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친구 있냐’던 악의 없는 질문…‘매운맛’ 한국도 ‘순한맛’으로 변하네요

이주빈 2023. 5. 1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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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앰네스티·〈한겨레〉 협업기획 ‘미워해도 소용없어’
③퀴어 인플루언서 조나 아키
‘미워해도 소용없어.’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지난해 5월17일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아이다호데이)을 맞아 내 건 문구다. 해당 문구는 같은 해 퀴어퍼레이드에서도 사용되며 성소수자와 앨라이(ally·성소수자 인권 지지자) 공감과 반응을 끌어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올해 ‘미워해도 소용없어 2023’ 캠페인을 시작한다. 지난해 캠페인이 혐오와 차별에 대항하는 성소수자·앨라이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자신을 긍정하며 현재를 사는 모습에 주목한다. 〈한겨레〉도 이 캠페인에 동행했다. 시리즈는 17일까지 총 6차례 계속된다.
댄서이자 안무가,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인 조나 아키가 5일 서울 동작구 한 연습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제공

“지금 역은 강남, 강남역입니다.”

해금 소리가 구수한 지하철 환승 음악 ‘얼씨구야’가 배경음악으로 흐르자, 트레이닝복 차림을 한 외국인 남성이 트월킹(엉덩이를 흔드는 춤)을 한다. 배경화면은 서울 지하철 내부를 합성한 모습이다. ‘지하철 댄스’로 화제가 된 이 영상의 조회 수는 무려 500만이 넘었다.

영상 속 주인공은 조나 아키다. 댄서이자 안무가인 그는 브라운 아이드 걸스, 현아, 보아 등의 안무를 담당해 왔다. 현재도 걸그룹 앨리스의 안무를 맡고 있다. 그가 춤 영상을 올리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구독자는 2만7천명이 넘는다. ‘지하철 댄스’ 영상이 화제가 된 뒤, 그는 서울교통공사의 협조를 받아 역사 내부에서 춤을 추기도 했다.

그가 한국에 온 건 10년 전인 2013년 2월4일이다. 그의 생일이었다. 한국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그가해외 경험을 쌓을 곳으로 가장 먼저 떠올린 나라였다. 2009년 케이(K)팝 열풍을 접한 뒤 조나는 원더걸스, 브라운 아이드 걸스 등 한국 대중음악을 즐겨 들었다. 대학에서 한국어를 부전공했다. 한국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한국에 온 뒤 영어 강사로 생활했지만, 자신을 표현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미국에서 고등학생 때 댄스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조나는 춤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로 했다. “고향이 하와이예요. 엄마가 하와이에서 훌라 춤을 추는 댄서였어요. 그 영향으로 저도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일 줄 알게 됐어요. 춤을 추면 어떤 문제가 있어도 잊을 수 있어요”라고 그가 말했다.

그의 ‘본캐’(본래 캐릭터)가 댄서라면, ‘부캐’(본캐가 아닌 또다른 캐릭터)는 ‘퀴어 인플루언서’다. 그는 퀴어(성소수자) 문화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유튜브 채널 ‘네온밀크’의 구성원이다. 미국에서 성 정체성을 숨김없이 공개하는 ‘오픈리 게이’(openly gay)로 살던 그에게 한국에서의 생활은 말 그대로 ‘매운맛’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그에게 ‘악의 없지만 당황스러운’ 질문들을 했다. ‘여자친구 있느냐’, ‘어떤 여자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이다. 남성은 당연히 여성을 좋아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질문들이다. 조나는 자신의 정체성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체감했다. “한국에 오자마자 ‘클로짓(성적 지향을 숨기는 것)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난 게이야” “난 친절해” “난 재능있어”. 그는 자신을 이렇게 설명했다. 10대 때 아우팅(타인에 의해서 성적 지향이 강제로 공개되는 것)으로 커밍아웃하게 됐지만, 오히려 더 당당해졌다. 그가 “이왕 이렇게 된 거 사람들에게 거짓말하지 말고 나에게 솔직하게 살기로 했어요”라고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라고 또박또박 말하는 그의 한국 발음이 귀에 꽂혔다.

‘내리실 때 사랑 빠짐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지하철 댄스 영상에 적힌 이 문구처럼, 조나는 8년째 사랑에 빠져 있다. “한국에서 이렇게 오래 살게 될 줄은 몰랐어요. 10년째 한국에 머무는 이유는 사랑 때문”이라고 했다. “모든 사람이 살면서 한 번쯤 사랑을 경험해 봤으면 좋겠어요. 그보다 좋은 건 없기 때문이에요.”

그의 연인은 8년 전 만난 밤비 네온밀크 대표다. 둘은 3년 전 결혼을 약속했다. “하루는 그냥 얘를 보고 있었는데, 결혼한다면 얘랑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조나는 유튜브 네온밀크에 2020년 1월 업로드된 ‘게이 커플 프러포즈했어요’ 편에서 약혼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댄서이자 안무가,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인 조나 아키가 5일 서울 동작구 한 연습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제공

조나는 밤비와 결혼할 계획이다. 결혼식은 조나의 고향인 미국에서 한번, 또 밤비의 고향인 한국에서 한번씩 할 생각이다. 조나와 밤비는 “한복을 입고 결혼하고 싶다”고 할 만큼 한국에 애정이 있지만, 한국의 제도는 아직 이들을 포용하지 못한다. “8년 동안 사귀었지만, 우리는 한국에서 결혼할 수 없어요. 혹시 응급실에 가야 할 상황이 생겨도 (내가 밤비의, 밤비가 나의) 보호자가 될 수 없어요. 그게 가장 걱정이에요.”

다만 조나는 사람들의 인식이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끼고 있다고 했다. “최근에는 ‘여자친구’를 언급하는 질문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아예 그런 단어 자체를 말하는 사람이 줄었어요. 그리고 이젠 남자친구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얘기해요. 작은 부분이지만 사회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느껴요.”

조나는 2015년부터 꾸준히 유기견을 임시보호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데, 유기견 쉼터에서 처음 강아지를 데려올 때 밤비와의 관계를 ‘동거인’이라고 적었다. 몇 년 후에는 ‘남자친구’로, 최근에는 ‘약혼자’라고 바꿔 썼다. 그는 “쉼터 직원들이 ‘아빠가 두 분이네요’라고 말하며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더라”고 했다. 둘의 관계가 깊어지는 동안 사회의 이해도 높아진 셈이다.

“사람들이 나를 미워한다면, 그 이유는 나를 잘 모르기 때문일 거예요. 아마 우리가 서로 잘 알게 되면, 잘 이해하게 되면 그 미움은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런데도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떡할까. 그는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미워해도 소용없어. 나는 완벽하니까.”

이주빈 기자 y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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