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동 터줏대감’ 43년 이발사의 금손, 이제 쉬러 갑니다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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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오후 3시 서울시 마포구 망원동 57번지 한 모퉁이에서 특별한 길거리 은퇴식이 열렸다. 40년 넘게 ‘망원동 터줏대감’으로 일흥이발소를 지켜온 이발사 박정은(82)씨가 67년 만에 가위를 내려놓는 날, 이웃 주민들과 망원동 청년회가 이발소 앞에서 깜짝 은퇴식을 준비한 것이다. 박씨는 지난해 5월 구강암 수술을 받고 건강이 악화되자 이발소 문을 닫기로 결심했다. 이를 아쉬워한 주민들과 단골손님 등 20~30명이 모여 박씨의 은퇴를 축하했다.
1981년부터 박씨가 꾸려온 7평짜리 일흥이발소 내부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158㎝인 박씨가 키 큰 손님들의 앉은키에 맞추려 직접 만든 10㎝ 굽의 나막신과 물 데우는 용도의 연탄, 물을 길어다 쓰는 실내 작은 우물까지…. 낡았지만 깔끔한 작은 공간에는 박씨의 외길 인생이 녹아 있었다.
6남매 중 장남인 박씨는 1956년 16살 무렵 광주광역시 순천이발관에서 처음 가위를 잡았다. 좁쌀죽으로 끼니를 때우던 시절이었다. 그는 “공부해서 역사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가난해서 꿈도 못 꿨다. 젊을 때 손이 빨라서 가위를 잡게 된 뒤 지금까지 계속 이 일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일이 흥하기를’ 바라며 지은 이발소 이름처럼 바쁘게 살았다. 하루 12시간 넘게 일하며 많을 땐 손님 40명의 머리를 깎았다. 박씨는 “자식들은 대학도 보내고 따뜻하게 키우고 싶어 열심히 일했다”고 했다.
이날 망원동 청년회는 박씨가 가장 아끼는 가위에 일을 시작한 날짜(1956년 10월23일)와 이름을 각인해 감사패를 만들어 전달했다. 망원동 주민인 정민수(31) 헬스장 트레이너는 박씨의 마지막 ‘커트’ 손님이 됐다. 뒷머리를 ‘바리캉’으로 손질 받은 정씨는 “영광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박찬희(28) 망원동 청년회장은 “망원동은 젊은이들이 새로운 문화와 공간을 만들어서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는 오래된 가게들이 있어 정감 가는 동네가 됐다”며 “동네를 지킨 어르신들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 은퇴식을 준비하게 됐다”고 말했다.
망원동 주민인 허지은(30) 현대무용가는 박씨 애창곡인 남진의 ‘님과 함께’ 노래에 맞춰 헌사 무용을 선보였다. 박씨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는 게 평생소원이었지”라며 “없이 살아서 (이 노래가) 내 희망가였다”고 말했다. 박씨는 청년들에게 “‘고진감래’라는 말을 좋아한다. 외롭고 힘들어도 참고 견디고 헤쳐 나가세요”라고 말했다. 막걸리잔을 든 박씨의 건배사도 이어졌다. “오늘 이 순간을 위하여, 내일의 희망을 위하여!”
박씨의 은퇴식엔 주민들과 단골손님들부터 멀리서 찾아온 시민들도 있었다. 40년 가까이 일흥이발소만 찾던 옆집 세탁소 사장 이승환(66)씨는 “(닫는 게) 섭섭하지만, 형님 몸 관리하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어쩔 수 없다”면서도 “항상 내가 원하는 스타일대로 잘해줘서 줄곧 여기서 머리 했는데 이제 어디 가서 머리를 해야 하나 걱정”이라고 말했다. 소셜미디어에서 소식을 접한 김태인(54·서울 성북구)씨는 “할아버지와는 일면식도 없지만, 평생 한 일만 쭉 하시다가 은퇴를 하신 것도 대단하고, 젊은 친구들이 존경의 마음을 담아서 은퇴식을 준비한 게 감동적이어서 직접 왔다”고 말했다.
이발소 앞에서 케이크집을 운영하는 이해명(43)씨는 “매일 새벽 6~7시면 앞마당을 쓸고, 저희한테 항상 열심히 해야 한다며 좋은 말씀을 해주신다. 항상 검소하시고 부지런한 모습을 보면서 좋은 어른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일흥이발소는 ‘마음 이발소’라는 이름으로 6월 초에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다시 문을 열 예정이다. 주민 방현주(49) <문화방송>(MBC) 전 아나운서는 “세탁소·빵집·꽃가게가 있는 이 길을 따라 펼쳐지는 풍경이 너무 좋아서 이발소가 있는 1층을 인수하게 됐다”며 “외관도 그대로 두고 안에 있는 우물과 연탄도 그대로 쓰면서 동네 분들과 소통하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다.
윤연정 기자 yj2gaz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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