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터치] 내일 돌아가실 예정입니다
“내일 돌아가실 예정입니다.” 그의 가족에게 전달받은 내용이다. 돌아가실 예정이라니, 이런 황당한 말이 어디 있는가. 오래 전에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로 지내왔는데, 며칠 전 그가 다시 쓰러지면서 이번에는 다른 쪽 뇌동맥이 터져 의식이 없는 상태다. 아마도 거의 정지한 뇌파 반응에 전문의가 최종 평가를 앞두고 내린 결론이리라. 가족들은 벌써 그 어렵고 숭고한 장기기증 결정도 했다 하니, 내일이 되면 인공호흡기도 떼고 판정에 따라 장기 적출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될 모양이다. 내가 제대로 대답도 못 하는 사이에, 내일의 장기 적출 시간과 장례식장 위치까지 친절히 알려주고는 전화가 끊어졌다.
다시 한번 돌아가실 예정이라는 말을 곱씹어 본다. 그동안 나는, 결혼할 예정이라든지 헤어질 예정 또는 여행을 떠날 예정이나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라는 말은 수없이 들어봤다. 그러나 싱싱하게 숨 쉬는 자들이 곧 숨이 멎을 것 같은 타인을 지칭하며, 혹여 정밀기계 수치와 과학적 근거를 내세웠다고 하더라도, 날짜까지 콕 찍어 죽을 예정이라고 못 박는 말이 비참하다 못해 너무도 잔혹하다. 과연 몸의 주인도 스스로 내일 돌아가실 예정일까.
그러면 도대체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어느 시인의 시구(詩句)처럼 돌아갈 곳 아무 데도 없는 사람들일지라도 생의 끝에는 모두 돌아가니까 누구라도 돌아갈 곳 있다는 사실에 안도해야 할까. 그동안 부모님도 큰오빠도 연화 언니도 경준 씨도 수옥이도 진규도 내가 아는 사람들이 참 많이도 돌아가셨다. 그들이 돌아가실 때도 아무도 먼저 자신들이 돌아갈 예정이라고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 돌아가는 자들만이 약속한 불문율처럼 가는 장소와 날짜를 끝까지 함구하고서 그들은 절대로 발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삼십수 년 동안 환자로 지낸 것이 미안하여 슬쩍 귀띔이라도 해준 것일까.
아니다. 생각해 보면 그들도 떠나기 전에 분명히 일러주었다. 애타는 눈빛으로, 따스한 온기로, 때로는 단호한 몸짓과 침묵의 말씀으로, 머잖아 자신들이 돌아가실 예정이라고 간곡하게 전했으나 나는 우둔하여 알아듣지 못했다. 십 년 병상에 계시던 아버지는 느닷없이 한뎃솥에 팥죽을 한 솥 쑤라고 일렀는데 그것이 상갓집 일꾼들 몫이라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사십 년 전 어머니가 모심기 새참인 팥빵을 드시지 않고 저녁에 건네줬을 때도 내게 주는 마지막 먹거리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연화 언니가 소양강 물속에 뛰어들기 며칠 전날 쉰 목소리로 울면서 전화 왔는데 뜬금없이 미안하다는 말에 나는 어른이 청승맞게 운다며 타박만 줬고, 진규가 기장에 국수 먹으러 가자고 했을 때도 다음에 다음에, 라며 바쁘다는 핑계로 자꾸 미뤘다.
그렇다면 그들은 돌아가신 것이 맞을까. 몸이 움직인다고 산 것이며 육신이 허물어졌다고 정말 죽은 것일까. 우리는 매 순간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늘의 나는 십 년 전 내 모습과 다르고, 청춘 때의 형상과 어린아이 때의 얼굴도 벗어났으니, 그때의 내 몸은 전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먼저 가신 지인들도 내 기억과 마음속에는 그대로 살아있으므로 완전히 죽었다고 하는 것도 맞지 않다. 나는 종일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는데 어느 것도 아직 명쾌한 답이 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아는 노스님께서도 삶과 죽음은 다르지 않다 하셨다. 만물이 다 생겼다 사라지는 연기적 존재이니 죽음에 대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 담겼겠다. 그 세계는 아무런 막힘도 없이 순수하고 깨끗하고 자유로울 것이며, 돌아가신다는 것은 타버린 재처럼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생을 놓을 수 있는 처음 자리로 되돌아가는 일이므로. 그러니 어설프고 불완전한 삶을 미생이라 일컫고 죽음을 완생(完生)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조카가 보내온 그의 병상 사진이 유독 평온해 보이는 까닭도 그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는 내가 전화를 받은 다음 날 정확하게도 돌아, 가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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