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데스크] K의 '헤어질 결심'

김선걸 기자(sungirl@mk.co.kr) 2023. 5. 14.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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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유럽서 질주하는 K기업
중국선 오히려 기대 접고 떠나
우리가 중국 바꿀 카드 없어
'쓴 약' 삼아 새 시장 도전해야

회사 책상 위에 오래전에 산 설화수 선크림이 있다. 햇살 강한 날 가끔 바르는데 맨 윗부분에 세로로 '雪花秀'라는 한자 로고가 선명하다. 영문 Sulwhasoo 표기는 한참 밑에 있고 한글 '설화수' 표기는 뒷면에 조그맣다. 볼 때마다 중국산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최근에 나온 설화수를 보니 앞면에 한자가 없어졌다. 영문 로고가 커지고 디자인은 세련됐다. 서구의 명품 같은 느낌이 든다. 중국과 '헤어질 결심'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중국을 포기한 것은 아닐 것이다. 설화수를 만드는 아모레퍼시픽의 중국 매출은 절정일 때 해외 매출의 80%가량을 차지하다가 50%대로 위축됐다. 급감했지만 중국 매출만 7700억원 규모로 추정된다. 여전히 총 4조4950억원 매출의 17%가량이다. 어떤 기업도 매출의 5분의 1을 올리는 시장을 버리긴 어렵다. 로고를 바꾼 건 예전보다 중국 시장 기대수준을 낮추겠단 뜻일 거다. 뼈를 깎는 심정으로 이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K뷰티, K푸드, K컬처가 유독 중국에서만 고전하고 있다. 미국·유럽·동남아·중남미 할 것 없이 전 세계에서 질주하는 것과 딴판이다. 중국이 통관을 지연한다거나 한한령 2탄이라는 소문도 돈다.

K기업들이 하나둘 중국을 떠나고 있다. 사드(THAAD) 배치를 빌미로 롯데 등 한국 기업에 화풀이를 했을 때도 견뎠던 기업들이다. 이젠 미련 없이 등을 돌리는 분위기다. 중국에 진출한 우리 외식 브랜드는 2020년 69개에서 2021년 49개, 2022년 36개로 2년 만에 반 토막이 났다(농수산식품유통공사 보고서). 탈중국 이유론 중국의 불확실성 때문이란 대답이 압도적이다. 하긴 롯데 같은 대기업도 견딜 수 없는 판에 작은 기업들은 어떨까.

롯데는 중국 시장에서의 손실만 2조원이라는 추정이 나왔었다. 그런데 롯데 관계자들은 "중국과 절대 비즈니스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은 것에 비하면 싼 비용"이라 말한다. 더 견뎠다면 피해만 커졌을 거란 뜻이다.

중국은 시진핑 1인 독재로 들어섰고 전체주의 성향도 강화되고 있다. '애국소비(궈차오)'가 대표적 사례다. 서구 선진국 기준에선 황당한 규제도 많다. 예를 들어 최근 중국 약품감독관리국(NMPA)은 화장품조례를 발표하면서 제품을 구성하는 모든 원료를 등록하는 외에도 원료 공급업체명과 공급받은 원료의 제품명 및 공정정보까지 등록하도록 했다. 맛집 식당에 레시피는 물론 식재료 구입처와 요리방법까지 영업비밀을 요구한 셈이다. 동물실험과 인체실험 요구도 기준이 자주 바뀐다.

일각에선 우리가 저자세를 보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하긴 중국에 가서 수행단이 집단폭행을 당하고 혼밥을 먹고서도 '중국은 큰 봉우리, 작은 나라인 한국도 중국몽에 함께하겠다'고 읊조린 대통령도 있었다. 효과를 봤을까. 그런 저자세 외교 몇 년은 중국이 한국을 더 깔보고 멋대로 행동하게 만들었다. 국제정세에 무지하고 중국체제에 환상을 지닌 정권의 외교 5년이 지금 기업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거나 적어도 방임했다는 해석이다.

긍정적인 시각에서 오히려 K상품들에는 중국의 몽니가 한 단계 도약하는 '쓴 약'이 될 거란 생각이 든다. 실제 아모레퍼시픽 실적을 분석해보니 아직 비중은 작지만 작년에 북미와 유럽에선 매출이 83%, 37%씩 증가했다. K푸드 대표기업들도 구미 지역 진출이 눈에 띄게 늘었다. 중국 시장에 미련을 버리고 대체 시장 개척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결과다. 한층 더 독한 경쟁력을 지닌 K기업들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중국 시장을 포기하잔 말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이제 쉽게 돈 버는 시장은 아니란 건 알아야 한다. 중국의 제멋대로 행동을 바꿀 수 있는 우리의 카드는 아직 없다. 오래 참을 걸 각오해야 한다. K기업들이 중국 대신 선진국을 대체 시장으로 만들고 나면 K기업의 역량은 한층 커질 것이다. 그리고 중국 소비자들은 그제서야 태도가 바뀔 것이다.

[김선걸 부국장 겸 컨슈머마켓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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