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좀 하니? ‘골 때리는 그녀들’이 된 기자들

한겨레21 2023. 5. 14.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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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기획]풋살화 구매부터 화장실까지 뭐 하나 쉬운 게 없다!… <한겨레> 여성 풋살팀의 좌충우돌 도전
2023년 4월9일 서울 강남구의 한 풋살장에서 ‘공좀하니’ 선수들이 연습경기를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누가 축구, 풋살 하지 말라고 칼 들고 협박함? 지들이 학창시절부터 체육시간만 되면 살 탄다 어쩐다 갖은 핑계 대가면서 몸 쓰는 활동은 죽어도 안 하려고 해놓고 왜 이제 와서 피해자 코스프레?” 남성 기자 중심의 한국기자협회 축구 대회가 1972년부터 2022년까지 49회째 열린 가운데 여기자들만 참여하는 풋살 대회가 2023년 처음 열린다는 한 기사(‘여성 기자에게 더 많은 운동장을’, <기자협회보> 2023년 5월2일)에 달린 댓글을 보면서 코웃음이 났다. 2023년 5월6일 한국기자협회가 열기로 한 대회 참여를 준비한 지난 두 달간, <한겨레> 여성 풋살팀 ‘공좀하니’ 선수들이 겪은 우여곡절을 듣고 나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끼면 민폐’ 여성들의 걱정, 그럴 필요 없다

“선배, 한국기자협회에서 여성회원 대상 풋살 대회를 연대요. 함께 나가요!” 2월 중순 남지현 금융팀 기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평소 달리기와 요가, 사이클 등 운동을 즐겨 해 체력 하나는 자신 있지만, 공과는 친하게 지낸 기억이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내 몸이 아닌 다른 도구를 컨트롤하는 일에 ‘젬병’이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여성 동료들과 회사 이름을 걸고 함께 뛸 기회라니, 게다가 초대 대회잖아, 그럼 이겨야지! 풋살 경기를 몇 명이 하는 건지, 포지션은 어떻게 나뉘는지도 모른 채 남 기자에게 답했다. “오래 뛰어야 하는 역할 시켜주면 잘할 수 있어요!”

2023년 4월1일 서울 마포구 월드컵경기장 풋살장에서 연습을 마친 ‘공좀하니’ 선수들이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박종식 한겨레 기자

남 기자를 따라 들어간 단톡방엔 여성 동료 10여 명이 알음알음 모여 있었다. 20대부터 40대까지, 연령대도 제각각이었다. 대회 개최 소식이 전해지자 다른 언론사들에도 하나둘 여성 풋살팀이 꾸려졌다. 선수들은 “○○ 팀엔 체대 출신 선수가 있다더라” “축구 잘하는 남자 기자들이 한 명씩 붙어 일대일로 가르치는 팀도 있다더라” “어느 매체는 전문 코치를 섭외했다고 한다” 등 다른 팀 동향을 속속들이 파악해 공유했다.

첫 연습 날인 3월3일, “몸도 약하고 학창 시절부터 체육은 바닥이라 ‘내가 끼면 민폐’라고 생각”했다는 전국팀 손지민 기자를 비롯해 저마다 이유로 자신 없어 하는 선수들에게 남지현 주장이 말했다. “여성들이 걱정을 많이 하는데, 절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선수들은 움직이는 공을 발바닥으로 멈춰 세우기부터 드리블, 인사이드 패스까지 평소 풋살을 즐겨 해온 남 주장과 김윤주 인구복지팀 기자의 가르침을 따라 풋살의 세계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단장을 맡은 이주현 뉴스총괄의 제안으로, 회사 누리집 도메인 ‘hani.co.kr’에서 딴 ‘공좀하니’로 팀 이름을 정했다.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보자

에스비에스(SBS) 예능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 덕분에 풋살을 즐기는 여성이 크게 늘었지만, 그라운드 위에 선 여성은 여전히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사방이 뚫린 야외 구장에서 연습하는 날이면,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 평가하는 듯한 얼굴로 뚫어져라 쳐다보는 남성들의 시선이 따라왔다. 무례한 일인 줄도 모르고 10분 넘게 가만히 선 채 구경하던 한 남성이 “저렇게 차면 재미는 있겠네”라고 비웃듯 말하는 걸 우연히 들은 날에는 “아, 이래서 ‘야구하니’ 선배들이 유니폼에 회사 이름 크게 박지 말랬구나” 생각했다.

여성용 풋살화와 신가드(정강이 보호대) 등 용품을 사는 것도 큰일이었다. 대부분의 스포츠 브랜드가 성인용 풋살화를 250 사이즈부터 들여놓은 탓에, 그보다 발이 작은 대다수 선수가 아동용을 사 신어야 했다. 그마저도 최근 들어 찾는 이가 많아져 원하는 사이즈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평소 230 사이즈 운동화를 신는 손지민 기자는 “매장 수십 곳에 전화를 돌려 사이즈가 있다는 한 곳을 겨우 찾아갔다. 발에 맞는 풋살화가 있다는 것만도 감지덕지라 원하는 디자인을 고르는 건 사치였다”고 했다. 남성용 샤워실까지 갖춰두고도 화장실은 남성용 소변기 하나만 달랑, 여성도 드나들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애초에 상상조차 못한 채 만든 듯한 풋살장도 있었다. 이 정도면 여성들의 공놀이를 온 사회가 나서서 뜯어말렸던 것 맞지 않나?

2023년 4월9일 서울 강남구의 한 풋살장에서 ‘공좀하니’ 주장을 맡은 남지현 기자가 연습경기를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다. 3월3일부터 대회 첫날인 5월5일까지 딱 두 달 동안 무려 19차례의 연습과 친선경기를 했다. 처음엔 가볍게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모여서 공을 차려고 했는데, 너나없이 “지금 실력으로는 턱도 없다”고 외쳐 막판에 주 2∼3회로 훈련 양을 늘렸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오히려 출석률이 높아졌다. “오늘 망원유수지에서 패스 연습 하실 분?” 공식 훈련이 없는 날에도 선수들은 단톡방에 ‘번개’를 쳐 삼삼오오 패스와 슛을 연습했다. 골키퍼 선·후발 선수인 장수경·장현은 기자는 주말 이른 아침 원데이 클래스를 찾아가 필요한 기술을 익혔다.

선수들은 “풋살을 제외한 모든 일상이 엉망이 됐다”고 입을 모았다. 박지영 이슈팀 기자는 “퇴근하면 바로 풋살장으로 달려가느라 빨래 돌릴 시간이 없어 편의점에서 새 속옷을 사다 입어야 할 정도”라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퇴근 뒤 늦은 밤까지 신나게 공을 뻥뻥 차고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1초만 더 빨리 달렸으면 아까 그 골 넣을 수 있었는데” 하고 연습 경기 장면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떠올라 쉬이 잠들지 못했다. 덕분에 1년 넘게 일주일에 서너 번씩 다니던 새벽 요가 수련에 밥 먹듯 결석했다.

처음엔 제대로 된 코치 없이 유튜브 영상을 참고해가며 훈련했다. ‘명색이 여성 팀인데, 남성 코치를 두는 건 모양새가 좀 그렇다’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대회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오고 조 추첨이 끝나자 모두 ‘이대로 초대 우승은 무리’라는 생각에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핵심 선수인 남 주장이 경기 전체의 흐름까지 봐가며 다른 선수들의 위치를 잡아주다보니 체계적인 경기가 어려웠다. 삼고초려 끝에 유소년 선수 출신인 류석우 <한겨레21> 기자를 코치로 모셨다.

대회가 취소된 2023년 5월6일 친선경기를 앞둔 공좀하니 선수들이 전략을 짜고 있다. 박종식 한겨레 기자

선수의 눈빛이 달라졌다

4월16일, 처음 연습에 참석한 류 코치는 “이건 풋살이 아니다”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모두가 사람이 아닌 공만 보고 우르르 쫓아가고 있습니다. ‘우당탕탕’ 하다가 우연히 넣은 골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계획된 패스 끝에 골을 넣어 버릇해야 실전에서도 이길 수 있어요.” 이날부터 공 잡은 사람이 언제든 다른 사람에게 패스해줄 수 있도록 여러 대형을 유지하는 연습에 본격 돌입했다.

바로 다음날인 4월17일, 다른 매체와 첫 친선경기를 치렀다. 우리 팀은 최소 인원인 다섯 명을 겨우 만들어 갔는데, 상대 팀은 열 명 넘게 경기장에 나와 있었다. 목청 큰 남성 감독이 끊임없이 선수들 위치를 조정해줬고, 선수들은 몸싸움을 서슴지 않았다. 처음 접한 살벌한 분위기에 공좀하니 선수들은 크게 위축됐다.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받을 사람이 근처에 있는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동료가 보내 준 공을 아무 데로나 차댔다. 덕분에 다른 선수들이 겨우 만들어낸 공격 흐름을 자꾸 끊었다. 결과는 4 대 1. 큰 패배였다.

나는 완전히 ‘멘붕’에 빠졌다. 팀을 패배로 몬 장본인이 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다른 선수들도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감독, 주장, 코치는 긴급회의를 열어 선발군과 후보군을 나누고 선수별 포지션을 정했다. 패스를 주고받을 때 0.01초라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 그라운드에서는 계급장 떼고 이름만 외치기로 했다. “회사 안팎에 ‘운동 마니아’로 소문이 다 났는데, 이대로 공좀하니의 ‘구멍’이 될 순 없잖아!” 출근 전 또는 퇴근 뒤 집 앞 공원 나무와 바위를 상대 팀 선수 삼아 공 컨트롤을 연습했다.

정인선 기자가 슛 연습을 하고 있다. 박종식 한겨레 기자

일주일 뒤인 4월21일, 또 다른 매체와 두 번째 친선경기를 치렀다. 공이 내 발 앞으로 왔을 때 당황하지 않고 동료에게 보내는 게 이전보다 익숙해진 게 느껴졌다. 이지은 감독은 “정인선 선수 눈빛이 달라졌다”고 놀라워했다. 윤연정 기자는 심한 감기몸살에도 불구하고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저마다 최선을 다한 결과는 3 대 0. 처음 맛본 승리에 모두 말 그대로 뛸 듯이 기뻐했다.

그래서 본경기는 어떻게 치렀냐고? 허무하게도 전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바람을 동반한 큰비가 멈추지 않아 대회날 아침 급히 일정이 연기됐다. 총무로서 재정난을 늘 걱정하던 나는 “그럼 빈 운동장 오늘 하루 공짜니까 우리가 독차지해 연습하자!”고 외쳤다. 다른 매체의 제안으로 친선경기를 치르는 것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더는 여리고 안전한 몸에 갇히지 않으리

정식 대회 대신인 만큼 두 팀의 신경전이 팽팽했다. 풋살 경력 5년이 넘는 주장과 겉모습만으로도 압도감을 주는 장신 선수 두엇을 보유한 상대팀은 초반부터 거센 압박 플레이를 했다. 이지은 감독이 “골 못 넣으면 집에 가서 잠이 안 오나봐”라고 혀를 내두를 정도로 골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던 남 주장조차 유효 슛을 좀처럼 만들어내지 못했다. 후반전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 주장이 왼쪽 다리를 부여잡고 드러누웠다. 교체 선수에게 자리를 내주고 응급실로 향하는 와중에도 남 주장은 “절대 골 내주면 안 돼”라고 신신당부했다. 어깨가 무거워진 선수들은 남 주장이 남긴 말을 지키기 위해 수비를 강화했다. 결과는 0 대 0. 나름 ‘선방’한 셈이지만 경각심이 다시 한번 커졌다. 손지민 기자는 “남 주장이 없어도 이길 수 있을 만큼 실력을 더 갈고닦아야 한다”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결전의 날은 미뤄졌지만 선수들 마음은 저마다 크고 작은 효능감으로 채워졌다. 장현은 기자는 “원래 엄살이 심한 편이었는데 상대편 공을 막으려 몸을 던지며 무릎 몇 번 까져도 아무일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더는 여리고 안전한 몸에 갇히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손지민 기자는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튼튼해질까 싶어 아침을 챙겨 먹기 시작했다”고 했다. 남지현 주장은 팀스포츠의 묘미를 처음 제대로 느꼈다고 말했다. “원래는 아마추어가 승부에 목숨 거는 건 꼴불견이라고 여겨왔어요. 팀이 그날 경기에 지더라도 내가 골을 넣었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우리 팀’이 생긴 지금은 아니에요. 내가 골을 못 넣어도 팀이 이긴다면 상관없게 됐어요.”

정인선 <한겨레> 기자 r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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