 G7 회의는 이제 '근대화 지각생'의 지평선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다시 돌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의 패턴은 반복될 텐데, 시대가 결단을 요구할 때 우리는 메이지유신을 이끈 '젊은 그들'처럼 시대의 흐름을 꿰뚫는 통찰을 보여줄 수 있을지, 다다미 8장짜리 초라한 시골 학숙이 분화구가 되어 마그마 같은 인재들을 폭발적으로 쏟아냈듯이 우리도 그런 인재풀을 준비하고 있는지, 패기 있는 리더십으로 공동체를 단합시켜 패러다임 전환의 안갯속으로 이끌고 나갈 수 있을 것인지...
비 내리는 하기의 사적지들 앞에서 흔쾌히 답할 수 없는 이런 질문이 꼬리를 물고 머리 속을 맴돌았습니다. 다음 칼럼에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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