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경제파탄’ 좌파 실패, ‘핑크 타이드’가 부른 중남미 대탈출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식당에 지난 13일(현지 시각) 들어서자 직원이 자리를 안내하며 메뉴판을 건넸다. “여기 적힌 가격은 가짜입니다. 붙여 놓은 QR코드를 휴대폰으로 찍으면 홈페이지에 진짜가 있을 거예요. 가격이 매일 오르기 때문에 종이 메뉴는 무용지물입니다.”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좌파인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2019년 집권한 아르헨티나에선 ‘오늘이 가장 싸다’는 말이 흔히 쓰인다. 과도한 무상 복지와 경제 실책으로 인한 극심한 인플레이션 탓에 물가가 너무 가파르게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전년 대비 물가 상승률이 94%를 기록하더니 지난달엔 109%까지 올랐다. 광범위한 돈 풀기에 감세가 겹쳐 구멍 난 재정을 중앙은행의 ‘돈 찍기’로 충당하면서 물가가 더 오르는 악순환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아르헨티나 화폐 페소가 휴지 조각이 되리라는 전망에 미 달러만 받겠다는 현지 가게도 늘었다. 아르헨티나 최대 부동산 사이트 ‘소나프롭’엔 달러로 매매·월세 가격을 표시한 물건이 대다수였다. 현지 부동산 중개업자 말랄라는 페소 계약은 안 되느냐고 묻자 “가지고 있으면 쓰레기가 되기 때문에 안 된다. 큰 금액이 오가는 (부동산 같은) 거래를 불안하게 어떻게 페소로 하냐”고 딱 잘라 거절했다.
중남미에 연쇄적으로 좌파 포퓰리즘 정권이 들어서는 이른바 ‘핑크 타이드(분홍 물결·중남미 좌파 연쇄 집권)’ 및 이들 정부의 실패가 최근 미국행(行) 중남미 이주자 급증의 원인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코로나 방역을 위해 이주자들을 즉각 추방할 수 있도록 했던 미국의 강력한 국경 차단 조치(42호 정책)가 지난 11일 종료되면서 미국으로 이주자가 쏟아져 들어올 조짐인데 이 중 상당수가 중남미 좌파 정부의 경제 붕괴를 피해, 이주를 희망하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뉴욕타임스(NYT)는 “니카라과·베네수엘라·쿠바 등의 상황이 너무나 절박해, 이 나라 국민들은 추방 위험에도 미국을 향한 위험한 여정에 나서고 있다”며 “이 국가들의 실패가 ‘질병’이라면 급증하는 이주자는 그 ‘증상’”이라고 전했다. 현재 국경 지대에 이주자들이 밀집한 계기는 42호 정책 종료일 수 있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핑크 타이드’가 초래한 국가의 실패라는 뜻이다.
1990년대 한 차례 중남미를 휩쓸었다가 퇴조한 ‘핑크 타이드’는 2018년 좌파 정권을 탈환한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을 시작으로 지난해 7월 건국 후 최초로 좌파 정권이 집권한 콜롬비아, 10월 브라질에 이르기까지 빠르게 부활하고 있다. 브라질에선 중남미 좌파의 ‘대부(代父)’ 격인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가 12년 만에 다시 대통령에 당선됐는데 빈곤층 복지 확대, 최저임금 인상, 소득세 감세 등 전형적인 포퓰리즘 정책을 내걸고 있다.
대부분 좌파 정권은 무상 복지, 서구로부터의 자립 등을 내세우며 표를 모아 선거에서 이긴다. 하지만 수년간 이어지는 과도한 복지 지출과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 등에 시달리며 표를 준 국민조차 외면하는 나라로 변해간 경우가 많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좌파인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이 2007년 재집권 후 독재 중인 니카라과의 경우 최근 3년간 나라를 떠난 국민이 전체의 17%에 달한다. 농산물 수출에 국가 경제를 의존하면서도 독재를 비난하는 서방국과 외교를 단절하고 반정부 인사 및 언론에 대한 공포 정치를 펴면서 탈출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10월 미 테네시주 내슈빌로 이주해 잡일을 하며 살고 있다는 빅토르 에르난데스(29)는 NYT에 “아내와 둘이 일해도 두 자녀를 부양할 방법이 보이지 않아 떠났다. 니카라과의 상황은 너무 추악하다”고 했다.
좌파가 장기 집권하며 나라를 거덜낸 볼리비아는 중앙은행에 달러가 바닥나 사실상 부도 상태다. 에너지·토지 국유화, 최저임금 대폭 인상 등이 국가 경제를 초토화시켰다. 이코노미스트는 “볼리비아의 위기는 포퓰리즘 좌파의 한계를 보여준다. ‘핑크 타이드’가 다시 일고 있는 중남미의 좌파 국가들은 볼리비아의 실패에서 배워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미국과 국경을 맞대 이주자가 가장 많은 멕시코는 2018년 좌파 정부 집권 후 에너지 기업 국유화, 지나친 자국 우선주의 등으로 해외 투자와 기업이 빠져나가며 타격을 받고 있다.
포퓰리즘 좌파의 집권이 장기화하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경우 2020년 물가 상승률이 3000%에 육박하고 국민 80% 이상이 극빈층으로 추락할 정도로 심각한 생활고를 겪고 있다. 지난해 물가 상승률도 234%로 여전히 매우 높다. 우고 차베스(1999~2013년 집권)에 이은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좌파 정권이 석유 산업 국영화, 무리한 무상 복지 등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면서 경제가 붕괴했다. 난민 플랫폼 R4V에 따르면, 베네수엘라를 탈출해 미국 등 다른 나라를 떠돌고 있는 난민은 지난 3월 기준 720만여 명에 달한다. 유엔 국제이주기구(IOM)는 “하루 수천명의 베네수엘라인이 도보로 남미 국가를 횡단, 최종 목적지를 알지도 못한 채 나라를 등지고 있다”고 했다.
자원이 풍부하고 미국과 가까운 중남미 국가들은 한때 이런 이점을 살려 경제적 부흥을 도모했다. 하지만 복지 남발 등 포퓰리즘 정책, 미국 등 서방을 배척하자는 자국 우선주의 등으로 유권자를 현혹한 좌파 정권이 지난 수년간 중남미를 휩쓸면서 국가 고립과 재정 파탄이 초래한 궁핍을 더이상 참지 못하는 국민의 이탈 행렬이 미국으로 쏟아지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42호 정책 종료로 미국의 국경 통제가 완화되리라는 기대감이 커지면서 미국에 진입하려는 이주자 수는 올해 사상 최다를 기록할 전망이다. 미 관세국경보호청(CBP)에 따르면, 2023년 들어(회계연도 기준, 2022년 10월~2023년 3월) 미국의 남서부 국경을 넘으려다 추방 혹은 수용된 이주자는 약 129만명이었다. 이 추세가 유지만 되도 42호 정책 시행 와중에도 사상 최다였던 지난해(238만명)의 기록을 넘어서게 된다.
☞핑크 타이드
’분홍 물결’이라는 뜻. 1990년대 후반 이후 일부 중남미 국가에서 온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좌파 정권들이 잇달아 들어선 현상을 뜻한다. 이런 의미를 담아 사회주의의 상징인 적색보다 상대적으로 밝은 분홍색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지금은 온건뿐 아니라 중남미의 좌파 정권 전반을 아우르는 단어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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