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차이나 트렌드] 아모레도 LG생건도 중국서 ‘비매품’ 딱지 붙은 화장품 샘플 판다…어쩌다?
‘증정품’ 샘플 돈 받고 팔면 한국선 불법
중국선 ‘샘플 경제’ 대인기…쌓아 놓고 판다
‘비매품’ 샘플 출처·유통 경로는 불투명
이달 5일 중국 뷰티 편집숍 화메이(話梅 HARMAY)의 베이징 싼리툰 지점. 화메이는 400개(2022년 1월 기준)가 넘는 외국 화장품 브랜드의 제품을 1만 종 이상 판매하는 중국 창고형 뷰티 소매 기업이다. 한국으로 치면 CJ올리브영, 프랑스로 치면 세포라(Sephora)쯤 된다. 이제는 대부분 마스크를 벗은 젊은 여성들이 1층과 2층 매장에서 스킨케어·메이크업·향수·헤어케어 등 온갖 뷰티 제품을 탐색하고 있었다.
가장 인기가 많은 코너는 화장품 샘플을 모아 놓은 곳. 컨베이어 벨트처럼 생긴 기다란 선반에 놓인 회색 바구니 안에 각종 브랜드의 샘플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한국 아모레퍼시픽 설화수의 세안제 ‘젠틀 클렌징 폼’ 50㎖ 샘플 패키지엔 ‘[증정용] Not For Sale’이라고 적혀 있다. 판매용이 아니란 뜻이다. 샘플 제품 패키지 위에 붙어 있는 중국어 라벨엔 아모레퍼시픽의 경기도 오산시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이란 표기가 붙었다. 증정용 샘플은 한국에선 판매가 금지된 비매품이다. 한국 화장품법은 2012년부터 증정용 혹은 비매품이라 기재된 샘플 화장품을 개별적으로 판매할 수 없게 했다. 한국에선 정품 화장품을 사야 샘플 화장품을 사은품처럼 주는데, 이런 화장품 샘플은 판매 불가 품목이기 때문에 중고 거래 역시 불법이다.
그러나 중국에선 ‘촉소품(판촉품)’이라 표기된 화장품 샘플이 가격표를 달고 버젓이 하나의 상품으로 판매된다. 설화수 ‘젠틀 클렌징 폼’은 한국에선 순행클렌징폼이란 이름으로 판매되는 제품이다. 설화수 공식 웹사이트에서 순행클렌징폼 200㎖ 본품 가격은 4만2000원. 중국 화메이에선 4분의 1 용량인 50㎖ 샘플이 39위안(약 7400원)에 판매되고 있다. 중국어 라벨엔 중국 국내 배급사가 상하이시에 등록된 아모레퍼시픽무역유한공사라 표기돼 있다. 한국에서 증정용 비매품으로 생산된 제품이 어떻게 중국에서 정식 판매되고 있는지는 판매사 측도, 제조사 측도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NOT FOR SALE(비매품)’이라 적힌 설화수 ‘에센셜 퍼밍 크림(탄력크림)’ 15㎖ 샘플은 67위안(약 1만2800원)에 판매되고 있다. 겉포장도 없는 설화수 자음수 30㎖ 비매품은 38위안에 판매됐다. 아모레퍼시픽 산하 또 다른 브랜드 라네즈의 ‘워터 슬리핑 마스크’ 15㎖ 샘플 8개 세트는 96위안에 판매된다. 한 개에 12위안(약 2300원)꼴이다.
LG생활건강의 뷰티 브랜드 더히스토리오브후 제품도 다수 샘플로 팔리고 있다. ‘비첩 퍼스트 모이스처 안티 에이징 에센스(순환 에센스)’ 90㎖ 정품은 한국에서 3만 원대에 팔리고 있는데, 화메이에선 비매품이라 적힌 15㎖ 샘플을 48위안(약 9200원)에 살 수 있다. ‘후 공진향 페이셜 폼 클렌저’는 40㎖ 샘플을 개당 15위안(약 2800원)에 살 수 있다. 화메이 매장에서 에스티로더의 ‘리-뉴트리브 크림’ 5㎖ 샘플과 후 폼 클렌저 샘플을 함께 구매한 20대 중국인 여성은 “출장을 자주 다녀 화메이에서 소포장품을 자주 산다”며 “여러 브랜드 제품을 부담 없이 써 볼 수 있기 때문에 샘플 제품을 좋아한다”고 했다.
중국 젊은 여성층 사이에 화장품 샘플 인기는 엄청나다. 워낙 인기가 많아 샘플 경제(小樣經濟)란 말까지 생겨났다. 최근 몇 년간 중국에선 미장집합점(美妝集合店)이라 불리는 멀티 브랜드 뷰티 전문점이 샘플 화장품을 킬러 콘텐츠로 내세워 급성장했다. 대표적인 곳이 화메이다.
◇ 오프라인 매장이 뜨는 이유…예쁘게, 무심하게
화메이는 2008년 알리바바그룹 산하 온라인 쇼핑몰 타오바오에서 화장품을 팔며 사업을 시작했다. 첫 오프라인 매장을 낸 건 2017년 상하이에서였다. 짧은 영상 위주의 소셜미디어가 주류가 되며 색조 화장법 영상이 큰 인기를 끌 때였다. 사진과 텍스트로 화장품을 광고하던 시절보다 메이크업을 따라하기가 훨씬 쉬워졌다. 색조 화장품 구매 연령층은 10대로 확 낮아졌다. 이들은 온라인에서 몇 위안 더 싸게 사는 것보다 매장에 들어가서 여러 제품을 한 눈에 보고 당장 만져 보고 써 보는 것을 더 선호한다.
공간이 예쁘면 금상첨화다. 화메이는 매장 하나하나의 인테리어 디자인에 특히 신경을 썼다. 와서 인증샷을 찍고 샤오훙수나 더우인에 올리고 싶게끔 공간을 디자인했다. 2019년 9월 베이징 싼리툰에 연 매장은 화메이를 힙 플레이스로 만들어 놨다. 싼리툰 매장은 쇼핑몰 안이 아닌 1~2층 단독 공간에 거친 질감의 콘크리트 벽, 나선형 계단, 철제 진열대 등 요소를 넣어 공업형 미니멀리즘 스타일로 꾸몄다. 금방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소문났다. 소비자를 바깥에 줄 세워서 기다리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화메이는 스스로를 창고형 매장이라고 소개한다. 창업자인 왕쥔차오(王俊超) 화메이 최고경영자는 “온라인으로 화장품을 팔 때 직원들이 물류 창고에서 매일 계단을 오르내리며 분류·정리·포장 등 작업을 했다”며 “이런 창고 문화를 오프라인으로 가져왔다”고 했다. 샘플이나 미니 용량 제품은 스킨케어든 헤어케어든 상관없이 한데 모아두고, 정품 용량 제품은 브랜드별로가 아니라 카테고리별로 제품을 진열한다. 토너·로션 코너엔 라프레리·샤넬·HR·SK-II처럼 가격대가 높은 브랜드부터 키엘·오리진스·아벤느·프리플러스 같은 중·저가 브랜드가 가격대 구분 없이 정리돼 있다. 하얀 장갑을 끼고 제품을 분류하던 매장 직원은 “심리적 장벽을 낮추며 소비자가 다양한 브랜드를 접하게 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화메이엔 손님을 따라다니며 묻지도 않은 제품 설명을 하거나 눈치를 주는 직원이 없다. 한국에선 이런 방치형 매장이 흔하지만 중국은 상황이 다르다.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따라붙어 간섭하고 위아래로 훑으며 구매를 압박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요즘 MZ 세대 소비자에겐 통하지 않는 방식이다. 화메이에선 소비자가 점원의 시선이나 눈초리를 신경 쓸 일이 없다. 이미 요즘 소비자는 온라인에서 제품 정보를 모두 파악한 상태다. 화메이 매장 방문 후기엔 “조용하게 볼 거 보고 살 거 사고 나오는 분위기”처럼 쇼핑 과정 자체를 언급하는 내용이 많다. 반면 화메이 경쟁사인 제모(芥麽 JIEMO) 매장에 들렀던 한 방문자는 “종업원이 계속 노려보고 들러붙어 불편했다”는 후기를 남겼다.
◇ 한국선 불법, 중국선 ‘샘플 경제’ 탄생
처음 화메이 매장에 갔을 때 여기가 소위 짝퉁 화장품을 파는 곳인가 하고 헷갈렸던 기억이 있다. 정품이라면 우리 돈 수십만 원에 판매되는 고가 브랜드의 샘플이 패키지도 없이 용기에 ‘비매품’ ‘샘플’ 딱지를 덕지덕지 붙인 채 한데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한쪽엔 수십만 원짜리 그 제품들이 선반에 가지런히 정렬돼 있었다. 매장을 찾은 소비자들은 샘플의 출처나 안전성 여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어느덧 ‘보물찾기’에 열중한다.
소비자가 샘플 화장품에 열광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 전에 사용해 본 적 없는 제품을 큰돈 들여 사기 전에 샘플을 발라 보며 내 피부에 맞는지, 색상이 나와 어울리는지 알아볼 수 있다. 소비자 대부분은 값비싼 화장품이나 향수를 사 놓고 맞지 않거나 질리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쓰지 않은 경험이 한 번쯤은 있다. 매장에서 테스트 제품을 한 번 슥 발라 보거나 뿌려 보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알리바바그룹 산하 티몰(톈마오)은 2021년 1월 본사가 있는 저장성 항저우시에 화장품 샘플 팝업을 열었다. 80여 개 브랜드의 3만 개 이상 화장품 샘플을 거저나 마찬가지인 1위안에 팔았다.
여러 브랜드 제품을 체험하고 비교해 볼 수 있는 것도 샘플 제품의 장점이다. 특히 중국 Z 세대 소비자는 새로운 경험을 원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 브랜드나 제품을 향한 충성도가 윗세대보다 낮아 제품 생명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다.
샘플 경제가 커지면서 기업들도 새 고객을 유치할 방법으로 샘플을 활용하고 있다. 말이 샘플이지, 요즘 샘플은 본품의 미니 버전처럼 용기와 패키지 디자인이 동일하고 그래서 앙증맞다. 소비자는 샘플을 사는 것만으로도 그동안 가격대가 비싸서 사지 못했던 브랜드의 제품을 써 보며 만족감을 가질 수도 있다. 아예 화메이가 브랜드의 의뢰를 받아 전용 샘플을 제작하기도 한다. 창업자 왕쥔차오는 한 인터뷰에서 “샘플 판매를 통해 소비자의 브랜드 진입 문턱을 낮추고 고객당 구매율을 높일 수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샘플은 본품보다는 가격이 싸다. 용량 단위당 가격으로 따지면 샘플이 더 비싼 경우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화메이는 아예 본품을 사는 것보다 본품 용량과 맞먹는 샘플 여러 개를 사는 게 훨씬 더 저렴하다고 광고한다. 화메이 위챗 공식 계정에서 헬레나루빈스타인 ‘리-플라스티 에이지 리커버리 나이트 크림’ 50㎖ 본품 가격은 3680위안인데, 5㎖ 샘플 10개 세트(총 50㎖) 가격은 할인 포함 1990위안으로 훨씬 싸다고 광고하는 식이다. 마찬가지로 랑콤 ‘압솔뤼 소프트 크림’ 제품을 15㎖ 샘플 4개(총 60㎖) 세트로 사면 1032위안으로, 60㎖ 본품 구매 가격(2750위안)보다 저렴하다고 마케팅한다. 중국 소비자의 실용주의 심리를 겨냥한 것이다.
그러나 샘플 경제엔 항상 샘플의 출처와 진위 여부를 의심하는 목소리가 따라다닌다. 대체 어디서 누가 만든 것이며, 어떤 경로로 유통됐느냐는 의문이다. 화메이도 지난해 3월 메이크업 샘플 패키지에 제품 정보를 누락한 사실이 현장 조사에서 드러나 상하이 시장 규제 당국으로부터 벌금 89만 위안(약 1억7100만 원)을 부과 받았다. 당시 프랑스 클라란스 등 4개 브랜드가 일부 제품의 중국어 라벨에 성분과 생산 번호 등 정보를 표기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 세포라 위협하는 ‘중국판 세포라’
화메이는 2022년 1월 제너럴 애틀랜틱·힐하우스 인베스트먼트 등 투자사로부터 2억 달러(약 2700억 원) 투자를 추가 유치했다. 2019년부터 총 네 차례 외부 투자를 받았다. 이 자금을 활용해 지난해 매장 다섯 곳을 새로 내며 매장을 총 14개로 늘렸다. 올해 4월 말 기준, 베이징에 3개, 상하이·청두에 각 2개, 항저우·충칭·시안·우한·선전·광저우·친황다오에 각 1개 매장을 운영 중이다. 헤이든·온리라이트·더컬러리스트·와우컬러·제모 등 다른 중국 뷰티 집합점 대비 가장 안정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제는 외국 브랜드가 중국 화장품 시장에 진출할 때 먼저 찾아오는 곳이 됐다. 대형 면세점에서나 보던 온갖 브랜드가 화메이에 집결했다. 단지 샘플을 사러 가는 곳이 아니라, 중국 소비자가 화장품을 사려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필수 장소가 됐다는 뜻이다. 바이레도·딥티크·메종 프란시스 커정·프레데릭 말·펜할리곤스·메종 마르지엘라 레플리카 등 해외 고가 니치 향수 브랜드는 화메이 같은 뷰티 편집숍에서 열렬한 반응을 얻은 후 단독 매장을 확대하는 추세다.
세계 최대 럭셔리 제품 그룹인 LVMH 산하 세포라는 중국 뷰티 스토어 체인의 공세가 커지자, 지난해 10월부터 중국 화장품 브랜드 입점을 늘리는 방향으로 전략을 전환했다. 중국 진출 후 줄곧 외국 브랜드, 특히 가격대가 비교적 높은 프리미엄 뷰티 브랜드 위주로 매장을 채우던 것과 상반되는 행보다. 세포라는 지난해 6월엔 중국 화장품 브랜드 5곳이 3년 안에 매출 1억 위안(약 192억 원) 이상을 달성하도록 지원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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