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에의 헌신
[서울 말고]\
[서울 말고] 정나리 | 대구대 조교수
성긴 사회안전망들이 촘촘하게 메워져 가기는커녕 맥없이 뚫려 나가는 걸 매일 아침 뉴스에서 목격한다. 정치생태계를 교란하는 다른 무엇보다, 대의민주주의, 정당민주주의, 선거민주주의, 경쟁민주주의, 관객민주주의, 정확히 뭐라 불러야 할지 난감한,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이 유서 깊은 제도의 필연적 결함이 더욱 뼈아프게 다가온다. 18대 총선(2008년)부터 내 손으로 뽑은 지역구 의원은 단 한명도 없다. 국회의원 300명이 모두 내 마음 같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정치의 장에서 완전히 목소리를 잃고, 멀쩡히 살아있는 채로 ‘지방소멸자’ 취급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식민지배와 독립, 분단과 전쟁을 겪고 수십년간의 독재정권들을 거쳐 어렵게 지금의 체제를 갖추었다. 타국의 지배를 받는 건 단순한 모멸감 이상의 자아분열을 동반했고, 폐허가 된 땅은 냉전의 최전선에서 두동강이 났다. 권위주의 정권의 무력통치는 암울했으나 그와 결탁하는 세력만큼이나 그에 저항하는 시민사회도 성장했다. 분열과 갈등으로 가득한 다층적 현실들을 한데 모아 국회를 구성하는 총선이 1948년 이후 21번이나 있었지만, 여전히 국회와 국민 사이 괴리는 크며, 날 대표한다(represent)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어이없는 모순에 직면한다. 이 체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궁극의 정치행위는 투표인데, 도장 찍는 순간 권력을 통째로 넘기고 닭 쫓던 개처럼 멀뚱히 나를 위해 목소리 내어주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는 취약한 피지배자가 되고 만다.
‘나’는 직업, 성별, 나이, 자산, 거주지역과 같은 ‘피상적인’ 지표만으로 규정될 수 없는 복잡하고 고유한 존재라 그 누구도 나를 온전히 대리할 순 없다. 때론 나로 존재하는 것 외에 어떻게 나를 대변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특히, 그럴듯한 법률용어나 경제지수, 즉 지배자의 언어로 다양한 삶을 재현(re-present)해내는 건, 끝끝내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는 오류투성이 일이다.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부끄러움> 2019)는 표준어와 사투리 모두에 능통했지만, ‘우아한’ 중산층 세계의 언어로 ‘거친’ 노동계급의 세계를 도무지 정당하게 표현할 수 없었다. 자신이 속한 상반되는 두 세계를 ‘화해’시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하물며 5천만 국민을 300명 국회의원이 대체 어떻게 균형 있게 투영하고 대표하여 협의에 이르나, 상징폭력과 소외를 피할 길이 없다.
대표성과 비례성에 내재한 근원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 수 없는’ 타자와의 관계 밖에서 존재할 수 없고, 내 운명은 어느 정도 그들의 손에도 달려있다. 타자에 기대어 내 이름을 기억할 뿐 아니라 호혜적 관계들을 통해 일상을 만들어낸다. 이렇듯 사면초가의 우리 앞에 놓여있는 불가피한 정치적 선택이 대의제라면 국회의 유일한 존재이유는 ‘공공에의 헌신’이고, 그렇다면 그에 특권이 부여될 근거는 없다. 그 자체로 명예로운 책무일 뿐이다.
불가능한 일도, 희귀한 일도 아니다. 타게 엘란데르 전 스웨덴 총리(1946~68 재임)는 재계와 노동계의 꾸준한 대화를 끌어내며, 교육, 주거, 의료, 일과 여가, 노후보장을 총체적으로 책임지는 복지국가를 일궈냈지만, 정작 퇴임 뒤엔 돌아갈 집 한채 없었다. 금욕주의에 가까울 만치 검소한 스웨덴 국회의원들에게 특권이라야, 대중교통 무료이용과 5평 남짓한 국영숙소 정도라고 한다.
가장 성숙한 형태의 대의제를 바란다면, 모든 사적 이해를 내려놓고 선거제 개혁을 향해 신발 끈 질끈 매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애초에 ‘삶의 양식으로서의 민주주의’(존 듀이)를 체화해 지금처럼 우리 안의 어두운 욕망과 관습이 공공의 영역을 점령해버릴 여지를 두지 않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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