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이의 범아시아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한겨레 2023. 5. 14.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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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창]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일인 2021년 7월1일 베이징의 천안문(톈안먼) 광장에 내걸린 마오쩌둥 초대 주석의 대형 초상화 앞에서 군악대가 행사에 앞서 리허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계의 창] 슬라보이 지제크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오늘날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범아시아주의에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19세기 말 서구 제국주의의 지배와 착취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이 사상은 서구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기반하지 않은 경제적, 정치적 해방을 성취하려는 복잡한 기획에서 시작됐다. 아시아는 서구의 발전 경로를 따라갈 필요가 없고, 아시아적 전통을 활용해 서구보다 더 역동적인 방식의 산업 근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이다.

2019년 한국에서 열린 아시아미래포럼에 참석한 왕후이 중국 칭화대 인문학부 교수. 왕후이는 ‘20세기 중국’ 개념에 자신의 사유를 집중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범아시아주의는 파시즘이나 공산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파시즘 형태의 범아시아주의를 일본 군국주의가 보여줬다면, 공산주의적 범아시아주의는 중국의 뛰어난 사상가 왕후이가 강력하게 개진하고 있다. 마오주의에 충실하면서도 경제문제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인 그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독점과 시장의 횡포에 대한 저항이 시장에 맞서는 투쟁이라고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 사회적 저항 자체에 공정한 시장경쟁과 경제민주주의를 위한 노력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사회정의와 공정한 시장경쟁을 만들기 위해서는 국가 개입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사회주의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사회주의 민주주의가 국가에 대한 사회의 민주적 통제를 통해 국가가 국내 독점과 다국적 독점의 보호자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시진핑이 개혁을 통해 거대 기업의 독점을 겨냥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오늘날의 중국에서 사회주의 민주주의가 “국가에 대한 사회의 민주적 통제”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민주주의는 존재한 적이 없다. ‘사회’와 ‘당’을 동일한 것으로 놓는다면 중국공산당이 국가를 통제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겠지만 현재의 중국에서 “국가에 대한 사회의 민주적 통제”를 찾아보기는 불가능하다.

왕후이는 사회민주주의가 아시아 문명 전통에 기반해 서구식 다당제 민주주의보다 더 인민의 참여를 보장하는 대안적 사회질서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마오쩌둥, 덩샤오핑, 시진핑의 작업이 쑨원에서 시작해 한국전쟁 개입을 거쳐 최근의 대만과의 통일 시도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해방 과정에 속해 있다고 여긴다. 그러고는 서구가 협소한 시각으로 이 중요한 지점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서구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전체주의 간의 투쟁으로만 본다고 비판한다.

그는 유럽은 국민 ‘국가’로, 중국은 고유한 다문화 ‘문명’으로 사고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중국에서 보고 있는 것은 강력하고 통일된 국민국가를 지향하고 소수민족을 엄격히 통제하며 애국심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경향이다. 오히려 스코틀랜드, 웨일스, 바스크, 카탈루냐가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유럽이 훨씬 더 다문화적이다. 범아시아주의 좌파들은 미국과 유럽은 자본이 통치하고 국가기구가 자본에 복무하지만 중국에서는 국가가 자본을 통제한다고 주장하지만, 사회경제적 권리 측면에서 중국이 아니라 유럽이 훨씬 더 사회민주적이다.

왕후이를 비롯한 범아시아주의 좌파들은 농민과 노동자 등 대규모 인민이 참여하는 이른바 ‘인민전쟁’을 아시아적 해방 운동의 특징이라고 주장하며, 중국혁명, 베트남전, 한국전쟁 때 ‘항미원조’를 인민전쟁의 예로 든다. 그러나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정규군이었던 인민지원군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인민전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현재 다양한 방식으로 정규군을 도와 러시아에 맞서고 있는 우크라이나 시민들이야말로 인민전쟁의 의미에 부합하는 싸움을 하고 있다.

서구가 위선적인 것만큼 중국과 러시아도 위선적이다. 국가별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가짜다. 그들은 이슬람 국가들과 페르시아만의 군주국들도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지만, 이들 국가의 내적 적대는 무시한다. 그러나 이란 시위가 보여주듯이, 국가 내적 적대야말로 제국주의적 보편주의가 아닌 대안적 보편주의의 공간을 열어준다. 시위에 참여하는 이란 시민들에게 동정이나 연대를 표현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란의 투쟁은 우리 모두의 투쟁이다.

번역 김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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