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천 칼럼] 전환기의 도전과 위험한 반동정치
전환의 시대에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나. 2008년 금융위기를 분기점으로 신자유주의 광풍은 꺾였다. 탈세계화와 미·중 갈등 시대가 도래한 한편, 다면적 불평등과 부채경제, 고용불안과 빈곤이 초래한 삶의 불안과 사회적 불만 때문에 중도 기득권정치가 약화되고 포퓰리즘이 득세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위기가 휩쓸었으며 지금은 기후위기 비상사태다. 오늘의 포스트신자유주의 국면은 우리가 풀어야 할 세 가지 전환기 도전을 일러 준다.
첫째, 사회보호. 이는 신자유주의가 앗아갔고 코로나19 팬데믹이 그 필요를 절실히 일깨운 안전 및 안정의 보장을, 인간 및 자연의 돌봄을 뜻한다. 둘째, 주권. 이는 밖으로는 탈세계화에 따른 새로운 국경 관리 및 공급망 확보, 안으로는 기득권 정치에 의해 공동화된 대중주권의 복원을 말한다. 셋째, 통제. 이 역시 신자유주의적 반동과 코로나19 팬데믹이 일깨워준 것인데 좁게는 망가진 국가능력의 재건, 더 넓게는 정치의 새로운 복원이라는 과제를 의미한다. 이 세 가지 도전을 풀어내는 방식은 나라의 역량과 조건에 따라 다양하다. 예컨대 대응은 권위주의 세력이나 포퓰리즘 세력 또는 새로운 민주적 세력이 주도할 수도 있고, 좌표를 상실한 반동적 퇴행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일찍이 이런 문제 상황을 예리하게 통찰했던 이는 칼 폴라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유시장이 본원적이고 공적 규제는 이차적, 심지어 부자연스러운 것처럼 주장한다. 하지만 폴라니는 자유시장이란 하나의 정치적 기획이자 실천, 이데올로기일 뿐이며 거기에 결코 자연적인 것은 없다고, 자유시장 자체가 엄청난 국가개입에 의해 창출되었다고, 노동·토지·화폐를 무리하게 상품화시킨 시장사회 속의 자유란 ‘허구적 자유’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허구적이라 함은 거짓이고 다수 대중은 자유의 실질적 기반이 없음을, 시장에서는 돈이, 자산소유자가, 채권자가, 임대업자가 지배한다는 말이다. 그들은 특권적 자유를 누리지만 노동자, 채무자, 세입자, 흙수저 인생은 사슬에 얽매인다. 폴라니는 오직 쇄신된 민주적 대안만이 탈규제 자유시장주의와 파시즘의 이중적 도전을 넘어 모두를 위한 자유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또한 그는 자유시장 확대와 대항적 사회보호 간의 이중운동이 항구적이며 사회보호운동도 여러 갈래임을 지적했다. 한국도 이 스토리의 예외일 수 없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국가능력 및 정치를 재구성해야 한다, 주권을 복원해야 한다는 포스트신자유주의 국면의 새 도전 앞에 한국은 어디로 가고 있나. 이 나라에는 윤석열 정부 아래 거대한 퇴행이 일어났다. 한국은 경제규모 세계 10위권의 선진국이라지만 출생률 최저, 자살률 최고, 노인빈곤율 최고, 산재사망률 최고(OECD 기준)의 병든 나라이며, 취업자 80%가 2차 노동시장에서 불안에 떨며 일하고 공공임대주택 비율이 4~5%대에 불과한 주거권 빈곤의 나라다. 어느새 계층상승 이동 기회도 좁은 문이 됐다. 이런데도 정부는 사회서비스, 소득보장, 보건의료, 주거정책에서 특혜적 규제 완화와 민영화, 영리화와 산업화를 한층 심화시키는 한편, 비정규직 확대와 주 69시간제, 노조 무력화와 사용자권한 강화정책을 추구했다. 그러면서 재벌특혜와 부자감세를 밀어붙였다. 가진 자, 불로소득자에게 퍼주면서 사회 짓부수기 작업에 매진했다. 부서지는 사회와 단짝을 이루는 것이 무책임 불량국가다. 적극적 재정운용을 통한 공공지출 확대가 시급함에도 대규모 감세와 긴축재정정책에 빠져 올해 세수 결손이 30조원이나 될 정도다. 정부가 스스로 자기 목을 졸라맸다. 하지만 이 작고 무능한 정부는 동시에 노조 때리기에는 크고 강한 검찰국가가 된다.
탈세계화와 미·중 갈등시대 주권 재정립의 과제는 어찌 됐나. 남북관계에서는 힘을 통한 평화라는 강경일변도 기조로 전쟁위험을 고조시켰다. 한·미, 한·일관계에서는 아무 줏대도 없이 중·러와 대결하는 미·일동맹 장기판의 졸이 되어 신냉전구도를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제3자 변제방식으로 자기 나라와 국민을 버리고 일본 우익의 매국적 대변인 노릇을 했을뿐더러, 한국의 기업 및 국익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는 미국의 반도체법 및 인플레이션감축법에 의해 뒤통수를 맞고도 아무 대응도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의 전도사다. 취임사에서 35번, 미의회 연설에서 46번 자유를 외쳤다고 한다. ‘허구적 자유’(폴라니)의 깃발 아래 민생을 죽이고 사회를 부수고 나라를 팔고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면서 말이다. 이 위험한 퇴행에 맞서 시민사회운동이 다시 일어서고 있다. 쇄신된 사회생태적 대안만이, 부서지고 갈라진 사회의 발본적 치유와 책임있는 공공국가의 재건만이 모두를 위한 자유, 나라다운 나라를 가져다줄 것이다.
이병천 강원대 명예교수·지식인선언네트워크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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