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와 페미니즘이 손잡을 수 있을까 [독서일기]
〈들뢰즈 이후 페미니즘〉
한나 스타크 지음, 이혜수·한희정 옮김
이상북스 펴냄
〈들뢰즈 이후 페미니즘〉(이상북스, 2023)을 쓴 한나 스타크는 들뢰즈가 “남성 철학가이면서 페미니즘에 대해 명시적으로 많은 말을 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그의 사유는 페미니즘에 꼭 필요한 자원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데카르트주의에 대한 비판과 신체의 재평가를 통해 이성과 합리성을 남성적인 것으로 젠더화한 계몽주의 이후의 철학 체계를 무너뜨린 것으로 페미니즘을 지원했다.
데카르트 철학에서 이성은 남성에게, 신체는 여성에게 배당되었고 ‘남성-이성’은 ’여성-신체‘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했다. 들뢰즈는 데카르트식 성차(性差, 남성과 여성 간의 신체 및 정신에서 드러나는 차이)는 구체적인 사회 환경에 놓인 특정한 개념의 산물일 뿐이며, 남녀의 신체는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연결에 의해 무한히 변용될 수 있는 (둘이 아닌) 하나의 실체라고 말한다. 실제로 LGBT(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젠더)로 다 포용할 수 없는 n개의 성이 있는 데다가, 현대의 성형 의학은 우리의 신체를 무난하게 변용(증강)할 수 있게 해준다. 들뢰즈의 신체는 본질주의적이지 않으며 배치와 연결을 통해 자신에게 가장 올바른 조합을 만든다. 어떤 남자가 앞치마를 두르고 국자를 젓는 것을 가장 행복하게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의 신체 능력을 최대화한 것이다.
들뢰즈는 자본주의와 권력의 관성에 저항하고 그것으로부터 탈주하는 방법으로 ‘여성-되기’ ‘동물-되기’ ‘식물-되기’ ‘분자적-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등 많은 ‘되기(becoming)’를 제시했다. 그 가운데는 ‘여자아이-되기’도 있다. 이게 뭘까.
2014년 위스퍼에서 만든 “여자답게(Like A Girl)”라는 캠페인 광고를 보자. 저 캠페인 광고에서 주최자들이 20대 여성들에게 “여자답게 달려보라” “여자답게 싸워보라” “여자답게 던져보라”고 주문했을 때, 그들은 흐느적거리거나 조신하게 달리고, 싸우고, 던졌다. 주최자들이 열 살밖에 안 된 여자 아이들에게 똑같은 주문을 했을 때, 어린 소녀들은 20대 여성과 달리 최선을 다해 달리고, 싸우고, 던졌다. 그러니까 20대 여성은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한 본성 그대로의 여성이 된 것이다(‘사회화’되었다고 한다). 한 번의 시도로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일은 어렵다. 〈들뢰즈 이후 페미니즘〉은 들뢰즈 철학의 기본 개념을 설명하면서 그것들이 프랑스 페미니즘과 제3물결 페미니즘에 준 영향과 비판적 검토를 함께 소개하는 데 성공했다.
2018년 초간된 김현아의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아를, 2023)가 출판사를 바꾸어 다시 나왔다. 병은 의사가 고친다지만,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로 옮겨진 환자의 목숨을 붙들고 있는 것은 간호사다. 사람은 4분 안에 살고 죽는다. 주치의가 5분 거리의 본관에 있다면, 환자의 목숨은 곁에 있는 간호사가 얼마나 경험이 많고 헌신적인가에 달려 있다. 주치의를 기다리는 도중에 심폐소생술과 응급 약물 투여로 환자의 목숨을 지킨 간호사에게 보호자 할머니가 말했다. “네가 바로 저승사자와 싸우는 아이로구나!”
스무 살에 간호사가 되어 20년 동안 중환자실에서 보냈던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간호사라는 직업은 제대로 된 돌봄을 받아야만 받은 돌봄을 그대로 환자에게 베풀 수 있는 직업이었다.” 간호사의 처우와 환경을 돌봐야 할 병원은 수익 극대화를 위해 적정 인력을 줄이고, 간호사에게 청소와 미화 임무까지 맡겼다. 노인 환자의 식사를 도와주던 신규 간호사가 입을 벌린 채 기다리고 있는 노인이 아니라 자기 입으로 밥숟가락을 가져갔다는, 믿지 못할 열악한 근무 환경이 ‘태움’ 문화를 낳았다.
전광훈 목사는 최근에 복지병원 설립 계획을 밝히면서 기독교인이 임종할 때 축복받으며 죽을 수 있게 “예쁜 간호사에게 치마도 짧게 입히고 가슴도 볼록 튀어나오게 해서 성가대”를 만들겠다고 했다. 그는 미친 게 아니다. 인터넷에서 ‘간호사 장기자랑’이라고 검색하면, 전광훈에게 영감을 준 출처를 볼 수 있다. 이 병원에 근무하던 지은이는 21년 1개월 만에 간호사직을 떠났다.
유교와 페미니즘이 만날 수 있을까
유교와 페미니즘이 손잡는 것이 가능할까. 유교는 남성우월주의를 강조하고 가부장적 가족구조와 ‘남성-외-공적’ ‘여성-내-사적’이라는 성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강제해왔다. 리-시앙 리사 로즌리는 〈유교와 여성〉(필로소픽, 2023)에서 유교를 반페미니즘 철학으로 단정하고 유교를 통치 원리로 삼은 중국을 여성 차별 위에 세워진 문명이라고 보는 서구인의 시각을 ‘오리엔탈리즘’ ‘제국주의적’ ‘인종적 위계질서’ ‘신식민주의적 가정’이라고 거칠게 몰아붙인다. “서구 페미니스트들은 종종 희생된 제3세계 여성을 구하러 오는 도덕적 이론가의 자세를 취한다.”
서구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데카르트적인 틀 안에서 유교의 음양이론과 중국 부부 관계의 ‘내-외(內外)’ 구조를 보았기 때문에, 음양이론과 내-외 구조를 성차별적으로 오인했다. 그러나 음양이론과 중국의 부부 관계 기초에 깔려 있는 내-외 구조는 상호보완적이고 역동적이라서 이원적이고 불변적인 데카르트적 틀과는 완전히 다르다. 또 유교가 남성을 공적 세계, 여성을 사적 세계에 고착시켰다는 서구인의 시각도 부정확하다. 가족관계(그 핵심에 부부 관계가 있다)가 확대된 것이 국가(군신 관계)인 유교적 세계관에는 애초부터 공사의 구분이 없었다. “유교윤리학에서 여성이 위치하는 ‘내’ 영역은 정치 질서의 중심이다.”
‘유교 페미니즘’을 구축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지은이는 유교는 기본적으로 위계적이지만 그보다 더 상호보완적이고 호혜적이라고 말한다. 유교가 남녀 관계를 상호보완적이고 호혜적인 것으로 간주해왔다는 말은, 그만큼 남녀를 본질주의적이고 서로 다른 것으로 규정해왔다는 뜻이다. 상호보완이니 호혜는 양편의 본질이 확실히 정해져 있지 않고서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이런 책은 본질주의나 동일성을 부인하는 들뢰즈를 읽고 나서 연이어 읽을 게 못 된다. 유교의 본래는 여성 차별적이지 않다는 부인의 구조는, 이슬람의 본래는 여성 차별적이지 않다는 부인의 구조와 같다. 기원은 순수할 것 같지만, 기원조차 양날의 칼이어서 어느 편도 일방적으로 기원을 전유할 수 없다. 기원이 원인인 것이다. 유교에 관한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유교와 여성〉은 지금까지 읽은 유교 관련서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배움과 자극을 준다.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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