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의 ‘중동 대전환’…미국이 다급해졌다
사우디발 지정학적 지진파
우크라 전쟁 뒤 대러 제재 이탈
중국 중재로 이란과 국교 정상화
‘반이란’ 미국과 공동전선 ‘흔들’
미 “관계 강화 논의” 사우디에 구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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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발원한 지정학적 지진이 중동의 세력판도 변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3월 중국이 중재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국교 정상화 이후 미국 등 서방이 후원하는 사우디 주축의 수니파 동맹 대 중국·러시아와 우호적인 이란 주도의 시아파 연대 사이의 지정학적 대결 구도가 급속히 허물어지고 있다.
이란과 ‘화해’한 사우디는 중동에서 새로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우선 시리아가 국제무대로 복귀했다. 2011년 아랍의 봄 때 반정부 시위 탄압과 내전으로 아랍 및 국제사회에서 축출된 바샤르 아사드 정권의 시리아가 지난 7일 아랍연맹(AL)에 복귀했다. 사우디와 시리아는 지난 9일 대사관을 다시 연다고 발표했다. 시리아 내전은 사우디가 이란의 시아파 연대 일원인 아사드 정권을 붕괴시키려고 반군들을 지원하면서 격화했다. 비인도적인 아사드 정권을 용인한다는 비판도 비등하지만, 아사드 정권의 국제사회 복귀는 중동의 고질적 분쟁 해결에 긍정적 측면도 있다.
둘째, 예멘 내전의 평화적 해결 모색이다. 사우디는 지난달 9일 예멘 수도 사나에 대표단을 파견해, 후티 반군과 평화협상에 나섰다. 사우디는 시아파의 한 분파로 이란이 지원하는 후티 반군이 2015년 사나를 점령하자, 정부군을 지원하며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사우디는 후티 반군이 장악한 예멘을 자신의 남쪽 국경에 큰 안보 위협으로 판단했다. 사우디는 이제 이란과 관계를 정상화하면서 예멘 내전에서도 발을 빼고 그 리스크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셋째, 팔레스타인 내부 분쟁의 중재다. 지난 4월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고위 지도자들은 메카 성지순례를 했다. 이틀 뒤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제다에서 회동했다. 사우디는 팔레스타인 쪽과 관계가 썩 좋지 못했다. 특히, 이란의 지원을 받는 이슬람주의 세력 하마스에는 적대적이었다. 사우디는 하마스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한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하마스 사이의 분쟁 중재에 나선 것이다.
말썽꾼 사우디가 중재자·협상자로
최근 발발한 수단 내전은 사우디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사우디는 내전의 한 당사자인 모하메드 함단 다갈로의 ‘신속지원군’(RSF)을 예멘 내전에 개입시키는 등 수단에 영향력이 크다. 사우디는 지난달 수단 정부군과 신속지원군 사이의 일시 휴전과 연장을 중재하는 등 양쪽의 협상을 주도하고 있다.
또, 사우디는 수단에 해군 함정을 보내서 이란인을 포함한 수천명의 외국인을 소개하는 인도적 지원을 주도했다. 제다에 도착한 65명의 이란인들이 따뜻한 환대를 받는 장면, 그리고 사우디 여성 군인이 아이를 안고서 함정에서 내리는 장면은 사우디의 달라진 모습을 상징했다. 분쟁에 개입하고, 인권을 탄압하던 말썽꾼 이미지였던 사우디가 이제 중재자와 협상자로서 변모하고 있다고 <시엔엔>(CNN)과 <파이낸셜 타임스>는 평가했다.
사우디의 무함마드 왕세자는 2015년 국방장관에 취임하면서 예멘 내전 개입, 카타르 금수, 레바논 총리 구금 등 강경한 대외정책을 주도했다. 2017년 왕세자가 된 그는 이란 국제핵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함께 이스라엘·아랍에미리트연합(UAE)·바레인과 수교한 아브라함협정을 주도했다. 대이란 전선 강화에 이스라엘까지도 제휴하려고 한 것이다.
예멘 내전 개입의 후과는 2019년 9월 예멘 후티 반군의 석유시설 공격으로 나타났다. 예멘 반군의 미사일과 드론이 미국의 방공망을 뚫고 사우디를 공격해 석유 생산량을 절반까지 떨어뜨린 것이다. 이 사건은 사우디가 처한 안보 상황과 미국의 역할을 재고하게 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예멘 내전 개입과 2018년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을 비난하자, 양국 관계는 급속히 악화했다. 2022년 2월에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전환점이 됐다. 사우디는 미국의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을뿐더러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했다.
사우디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자신의 최대 무기인 석유 파워를 최대한 행사하는 쪽으로 외교 노선을 전환했다. 전쟁으로 석유값이 급등하자 미국은 증산을 요구했지만 사우디는 오히려 감산을 주도했다. 거대 산유국 중 하나인 러시아와 공조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사우디가 미국 일변도 대외정책에서 탈피하려면, 중국과의 관계 개선도 필수적이었다. 지난해 12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사우디 방문과 아랍정상회의 참석은 중동에서 중국 외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석달 뒤 중국은 사우디-이란 국교 정상화를 중재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이 이란을 통제하지 못하자 사우디가 중국을 잡은 것이다. 사우디는 이란과 우호적인 중국을 통해서 관계 정상화를 하는 것이 대이란 관계에서 확실한 보장이라고 봤다.
중동에서 발 빼려던 미국의 ‘귀환’
사우디가 이렇게 움직이면서 중동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반면 미국의 입김은 줄어들고 있다. 사우디와 이란의 역내 주도력도 커지고 이스라엘의 입지는 축소되고 있다. 사우디가 주도하고 이스라엘까지 참여한 반이란 동맹인 아브라함협정의 중요성도 떨어지게 됐다.
미국으로서는 이란과의 국제핵협정 복원의 지렛대도 약화되고, 이란을 제어할 아랍 국가와의 연대력도 떨어지는 상황에 직면했다. 자신의 영향력을 온존시킨 채 중동에서 발을 빼고 인도·태평양에서 대중전선을 강화하려는 미국의 대전략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제이크 설리번 미 안보보좌관이 지난 7일 전격적으로 사우디를 방문해 무함마드 왕세자를 만나 “양국의 전략적 관계와 관계 강화 방법들을 논의”한 것은 미국의 다급한 사정을 말해준다. 설리번은 인도와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안보보좌관들과도 회동해, 인도에서 사우디를 잇는 철도 등 대형 기반시설 건설을 제안했다. 미국은 중국의 ‘일대일로’에 맞서, ‘이스라엘·인도’(I2)와 아랍에미리트를 아우르는 ‘I2U2’라는 다자협의체를 준비하고 있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도 오는 6월 사우디를 방문해, 공급망, 교통 기반시설 개발, 석유 추출 등을 논의한다고 <블룸버그>는 보도했다.
사우디에서 발원한 지정학적 지진파를 감지한 열강은 다시 중동으로 몰려들고 있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한겨레>에서 국제 분야의 글을 쓰고 있다. 신문에 글을 쓰는 도중에 <이슬람 전사의 탄생> <지정학의 포로들> 등의 책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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