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들고 우크라이나 전장에 간 노철학자 “전쟁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다”
“전략적 중요성이 없는 도시를 폭격하는 미친 전쟁” 슬라바>
“이것은 우크라이나에 관한, 우크라이나와 함께하는, 그리고 우크라이나를 위한 영화입니다.”
지난 11일(현지시간) 저녁 미국 워싱턴 시내의 한 영화관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영화 <슬라바 우크라이니>(Slava Ukraini)의 특별 상영회.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앙리 레비(75)가 말을 마치자 객석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레비가 마크 루셀과 공동 연출한 이 영화는 지난해 9~11월 석 달간 우크라이나에서 목격한 전쟁의 참상을 담고 있다.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공습 사이렌이 울리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이어가고, 군인들은 내일이면 서로를 만나지 못할 것을 알면서 잠에 든다. 아파트와 놀이터 등 민간인 거주지역마다 폭격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러시아군으로부터 되찾은 도시들에서도 승리의 기쁨보다는 불안이 도사린다.
레비는 수도 키이우와 요충지 오데사와 헤르손, 격전지 바흐무트, 남부 자포리자 원전, 러시아에 인접한 슬로비얀스크 등 10여곳을 직접 찾았다. 전쟁 이후 아이와 함께 지하에서만 생활해 온 여성, 일흔 번째 생일 파티를 열 수 있을지 걱정하는 노인, 포위된 시민들에게 보낼 구호물품을 포장하는 노동자들, 프랑스에 신속한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우크라이나 국방장관, 다국적 국제의용대원들 등 전쟁의 ‘다양한 얼굴’을 기록했다.
영화 중간중간 레비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그는 “적군이 아무런 군사적, 전략적 중요성도 없는 도시를 폭격하는 이 미친 전쟁은 무엇인가”라고 개탄한다. “과연 이 전쟁이 우리의 전쟁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인가”라고 되뇌이기도 한다.
레비는 영화 상영 후 앤 애플바움 ‘디애틀랜틱’ 기자와의 대담에서 영화를 만든 이유에 대해 “전쟁 장기화에 따른 냉소주의와 피로증,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국가·민족)정체성이 가짜라는 러시아의 프로파간다와 싸우기 위해서”라며 “나는 에세이와 소설을 쓰는 철학자이자 작가이지만, 영상만이 우크라이나인들이 받아 합당한 예우를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타자의 얼굴과의 만남을 존재론의 핵심으로 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를 인용해 “그의 제자로서 전쟁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전쟁을 좋아하지 않지만 잘 수행하는 이상한 영웅들을 조명하고 싶었다”고도 했다.
철학 연구보다 세계 분쟁 현장을 기록하는 저널리스트로 더 많은 시간을 보낸 레비는 몇 년 전에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바 있다. 그는 “우크라이나인들은 그들 안의 위대함을 찾아냈다”며 “시민들이 집합적으로 영웅적이지 않았다면 우크라이나의 처칠(젤렌스키)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해선 “푸틴은 역사의식이 없고 책도, TV도 보지 않는다. 지구상 최악의 체스 플레이어이자 전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물”이라며 “푸틴이 이긴 유일한 전투는 오로지 공포의 전투 뿐”이라고 비판했다.
95분짜리 영화는 짜임새 있는 작품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명품 수트에 방탄조끼를 걸친 레비가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에게 던지는 질문도 때로는 피상적으로 들린다. 그럼에도 군인들과 참호 아래로 직접 내려가 대화를 나누거나, 강 하나를 마주하고 러시아 저격수가 겨누고 있는 최전방까지 가는 위험을 감수한 레비의 진정성만큼은 탓하기 어렵다. 좌·우파 모두로부터 공격받아온 논란의 철학자인 그가 서구의 어느 지식인도 하지 않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이날은 5월 초부터 로스앤젤레스, 필라델피아, 시카고, 뉴욕 유엔본부, 미 의회 등에서 진행된 미국 순회 상영회를 마무리하는 자리였다. 약 250석 규모의 상영관을 가득 메운 관객 상당수는 우크라이나계 미국인이었다. 상영회에 레비와 함께 참석한 아조우스탈 제철소의 ‘전사’가 “슬라바 우크라이니”(우크라이나에 영광을 이라는 뜻)라고 인사하자 관객들은 “헤로얌 슬라바”(영웅들에 영광을)라고 화답했다. 레비가 “진정으로 전쟁을 멈추고 발트해 국가들이 안전한 세상이 되려면 (러시아가 병합한) 크름반도는 우크라이나에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자 환호를 보내기도 했다.
워싱턴 | 김유진 특파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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