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살롱] [1397] 진주의 꽃밥
강호를 돌아다니면서 얻게 되는 가장 큰 즐거움은 그 분야의 고수를 만날 때이다. 고수를 만나보아야 안목이 트이고 겸손을 배우게 된다. 잘난 체하다가 고수를 만나 얻어터질 때 공부가 된다.
진주에 사는 지인의 소개로 만난 박미영(60) 선생. 진주 교방(敎坊) 음식의 전문가로서 ‘아름다움에 반하고 맛에 취하다’는 묵직한 인문 음식 책을 썼다. 교방은 고려 때부터 있었고, 조선 시대에도 이어졌던 기생 양성 기관을 가리킨다. 춤과 노래도 배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음식이었다. 당시 최고 수준의 음식은 교방에서 전문 요리 교육을 받았던 기생들이 내놓는 음식이었다.
기생을 거론할 때는 보통 ‘남진주 북평양’을 꼽는다. 남쪽의 진주가 그만큼 색향으로 유명했고, 비례해서 음식도 수준이 높았던 것이다. 식색동원(食色同源)이다. “진주는 지리산에서 나오는 각종 나물이 집결했고, 남해 바다의 생선도 풍부했습니다. 거기에다 주변에 들판도 넓었죠. 특히 지리산에서 공급되는 땔감나무가 풍부해서 화력이 좋았습니다. 우시장도 컸고, 소를 도살하는 백정들의 수도 가장 많아서 소고기가 풍부했죠. 이런 요소가 영향을 미쳤어요.” 박 선생이 꼽는 교방 음식의 최고는 바로 비빔밥이었다. ‘꽃밥’이라고도 불렀다. 화반(花飯). 색깔이 컬러풀해서이다. 음식도 일단 색깔이 좋아야 한다. 보기에도 좋고 맛도 좋고 영양가도 풍부했다.
교방 비빔밥의 시작은 진주에 살았던 고려 귀족 집안의 영향이었다. 강감찬 장군과 함께 거란의 60만 대군을 물리쳤던 강민첨(姜民瞻·?~1021) 장군의 제사 음식이 육회 비빔밥의 원조였다. 강민첨 장군의 제사상에는 익히지 않은 생소고기가 올라갔다. 크기는 A4 용지만 하고, 두께는 대강 4~5센티 정도의 소고기가 날것으로 올라갔다. 제사가 끝나면 후손들이 생소고기를 잘게 잘라서 밥에다가 얹어 먹는 전통이 천 년 동안 이어졌다. 여기에서 진주 비빔밥(꽃밥)을 대표하는 ‘육회 비빔밥’이 시작되었다는 게 박 선생의 주장이다.
진주에는 조선 개국공신 하륜(河崙·1347~1416)의 후손들인 하씨들의 비빔밥도 있다. 7가지 나물 위에 육회 대신 육전을 올리는 게 특징이다. 탕국에는 반드시 피문어를 넣었다. 고려 말 문신 상촌 김자수(金子粹) 집안의 비빔밥도 화려하다. 18가지 재료가 들어간다. 육회, 송이버섯 그리고 각종 나물이 들어간다. 봄철 지리산의 온갖 나물이 들어가기 때문에 ‘봄을 먹는다’고 할 정도의 약밥이었다고 한다. 진주는 꽃밥의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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