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나토 vs 친러시아, 세속주의 vs 이슬람주의···갈림길 선 튀르키예
튀르키예의 운명을 건 대통령 선거가 14일(현지시간) 치러졌다. 이번 대선은 튀르키예의 지난 100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선거로 기록될 전망이다.
개헌까지 불사하며 20년 넘게 철권통치해온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현 대통령이 지진 대응 실패와 경제 위기 등 여러 악재를 딛고 또다시 승리할 경우, 튀르키예는 명백한 ‘21세기 술탄’의 국가가 된다.
반면 ‘튀르키예의 간디’라는 별명을 지닌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공화인민당(CHP) 대표가 승리할 경우 튀르키예는 이슬람 권위주의 국가로의 회귀를 막고, 친서방 노선으로 돌아설 것으로 보인다.
https://www.khan.co.kr/world/mideast-africa/article/202305141203001
경제 실패에 대지진까지, ‘정권심판론’ 먹힐까
철옹성 같던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번 선거에서 최대 고비를 맞았다. 튀르키예 리라화 가치는 2013년에 비해 10분의 1 수준으로 폭락했고, 물가는 지난해 10월 전년 대비 85% 넘게 뛰었다. 인플레이션이 25년 만에 최대치를 찍었는데도 에르도안은 “고금리가 만악의 근원”이라며 저금리 정책을 유지했다. 이에 반기를 든 중앙은행 총재들은 줄줄이 해임됐다.
지난 2월 남동부 지역을 강타한 규모 7.8 강진 피해에 대한 정부의 초기 대응 실패는 정권 심판론에 힘을 실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남부 도시 안타키아의 한 농부는 “지난 두번의 선거에서 모두 에르도안 대통령을 찍었지만, 다시는 그에게 투표하지 않을 것”이라며 “설령 그가 내 아버지라도 찍지 않겠다”고 AFP통신에 말했다. 아일린이란 이름의 유권자도 컨테이너로 만든 임시투표소에서 “국가는 지진이 일어난 후에도 오지 않았다”면서 에르도안과 클르츠다로을루 중 누구를 찍을 지 이미 마음을 정했다고 말했다.
실제 대선 직전 발표된 여론조사에선 클르츠다로을루가 에르도안을 소폭 앞섰다. 에르도안의 대항마로 야권 6개 정당 단일후보가 된 클르츠다로을루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를 닮은 외모와 온화한 성품으로 ‘튀르키예의 간디’ ‘간디 케말’ 등으로 불린다.
여기에 선거를 사흘 앞두고 야권 2위 후보였던 무하람 인제 조국당 대표가 사퇴하면서 클르츠다로을루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전체 인구의 약 20%에 달하는 쿠르드족 표심도 변수가 될 전망이다. 친쿠르드 정당인 인민민주당(HDP)은 이번 대선에서 야당 단일 후보 진영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비공식적으로 클르츠다로을루 후보를 지지하고 있다.
에르도안 승리 시 ‘30년 종신 집권’ 가능
에르도안은 야당이 성소수자를 옹호하고 음주를 용인한다면서 보수 이슬람 신자 등 지지층 결집에 나서고 있다. 또 선거를 앞두고 연금 조기 수령, 최저임금 및 공공 노동자 보수 인상 등 선심성 정책을 쏟아냈고, 5월 한달 동안 가정용 가스를 무상 공급하는 정책도 시행했다.
에르도안이 재집권에 성공할 경우 그는 최대 2033년까지 10년간 더 집권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된다. 에르도안 대통령으로선 지난 20년간 행정·입법·사법부는 물론 사회 전 영역에서 구축한 확고한 통치 기반을 바탕으로 사실상 ‘종신 집권’의 길을 열게 되는 것이다. 2003년 3월 처음 총리직에 오른 에르도안은 3연임을 한 뒤 연임 제한 규정에 부딪히자 2014년 대통령 자리에 오른 후 2017년에는 제왕적 대통령제로 개헌해 지난 20년 동안 철권통치를 이어왔다.
이 경우 튀르키예가 지난 100년간 유지해온 세속주의 이념은 폐기 수순을 밟고, 튀르키예에 이슬람 교리를 기반으로 통치하는 체제가 자리 잡을 수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이면서도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대러시아 제재에는 동참하지 않았던 ‘마이웨이 외교’ 행보도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클르츠다로을루 대표가 에르도안 대통령을 꺾을 경우 튀르키예 정국과 경제·사회 전반은 큰 변화가 불가피하다.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는 이슬람주의 대신 세속주의 이념을 다시 확립하고, 중앙은행의 독립성 회복에 나설 예정이다. 또 제왕적 대통령제를 해체해 의회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것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에르도안이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그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주요 선거에서 결과에 불복하고 재선거를 요구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가 커지자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 12일 인터뷰에서 “패배 시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말했다.
14일 투표에서 승패가 결정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이날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나올 경우 당선이 확정되지만, 어느 후보도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면 2주 뒤인 오는 28일 1, 2위 후보를 대상으로 결선 투표가 치러진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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