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만 對 100만… 의료 뒷전, 수싸움 된 간호법
야당이 국회에서 일방 처리한 간호법 개정안에 대해 정부·여당이 14일 윤석열 대통령에게 재의 요구권(거부권) 행사를 건의했다. 간호법은 의료법에서 간호를 분리하고, 간호사의 활동 범위에 ‘지역사회’를 포함하는 내용이다. 의사, 간호조무사(간무사) 등이 법에 반대하며 보건 의료계가 극심한 내홍에 휩싸인 상태다.
국민의힘은 이날 서울 총리 공관에서 고위 당정 협의회를 연 후 “(간호법은) 보건의료인 간 신뢰와 협업을 저해해 국민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우려가 심대하다”며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당정은 이날 간호법에 대해 ‘의료체계 붕괴법’ ‘간호사만을 위한 이기주의법’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강하게 비판했다. 간호사들의 업무 영역 확장으로 “400만명에 달하는 요양보호사, 사회복지사가 일자리 상실을 우려하고 있다”고도 했다. 간호법을 요구하는 간호사(면허 기준 45만7000여 명)보다 더 많은 수가 반대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당정이 거부권 요청을 공식화함에 따라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15일 윤석열 대통령에게 관련 내용을 보고하고, 16일 열리는 국무회의에서 윤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를 결정할 전망이다. 대한간호협회는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단체 행동’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취임 후 두 번째가 된다. 앞서 정부가 남는 쌀을 의무적으로 사도록 하는 양곡관리법을 더불어민주당이 일방 처리하자 거부권을 행사했다. 야당은 사회적 논란이 큰 방송법, 노란봉투법(노조법 개정안) 등도 단독으로 처리하겠다는 입장이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민주당이 갈등을 조정하기는커녕 증폭하는 데 매진하는 것이 참 안타깝기 짝이 없다”고 했다.
간호법은 간호사의 업무나 처우 개선 등을 담은 보건 의료 분야의 문제다. 고령화, 인구 감소로 사회 구조가 바뀌고, 의료·복지 수요가 급격히 커진 상황에서 의료법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의료법은 간호사의 단독 의료 행위를 금지하는데, 정부는 올해 지방자치단체 소속 간호사가 환자 집을 방문해 혈압·혈당·콜레스테롤을 측정할 수 있는 의료법 유권해석을 내놨다.
하지만 보건 의료 단체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서 현재 간호법 추진은 ‘정치적 수 싸움’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갈등을 조정하기보다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편 가르기를 통해 오히려 자기편 만들기에만 열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한 피해는 보건 의료 종사자뿐 아니라 서비스를 이용하는 국민이 보게 된다.
정치권에선 민주당이 간호사 편을 든 것은 간호사 단체의 ‘단합력’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간호사 단체는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를 중심으로 지역별로 조직화된 반면 다른 단체들은 전국적인 조직력이 약하다 보니 간호사 단체가 여론전에서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다.
현재 간호법에 대해 보건 의료계는 둘로 쪼개진 상태다. 법안을 요구해 온 간호사(45만7000여 명)와 함께 한의사(2만6000여 명)가 찬성하고 있다. 한의사는 기존 의료법에서 분리된 간호법처럼 별도 한의사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의사(13만2000여 명), 간무사(72만5000여 명), 치과 의사(3만3000여 명)와 임상병리사(6만5000여 명), 방사선사(5만여 명) 등 보건 의료 단체 13곳은 간호법을 ‘간호사 특혜법’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표’로만 계산하면 간호법 찬성이 50만명에 못 미치고 반대는 100만명에 이른다.
의료계 관계자는 “간호법 추진 초기 ‘간호사 대 의사’ 구도에서는 간호사가 3대1로 수적으로 앞섰지만 간무사 등 다른 직역이 반대에 가세하면서 1대2로 역전됐다”고 했다. 간무사들은 간호법이 간무사 응시 자격을 ‘고졸’로 제한한 조항 등을 들어 반대하고 있다. 간무사협회 측은 “간무사를 간호사 아래 위치로 고정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당정은 이날 회의 직후 간호법에 대해 ‘간호조무사 차별법’ ‘신(新)카스트제도법’이라고 했다. 혼란이 장기화하면서 간호법 추진 초기 “의사보다 상대적 약자인 간호사”에 우호적이던 여론이 달라졌다는 판단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은 간호법이 지난달 27일 야당의 일방 처리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기 직전까지 타협을 시도했지만 대한간호협회와 민주당은 원안 통과를 고수했다. 국회 통과 이후에도 야당에 간호 활동 영역 가운데 논란이 된 ‘지역사회’ 등의 표현을 삭제하는 등의 대안을 제시하고, 윤재옥 원내대표가 대한간호협회 농성장을 찾았지만 타협을 이루지 못했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밑져야 본전인 야당과 달리 여당은 잘해야 본전”이라며 “정치적으로는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의료계의 혼란을 방치할 수 없지 않느냐”고 했다. 당정은 “간호사 처우 개선, 인력 지원 대책은 계속 추진하겠다”고 했다.
민주당 내에서도 의사, 간무사 등의 다수의 반대를 신경 쓰고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검수완박 때와 달리 간호법은 당이 전력을 쏟는 분위기는 아니라는 평가도 나온다. 민주당 관계자는 “간무사 등 다른 의료 단체들이 간호사와 대립하면서 예상치 못하게 판이 너무 커졌다”며 “현 상황이 부담스러운 측면도 있다”고 했다. 간호법 강행 배경엔 양곡관리법에 이어 윤 대통령이 어디까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을지 보겠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서울시 교육 복지 ‘서울런’, 내년부터 4~5세 유아도 누린다
- 김건희 여사 디올백 꺼내 든 야당 ... 박장범 “객관적이고 중립적 용어 사용한 것”
- 신네르, APT 파이널 우승...2024년 남자 테니스를 지배하다
- GS건설, 22년만에 '자이(Xi)' 브랜드 리뉴얼...새 브랜드 철학, 로고 공개
- 하청업체 기술 훔쳐 중국에 넘긴 귀뚜라미 보일러…과징금 9억원
- 김정은, “핵무력 강화, 불가역적인 정책”
- ‘독극물과 다름없다’더니... 햄버거 들고 트럼프와 사진 찍은 케네디
- 野 “대북전단 방치한 국방장관, 탄핵 사유 검토”
- Trump Rally sparks Crypto boom in S. Korea, overshadowing its stock market
- 野 이해식, 이재명 사진 올리며 “신의 사제, 신의 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