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에 밥을 왜 숨겨?" 할머니가 이상해졌다…억장 무너진 손녀, 메가폰 들다

김지은 기자 2023. 5. 1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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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옥순로그' 주인공 김옥순 할머니. /사진=김나연 감독


"기억이 사라지는 병, 치매."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치매센터에 따르면 2016년 75만명이던 치매 환자 수는 지난해 93만명까지 늘어났다. 2030년에는 치매 환자가 136만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고령화 시대, 치매와의 전쟁 속에 뛰어들게 될 대한민국. 우린 이 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해야 할까.

지역 PD이자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인 김나연씨는 "치매는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 감독의 친할머니 역시 2년 전 치매 판정을 받았다. 그는 올해 치매 할머니의 일상을 담은 79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제목은 할머니 이름 '김옥순'을 따서 '옥순로그'다. 이 영화는 지난 4월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시네마 부분에 공식 초청돼 호평을 받기도 했다.

"베란다에 밥을 왜 숨겨?" 할머니가 이상해졌다

영화 '옥순로그' 주인공 김옥순 할머니와 손녀 김나연 감독. /사진=김나연 감독

김 감독에게 할머니는 어머니 같은 존재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한 탓에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동생과 김 감독을 돌봤다. 그런 할머니가 이상하다고 느껴진 건 2021년 4월쯤. 당시 할머니는 86살이었다. 김 감독은 "4월이면 봄인데 할머니는 계속 겨울이라고 말했다"며 "전자레인지에 국을 놓고 까먹어서 맨 밥을 물에 말아 먹는 것도 자주 봤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병원에서 치매 판정을 받은 날, 김 감독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느꼈다. 그는 "병원에 가는 순간까지도 할머니는 치매가 아닐 것이라 믿었다"며 "그런데 막상 현실을 알게 되니 미칠 듯한 아픔이 몰려왔다"고 말했다.

집에 돌아온 김 감독은 앞으로 할머니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떤 영상 하나도 남겨놓지 못한 게 큰 후회로 남았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2021년 5월부터 2022년 5월까지 총 1년 간 할머니 일상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영화 '옥순로그' 주인공 김옥순 할머니와 손녀 김나연 감독. /사진=김나연 감독


처음 영상을 찍을 때만 해도 김 감독의 목표는 '할머니의 기억을 되찾자'였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치매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할머니는 매일 같이 약을 챙겨줘도 깜빡 잊고 드시지 않았다. 평소 쉽게 드나들던 현관문 비밀번호도 까먹어서 1시간 넘게 집 앞에서 대기했다. 그날 먹은 음식도 기억이 안 나서 두유를 10팩 넘게 마시기도 했다. 또 할머니는 이상하리만큼 밥에 집착했다. 밥솥에 밥이 남아있는데도 계속 덜어내고 새 밥을 지었다. 하루는 할머니가 베란다에 밥을 숨겨놔서 누룩이 된 상태로 발견되기도 했다.

그때부터 김 감독의 목표는 '할머니에게 매일 좋은 기억을 심어주자'가 됐다. 비록 할머니가 일상을 기억하지 못해도 무의식에는 행복의 감정이 남아있을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김 감독은 할머니에게 밥을 그만 지으라고 화를 내기보다는 밥통을 미니 밥솥으로 바꿔서 손녀를 챙겨주고 싶은 할머니의 마음을 지켰다. 또 두유를 그만 먹으라고 잔소리하기보단 저당 우유로 바꿔서 할머니의 행복을 지켜줬다.

김 감독은 "너무 우울하게만 현실을 보기보다 할머니의 귀여운 면모, 시트콤적인 면모를 보려고 노력 중"이라며 "영화를 만들 때도 내가 어떻게 치매 노인과 삶을 맞춰나갈 수 있을지에 집중했다"고 말했다.

"내 감정을 인정하세요" 가족들이 말하는 치매 극복법

영화 '옥순로그' 주인공 김옥순 할머니와 손자, 손녀 모습. /사진=김나연 감독

치매 환자 가족들은 우울함이 높을 수밖에 없다. 답답함을 토로할 곳이 없다 보니 혼자 속앓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슬픔은 분노로 표출이 돼서 가족들 간 또 다른 불화를 만든다.

김 감독 역시 할머니가 치매 판정을 받고 난 뒤 동생과 자주 싸웠다. 그는 "코로나 시기에 동생이 할머니를 주로 케어했다"며 "매번 할머니를 돌보다 보니 부담감, 스트레스 등이 쌓였던 것 같다. 동생이 할머니에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면서 속상하니까 자주 다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심리 상담센터의 도움을 받았다. 김 감독은 "상담 선생님이 제가 화를 내는 이유는 '할머니가 미워서'가 아니라 '제 마음속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씀해주셨다"며 "그 말이 큰 위로가 됐다. 그때부터는 우울함이 밀려와도 '이 마음은 할머니를 걱정하는 내 두려움에서 비롯됐구나' 스스로 다독인다"고 말했다.

그는 할머니를 이해하는 과정도 무척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 감독은 영화 속에서 할머니 기억이 어디서부터 멈춰있는지 추적하기 위해 아버지 납골당에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그때는 할머니가 누구보다 또렷하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순간을 말씀하셨다"며 "할머니가 가족이 떠난 상실의 시기에 멈춰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할머니에게 더 좋은 기억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전주국제영화제에 '옥순로그'가 공개됐을 때 관객들도 많은 공감을 했다. "우리 할머니 생각이 나서 가슴이 찡했어요" "저희 어머니도 치매 환자인데 공감이 됐어요" 등의 여러 호평이 나왔다. 상영 도중 눈물을 뚝뚝 흘리는 관객들도 보였다.

앞으로 김 감독의 목표는 할머니와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더불어 지역 사회 문제를 유쾌하고 따뜻하게 풀어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인터뷰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제 나이가 아무래도 30대를 지나다보니 요즘은 좋은 부모란 무엇일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언젠가 부모에 대한 이야기도 저만의 방식으로 재밌게 풀어보고 싶어요."

김지은 기자 running7@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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