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도 보고 싶은 가족들, 그리면서 다시 만났네요”
“눈 한번 떠서 세상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요. 쌍꺼풀 진 눈이 커 다들 이쁘다고 했는데….”
광주 오월어머니집에서 미술 치유수업에 참여했던 5·18유공자 강해중(89)씨는 10일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을 그리는 시간에 내 눈을 그린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1980년 5월23일 광주시 동구 주남마을 앞길에서 공수특전여단 군인들이 쏜 총에 두 눈을 잃고 43년째 빛을 보지 못하고 산다. 그는 마음속 풍경을 그림 그리기 보조 강사에게 이야기한 뒤 색깔을 골라 말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강씨는 가을날 초가집 마당에서 긴 댕기 머리에 한복 차림으로 장대를 들고 홍시를 따던 어린 시절 풍경을 담은 그림도 전시한다.
광주 복합문화공간 메이홀은 10일부터 31일까지 ‘오월 어머니들의 그림농사’라는 주제로 5·18 특별전시회를 연다. 지난 10년간 메이홀 5·18 특별전엔 홍성담, 임옥상, 박불똥, 박재동, 정영창, 김봉준, 이상호 화백 등 쟁쟁한 민중화가들이 참여했으나, 올해 5·18특별전의 주인공은 “5·18 격랑 속에 남편과 자식 등 가족을 잃었던 오월 어머니들”이다. 21명의 오월 어머니들이 그린 200여점의 작품이 메이홀 전시회를 가득 메운다. 임의진 메이홀 관장은 “순수하고 감동적인 그림들은 저마다 사연을 품고 있다. 숨김이나 꾸밈없는 그 진솔함과 단순함, 화사한 치마폭의 온기까지 담겨 있는 작품들”이라고 말했다.
주홍 작가는 지난해 5월부터 1년간 매주 수요일 양림동 오월어머니집(관장 김형미)에서 ‘상처에서 핀 꽃’이라는 제목의 미술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참가자 중엔 과거 다른 단체의 미술 치유 프로그램 경험자도 있었지만, 물감이나 크레파스를 처음 접해본 어머니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들에게 붓을 쥐는 법, 물감 짜는 법부터 가르쳤다.
주홍 작가는 “집에서 걸레질하듯, 김치 담듯, 바느질하듯 점을 찍고 선을 그리고 색칠하면 된다고 말씀드렸다”고 했다. 처음엔 배추·고등어 등 익숙한 소재로 ‘어머니의 밥상’을 그리도록 했고, 차츰 인물·풍경화로 표현 영역을 확장해 갔다. 임의진 관장은 “어머니들이 재미를 붙여 집에서 예습 복습을 하기도 하고, 연습장마다 그린 스케치가 이상 재미나고 생생했다”고 말했다.
어머니들은 수요일이면 그림을 그리며 상처를 치유하는 기회를 얻었다. 5·18 때 세상을 뜬 아들의 딸 손녀를 키우던 어머니가 그린 ‘손녀가 아니라 딸’을 표현한 그림을 보고 함께 눈시울을 붉혔고, 젊은 엄마였던 때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던 순간을 떠올려 그린 그림을 보고 농담을 하며 함께 웃기도 했다. 김형미 오월어머니집 관장은 “수요일이면 함께 모여 요가도 하고, 식사도 함께 하신다. 살아오신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내며 서로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었다”며 “메이홀에서 어머니들을 주인공으로 초대하는 자리를 마련해 줘 감사하다”고 말했다.
5·18 때 남편을 잃고 식당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렸던 정귀순(81)씨는 “파만 다듬던 내가 어떻게 그림을 그려?”라며 미술 수업 초창기엔 ‘나는 못 그린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이젠 “그림 그리는 게 좋다”고 한다. 5·18 시민투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계엄군 진압에 맞서 싸우다가 체포돼 고초를 겪었던 고 허규정씨의 어머니 한양님(92)씨는 ‘아들이 좋아한 매운탕과 달걀’이라는 작품으로 꿈에도 보고 싶은 아들과 다시 만났다. 5·18시민투쟁위원회 기획실장 고 김영철씨의 부인 김순자씨는 “영철씨랑 도시락 싸서 들불야학 야유회 가던 날, 참 행복했다”며 그림의 제목을 ‘찬란했던 날’이라고 붙였다.
5·18 첫 희생자 고 김경철씨의 어머니 임금단(92)씨는 ‘빨간 구두’를 그렸다. 임씨는 “아들은 구두를 손으로 만들던 제화점을 다녔다. 지금도 구두만 보면 큰아들이 생각난다”고 했다. 박순금씨는 ‘오월의 꽃’을 그렸다. 고교 2학년 때 맞은 5·18 때 총상을 당한 아들 고 백두선씨는 1995년 민들레 홀씨처럼 어머니 곁을 훌쩍 떠나 버렸다. 아들이 떠난 후 어머니의 가슴은 뻥 뚫려 무엇으로도 채워지질 않는다. “오월이믄 꽃도 못 보고 살았어. 그림 그릴라고 생각해봉께 민들레가 생각나서 그렸어. 흰 것은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 씨앗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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