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써보는 나의 마지막 순간 ‘엔딩노트’…용산구 청춘학교
‘가족들에게 전하는 말 : 슬퍼하지 말고 잘 보내주렴, 장례 절차 : 간소하게.’
서울 용산구에 사는 유경임씨(69)가 유언장을 써 내려갔다. 인생에서 가장 기뻤을 때와 슬펐을 때, 기억에 남는 10가지 장면, 좋아하는 음식과 색깔, 영화, 책, 취미와 특기도 떠올렸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남길 한 마디씩도 적었다.
지난 8일 오후 서울 한남동 용산구평생학습관에서 열린 ‘청춘학교’에 참석한 어르신들이 미리 써 보는 ‘엔딩노트’를 채워갔다. 건강하고 존엄하게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준비하기 위해 4월부터 주민 30여명이 하루 2시간씩, 엿새간 총 12시간을 이어온 수업 마지막 날이었다.
건강한 몸을 위한 식이요법, 뇌를 자극하는 손동작 등 신체 관리 수업, 자신의 우울증과 타인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해결되지 못한 과거를 인식하는 감정 수업을 거쳐 이날은 실제 죽음과 마주했다. 연명의료·장기기증 결정과 호스피스에 대해 배우고 자기 죽음을 알리는 부고장을 써봤다. 장례는 어떻게 치르면 좋을지 각자 생각하는 시간도 가졌다.
유씨는 “유산, 유서 등 실제로 준비하는 방법을 배워 유익했다”고 말했다. 암 투병으로 호스피스까지 들어갔던 그는 완치 후 5년간 생활하다 암이 재발해 7년째 추적 관찰 중이다. “암센터에 있을 때 3개월밖에 안 남았다고 했지만 (병원에서 말한 기간보다) 오래 산 사람도, 너무 얼른 간 사람도 만났어요. 사는 동안 잘 살아야죠. 남에게 베풀 수 있을 때, 내가 힘들어도 무엇인가 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요.”
그는 엔딩노트를 적으며 또래 친구들이 가장 많이 떠올랐다고 했다.
엔딩노트에는 유언장과 부고, 묘비 등에 들어갈 내용을 정하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여러 번 생각하고 연습한 뒤 써보려고 한다며 노트를 한 권 더 받은 남상욱씨(72)는 “삶을 정리하는 측면에서 많이 돌아봤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도 후회되는 일들이 있잖아요. 평소 말도 못 했던 것들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자식들에게 남겨줘도 되도록 정리해서 써보려고 합니다.”
수업을 진행한 이미경 강사는 “죽음은 실질적인 준비가 필요하다”며 “스마트폰에 남은 수많은 기록, 입지는 않고 보관만 했던 옷가지뿐 아니라 재산과 상속 등을 구체화할수록 잘 대비해서 마무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노년과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자는 취지로 마련된 청춘학교는 수업 대상을 만 65세에서 만 55세 이상으로 확대했다. 이에 80대(8명)부터 70대(9명), 60대(16명), 50대(5명) 등 다양한 연령대가 공부하는 자리가 됐다. 최고령 86세, 평균 연령은 70세다.
용산구 관계자는 “평생학습관에 다니는 주민 조사에서 가장 요청이 많았던 시니어 교육을 시리즈로 엮은 것이 청춘학교”라고 설명했다. 강의 내용은 한국실버교육협회 강사들이 전문적으로 구성했다고 한다.
이날 수업 마지막은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모두가 한목소리로 읊으며 끝이 났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청춘학교는 이번 건강 수업을 시작으로 재무 관리와 자녀·동기간 소통 등의 프로그램으로 이어진다.
김선수 용산구청장 권한대행은 “나이 들어가는 것은 개인의 일이 아닌 공동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라며 “고령층이 배우고 나누며 주변과 능숙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김보미 기자 bomi8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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