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맥주 한 잔에 여행길 갈등이 싹! [ESC]

한겨레 2023. 5. 1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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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지구를 지키는 여행]지구를 지키는 여행 오스트리아
독일에 영향 준 라거의 고장 빈
엄마와 처음 함께 간 외국여행지
생맥주에 피로 가시고 화해까지
빈에서 마신 오타크링거 맥주. 180년 역사의 오타크링커는 지속 가능한 맥주 생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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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라는 두 글자를 평생 가슴에만 품고 산 엄마와 2017년에 떠난 첫 외국 여행지는 오스트리아였다. 엄마에게 내가 먼저 만나본 세상을 더 많이 보여주려 했던 욕심 탓에 우린 나란히 길을 걷다가도 자주 멈춰 다퉜다. 십자군 전쟁 당시 불에 탄 흔적이 남아 있는 성당에서,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앞에서, 알프스산맥이 평화롭게 펼쳐진 기찻길에서 장소 상관없이 서운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날카로워진 감정을 무디게 해주고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시원하게 눌러준 중재자는 함께 있던 동생이 아닌, 맥주였다.

1차대전 때 파괴된 양조 산업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머무는 동안, 신고딕 양식으로 건축된 시청 앞 라트하우스 광장에서는 필름 페스티벌이 한창이었다. 필름 페스티벌은 오페라부터 대중음악까지 다양한 음악 공연을 선보이는 이 도시의 대표 축제. 해가 저물면 광장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앞에 앉아 음악 관련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음악이 있는 곳에 음식을 빼놓을 수 없는 법. 광장에는 세계 각국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부스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하루의 종착지는 이 광장이었다. 점원이 생맥주를 뽑아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벌컥 들이켰다. 잔에 있던 맥주의 반이 순식간에 사라지면 하루의 피로가 함께 녹아내렸다. 맥주 덕에 긴장이 서서히 풀리면서 엄마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 아까 짜증 내서 미안해.”

치퍼 맥주와 안주. 하이네켄 그룹과 합병한 치퍼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대중적인 맥주 브랜드다.

매일 저녁, 라트하우스 광장에서 서먹한 모녀의 대화를 부드럽게 이어준 맥주는 ‘치퍼’였다. 짙은 갈색의 가벼운 라거를 주로 생산하는 치퍼는 오스트리아의 레스토랑이나 마트에서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브랜드다. 빈의 마지막 날 밤, 어김없이 점원에게 ‘지퍼 1 크뤼게를’(오스트리아의 500㎖ 단위)을 주문했다. 매일같이 찾아와 라거를 주문하던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던 그는 차가운 맥주를 건네며 “라거를 좋아하는 것 같네요. ‘비엔나 라거’를 맛본다면 좋을 텐데”라고 말했다.

알고 보니, 빈은 라거 양조가 성행했던 도시였다. 빈 근교의 슈베하트 지방에서 작은 양조장을 운영하던 안톤 드레허는 직접 열을 가해 구운 맥아와 오스트리아가 자랑하는 맑고 단단한 물(경수)로 비엔나 스타일 라거를 개발했다. 맥아의 쓴맛과 단맛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비엔나 라거는 당시 독일 맥주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인기가 많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오스트리아의 양조 산업도 함께 파괴됐다. 전쟁 이후에는 유럽 맥주들의 쟁쟁한 경쟁에서 뒤처지며 현재는 본토에서도 전통 양조 방식을 따르는 양조장을 찾아보기 어렵다. 재미있는 점은 멕시코에서 비엔나 라거의 원형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1860년 멕시코로 건너간 오스트리아 양조사들이 고향의 전통 양조법으로 맥주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비엔나 라거가 뿌리 박혔다고 전해진다.

요즘 몇몇 오스트리아 양조장에서는 잊혀가는 전통 비엔나 라거 양조법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오스트리아 관광청 자료를 보면, 180년 역사를 가진 오타크링거 브루어리는 전통 양조법으로 맥주를 직접 생산하고 맛보는 워크숍을 진행하며, 양조장과 브루펍을 운영하는 지벤슈테른브로이도 전통 양조법을 소개하고 있다.

전쟁 뒤 다시 문을 열다

모차르트가 빈에 와서 완성했다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처럼 우아하고 유쾌한 도시, 빈에서 오버트라운으로 향했다. 오버트라운은 관광지로 잘 알려진 할슈타트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마을로, 맑고 청아한 할슈타트 호수를 함께 끼고 있다.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알프스의 신선한 산들바람이 온몸을 간질였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북알프스의 다흐슈타인산이 두 눈에 가득 찼다. 역부터 숙소까지는 걸어서 약 20분 거리. 알프스 기슭 아래 자리한 이 마을처럼 바람 잘 날 없는 엄마와 나는 그 20분을 못 참고 또 다투고 말았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호스트 릴리가 체크인을 도왔다. 그는 저녁 무렵 운영하는 레스토랑이 딱 한 곳이라, 꼭 예약을 해야 한다며 재촉했다. 버터색으로 칠해진 예쁜 집을 구경하거나, 엄마와 화해할 틈도 없이 우리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알아듣지 못하는 독일어 음성으로 가득 찬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맥주부터 주문했다. 생맥주를 달라고 했더니, 할슈타트의 명물이라는 ‘다스 비어’가 나왔다. 다스 비어 역시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운영을 중단했다가 약 100년 뒤 할슈타트 마을의 전통 맥주를 보존하기 위해 다시 문을 열었다. 라거처럼 짙은 색을 띠고 있지만 끝맛에서 꽃내음이 느껴졌다. 맥주 맛에 대한 소감을 나누다 보니 차가웠던 테이블의 공기가 훈훈해졌다.

사실 오버트라운에 머무는 동안 가장 많이 마셨던 맥주는 ‘슈티글’이다. 맥아의 쌉쌀한 맛보다는 단맛이 강조된 맥주로, 할슈타트 호수에서 수영하고 난 뒤 가볍게 마시기 좋았다. 슈티글은 옆 동네 잘츠부르크에서 설립된 맥주 브랜드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1492년 양조 역사가 시작됐다. 한 나라가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동안, 슈티글은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개인 소유 브루어리가 되었다.

이 나라는 영원한 건 없다는 듯 내게 말을 건넸다. 전쟁으로 문 닫았던 양조장이 금세 운영을 재개한 것처럼, 폐허 직전의 도시가 예술 문화로 다시 활기를 얻기 시작한 것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엄마와의 냉전도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끝나버린 것처럼.

오스트리아의 지속 가능한 포인트
오스트리아 관광청 누리집에서는 오스트리아 맥주 타입과 사이즈를 고르고 주문하는 방법부터 전국 곳곳 유서 깊은 양조장들까지 소개하고 있으니 참고해보자.
모차르트의 도시, 잘츠부르크에는 슈티글 맥주 박물관이 있다. 1492년부터 지금까지 기록된 양조장 운영 방식, 밀을 재배하는 방법, 양조법 등을 배우고 맥주까지 시음할 수 있다. 재생에너지로만 가동되는 유럽 최초의 양조장 무라우어 비어의 맥주도 추천한다. 2017년 세계 맥주 어워드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글·사진 박진명 <피치 바이 매거진> 에디터

지속 가능한 여행 매거진을 만든다. 현지에서 만든 음식을 맛보며 탄소 발자국을 최소화하는 여행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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