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꿀벌 실종 시대, 꿀벌 멸종 시대
인류 문명의 종말 막으려면 살충제 줄이기 등 실천 절실
이진규 편집국 부국장 겸 경남본부장
“나는 과일이 주렁주렁 열린 나무들을 볼 때마다 곧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꽃가루를 발라야 한다는 생각이 자동적으로 떠오르곤 했다. 셀 수 없이 많은 과일나무들은 하루 온종일, 몇 달, 혹은 몇 년의 일거리에 불과했다.” 노르웨이 작가 마야 룬데가 2015년에 낸 책 ‘벌들의 역사’에서 각기 다른 시대에 벌을 다루는 세 주인공 가운데 한 명으로 벌들이 사라진 세상에 사는 타오가 매일 12시간 이상을 나무에 올라 벌 대신 꽃가루를 수분시키는 일을 하면서 과일나무를 바라보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벌들의 역사’는 세 인물을 통해 벌들이 사라진 디스토피아를 이야기한다. 세 인물은 1852년의 영국 동물학자 윌리엄, 2007년의 미국 양봉업자 조지, 2098년 벌들이 멸종한 시대에 중국에서 인공수분에 종사하는 노동자 중국인 타오다.
룬데는 소설에 대해 “민주주의 체제는 붕괴했고, 디지털 네트워크는 기능을 상실했다. 전 세계 인구수는 이제 10억 명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것은 벌들이 사라진 후에 벌어진 일이었다”고 묘사했다. 꿀벌 실종의 상황이 벌어진 오늘의 현실에서도 이런 설정은 심하게 과장된 듯 느껴진다. 하지만 꿀벌에 의존하는 인간의 먹을거리가 얼마나 되느냐를 생각해 보면 소설이 현실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소설 속 벌들이 사라진 세상에서 과일 가격은 치솟고 벌에 수분을 의지하는 꽃들도 빠르게 멸종한다. 과일이 줄어들고 꽃이 사라지는 것은 그 자체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불러왔다. 환경이 망가지면서 식량 생산도 줄어들고 인류가 생존을 위협받게 되면서 민주주의 체제는 물론 국가 체제의 유지 자체가 뒤흔들린다. 소설은 19세기부터 21세기에 걸쳐 벌의 생태를 연구하고 이해하며 벌을 이용해 오다가 벌의 부재로 문명의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한다.
소설 속 2098년의 일은 2023년인 현재 현실로 다가온다. 아니 사실은 벌써 여러 해 전부터 겪어온 일이다. 전 지구적인 기후 변화와 국지적인 살충제 사용 등 인간의 영향으로 꿀벌의 생존이 벼랑 끝에 섰다. 기온 상승과 극단적인 기상 현상으로 대변되는 기후 변화가 농사짓는 이들을 당혹하게 하는 꿀벌 실종 사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마야 룬데는 “기후 변화는 지금 우리의 앞마당에서도 여실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이라고 경고한다. 그의 말처럼 기후 변화는 거창한 명제가 아니라 우리 밥상에 바로 영향을 미치는 일이다.
당장 올해 과일 농사를 짓는 경남 농가들이 꿀벌을 구하지 못해 울상을 짓는다고 한다. 최근 몇 년 사이 양봉농가마다 꿀벌 폐사 사태를 겪는데 특히나 지난해 가을부터 올해 2월까지 경남 양봉농가에서 키우는 꿀벌 중 70%가 폐사하거나 사라졌다. 한국양봉협회는 전국 꿀벌의 절반 이상이 사라진 걸로 본다.
통상 4월이면 과일 농장에서는 바쁘게 꽃가루를 나르는 꿀벌 소리가 시끄러워야 하는데 올해는 벌 구경하기가 어렵다. 벌 구하기가 별 따기만큼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올 지경이다. 그 때문에 직접 붓을 들고 인공수분에 나서기도 한다. ‘벌들의 역사’ 속 타오가 미래의 인물이 아닌 현실이 된 셈이다.
앨런 와이즈먼의 환경과학 논픽션 ‘인간 없는 세상’을 보면 ‘지구에서 다른 생명의 생존에 가장 위협적인 생명’이라는 오명을 쓴 인간이 사라진 세계에서는 뭇 생명이 풍요를 구가한다. 와이즈먼이 인간의 발길이 끊어진 뒤 생물 다양성이 극적으로 풍부해진 곳으로 사례를 든 우리나라의 비무장지대, 원전 사고가 난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의 출입금지구역, 사람의 발길이 극히 드물게 닿는 폴란드의 원시 침엽수림 지대에서 자연은 조용히 인간의 흔적을 지워간다. 그러나 ‘꿀벌 없는 세상’은 인간 없는 세상과는 정반대의 세상이 될 것이다. 생명 다양성이 줄어드는 데다 더군다나 꿀벌의 수분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는 인간에게는 더욱 단조롭고 빈곤한 세상이 될 것이다.
꿀벌 실종 시대를 살아가면서 꿀벌 멸종 시대를 맞지 않으려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크게는 기후변화를 늦추기 위한 방안을 실천하는 일에서부터 작게는 살충제 사용을 줄이는 일까지. 쉽지 않은 일이지만 희망을 내려놓기는 이르다. ‘벌들의 역사’는 타오의 아들의 죽음이 벌에 쏘인 쇼크 때문이라는 걸 밝히면서 끝난다. 멸종된 줄 알았던 꿀벌의 작은 집단이 살아남은 것이다.
꿀벌은 드물게 사회적 생활을 하는 동물로 구성원의 지식과 지능을 효과적으로 결집해 훌륭한 집단 선택을 끌어낸다. 신생대 제3기의 올리고세 지층에서 화석으로 발견돼 최소 3000만 년 동안 명맥을 이어온 꿀벌이 우리 세대에 종말을 맞는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다. 꿀벌의 부재는 소설에서만 일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이진규 편집국 부국장 겸 경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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