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정치세력화, 새로운 전기 맞이했다
[고민택 더레프트 편집위원]
민주노총 제76차 임시대의원대회(이하 대대)가, 그동안 방치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다시 당면 과제로 불러냈다. 물론 대대 결과에 대해 누구는 중집(안)을 마련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고, 또 누구는 논의 진전이 오히려 더 불투명해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둘러싼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일단은 낮은 차원에서나마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 것이다.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이하 중집)는 오는 8월까지 정치방침과 총선방침에 대한 중집(안)을 마련하여 대대에 올려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지게 되었다. 물론 중집 안 마련을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실패할 수 있다)와 정치방침과 총선방침은 "대대를 통해 결의한다"(표결할 수 있다) 사이에 적잖은 긴장감이 서려 있다. 하지만 대대를 둘러싼 절차와 과정에 대한 논란과 시비가일단 진정된 만큼 이제부터는 오직 중집 안 마련을 위해 모두의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말되, 반복해서는 안된다
다시 시작된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지난 시기 그것과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 지난 시기에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사실상 의회 진출과 동일시했으며, 의회 진출 자체를 목표로 했다. 더구나 이 목표를 원내 진보정당에 위임하는 방식을 택했다. 필자는 이점이 바로 그 뒤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실패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진보정당이 자유주의 세력과의 민주대연합에 기댄 점, 초기의 이념을 삭제하고 갈수록 우경화로 기울게 된 점, 끝내 노동자대중투쟁과 거리를 두게 된 것은 의석수 늘리기에'만' 몰두한 데서 비롯된 불가피한 현상이다. 당 운영 과정에서 패권주의를 둘러싸고 벌어진 분란이나, 민족문제 대응을 놓고 표출된 논쟁 또한 그로부터 발생한 결과이지, 그것들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실패로 이끈 본질적 원인은 아니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의회의 역할과 기능은 기본적으로 자본운동과 자본축적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법과 제도를 뒷받침하는 일이다. 그것이 곧 의회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부르주아 정치에서의 정권교체는 지배세력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평적 교체를 넘어설 수 없다.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속에서는, 설령 진보-좌파를 표방하는 정당이 집권을 한다고 해도 부르주아 정치 자체를 변혁하지 못하는 한 결국 부르주아 정치로 귀속될 수밖에 없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부르주아 정치를 활용하거나 고쳐 쓰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 자체를 폐절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정치가 일반화된 사회에서 의회 개입과 진출을 부정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로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중요한 범주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부르주아 정치체제에서 의회를 우회하거나 거부하는 방식으로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성공시키기 어렵다. 의회 바깥에서의 투쟁을 통해 의회에 압력을 가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명백하다. 또한 투쟁을 통해 의회 자체를 무력화하자는 것도, 그 의도와 달리, 의회 바깥의 투쟁을 더 어렵게 할 뿐이다. 이 또한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한국도 부르주아 정치가 일반화된 사회로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서는 의회 진출이 필수불가결하다. 나아가 진보-좌파정당이 계급투표를 통한 집권을 목표로 하는 것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어떤 계급에 기반 한, 어떤 집권이냐를 문제 삼을 수 있겠지만 집권 자체를 도외시해야 하는 필연적 이유는 없다. 물론 정세에 따라서는 의회를 경유하지 않거나 집권을 건너뛰어 곧바로 부르주아 정치 폐절로 나갈 수 있다. 즉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의회 진출이나 집권 자체로 가두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의회정치, 대의정치가 일반화되고 보편화된 사회라도 의회'만'을 통해 노동정치 또는 계급정치를 구현할 수 없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강제하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화해 불가능성, 즉 적대성 때문이다.
지금의 현실에서 집권은커녕 의회 진출조차 어려운데 이 같은 말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제기할 수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지난 '실패한 정치세력화'를 모두가 경험했기에 단지 원칙적 차원이 아니라 현실적·역사적 차원에서 되짚고자 하는 것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처음 시작할 당시에도 위와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한편에서 '국회의원 한 명만이라도'라는 호소가 있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 개량주의화에 대한 우려와 비판이 제기됐다. 지금도 그때와 기본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실패한 정치세력화'라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왜'라는 물음을 두고는 아직 정치적·대중적 합의가 부족하다. 여기서 이미 제출된 정치방침에서 말하고 있는 바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경로를 '진보정당을 통한 정치세력화'에서 '노동자를 정치의 주체로 세우는 정치세력화'로의 전환이고, 지난 정치세력화의 실상이었던 의회주의/대리주의를 노동자 '직접정치', '광장정치'를 강화하는 기조와 방향으로의 선회라는 데 모두가 동의한다면 거기에 바로 '왜'라는 물음에 답하는 핵심적 이유가 담겨 있다고 본다.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의 정치로
제출된 정치방침에 따라 노동자를 정치적 주체로, 노동자 직접정치, 광장정치를 토대로 하는 정치세력화를 실행하자면 결국 부르주아 정치의 폐절을 궁극적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노동자를 정치의 주체로 세우는 정치세력화나, 노동자 직접정치, 광장정치를 토대로 하는 정치세력화를 실질적으로 구현할 수 없다. 설령 경로와 과정은 일부 가능하더라도, 내용은 또 다시 부르주아 정치 내로 갇힐 수 있다.
이상은 단순한 가정이 아니다. 서구 사민주의 정당의 경우에 한 때 계급투표를 통한 집권에 이른 바가 있지만, 그 과정에서 노동자를 정치의 주체로 세우거나, 노동자 직접정치, 광장정치를 토대로 하지 않았다. 그들의 계급투표는 부르주아 정치 폐절을 목표한 게 아니라 철저히 부르주아 정치 방식을 따라 진행되었다. 서구의 사민주의 정당들이 개량화, 우경화, 국민정당화 된 결정적 이유도 거기에서 찾을 수 있다. 서구에서 급진좌파운동이 다시 나타나고 있는 이유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상반된 견해가 존재한다. 하나는 여전히 집권에 이르는 것만이라도 먼저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것만도 현재로서는 사실 언제 가능할지도 모르는 먼 얘기라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게 하나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또 하나는 어떤 조건에서든 의회 진출이나 집권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그것의 결과가 서구의 경우와 다를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더 큰 이유가 된다.
다시 시작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바로 이 같은 현상을 극복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먼저, 노동자를 정치적 주체로, 노동자 직접정치, 광장정치를 토대로 하는 정치세력화를 공동 목표로 할 수 있다. 논쟁은 그것의 구체화, 현실화를 두고 벌여야 한다. 다음으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목표를 부르주아 정치의 폐절에 두는 것에 잠정적으로나마 합의할 수 있다. 논쟁은 의회 진출이나 집권을 도모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궁극적 목표에 복무, 부합하게 할 수 있느냐를 두고 벌여야 한다. 물론 이것들을 위한 대전제는 대중투쟁, 계급투쟁에 기반하고, 이들 투쟁을 강화하는 것이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순수한 상태'나 '빈 공간'에서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니다. 누구나 보듯이 그야말로 세계사적 대격변기를 마주하고 있으며, 국내적으로 부르주아 양당체제가 공고한 가운데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 속에서 진보-좌파정당이 다수로 존재하지만 그것은 '실패한 정치세력화'를 보여주는 것 이상이하도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새로운 정치세력화 시도를 오히려 어렵게 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 결과, 대중의 상태가 '실패한 정치세력화'로부터 조차 멀어져 있고, 그들 다수의 요구는 분산된 진보-좌파를 향해 단결하라는 '주문'을 하는 데 아직 머물러 있다. 즉, 노동자의 상태는 '실패한 정치세력화'로 인해 당장 정치의 주체로 나서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런 대중의 입장에서는 진보-좌파 사이의 대립이나 차이가 갖는 의미는 명확히 확인되고 있지 않다. 이는 물론 대중의 책임이 아니지만 정치세력화 논의를 진전시키는 데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진보-좌파 자신들에게도 절실한 문제다. 진보-좌파정당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떨어지거나 분리되어서는 사실 존재의 이유를 찾기 어려우며 존재 자체를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논의를 여전히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제3자적 태도와 입장을 취하고 있다. 간간이 제기하는 내용도 진지하지 않고 마치 남 얘기하듯 하고 있다.
현재 논의에 문제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많은 문제가 켜켜이 쌓여 있다. 그렇게 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의 하나가 바로 진보-좌파 자신들에게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진보-좌파는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현재의 진보-좌파정당에게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이끌 자격과 능력이 절대 부족하다. 이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을 스스로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자꾸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라는 핑계를 대고 있다. 대중이 이를 모른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자신들이 먼저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다.
2024년 총선을 앞두고 진보-좌파의 일차 관심은 총선 대응에 쏠려 있다. 그것은 필요한 일로서 그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구체화·현실화하는 과정으로 적극 삼아야 한다. 총선 대응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과 전망을 제시할 때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대중적 동력을 비로소 형성할 수 있다. 진보-좌파는 대중이 납득하고 기꺼이 주체적으로 나설 수 있는 정도의 총선 방안을 제출해야만 한다. 더 바람직한 것은 처음부터 대중과 함께 그럴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현재 조건에서 총선 대응은 진보-좌파 사이의 연대연합 위에서 모색해야 한다. 이 연대연합은 과거 민주노동당과 같은 '단일정당'이 아닌 '진보다원주의'에 기초한 방식이 되어야 한다. '진보다원주의' 위에서의 연대연합은 일체의 패권이 처음부터 작동할 여지가 없는 연대연합을 의미한다. 연대연합의 방식은 모두의 합의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방안은 결국 연대연합정당을 결성하는 것이다. 기존 정당을 해산하고 하나의 형식을 취하는 연대연합정당이든, 기존 정당과 병행하는 형태의 연대연합정당이든 둘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어떤 연대연합정당이든 현행 정당법과 확정될 선거제도의 영향을 받는 것이 불가피하지만, 가능한 최대의 방안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연대연합정당의 내적인 운영 문제는 '진보다원주의'에 따라 스스로 결정하면 된다. 법/제도적 제약에 따른 문제는, 앞으로 투쟁 과제로 삼으면 된다. 당장 2024년 총선 대응에서부터 그 필요성을 대중이 공유할 수 있는 실전의 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 법/제도적 제약 때문에 연대연합정당이 어렵다는 우려를 불식시키고, 이를 위한 법/제도 개혁 투쟁에 나설 수 있는 동력을 형성해야 한다.
논쟁은 투명하고 건강하게
총선 이후 연대연합정당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를 지금 모두 결정하기는 어렵다. 물론 할 수 있다면 사전에 합의를 이루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무리하게 추진할 이유는 없다. 총선 이후는 총선 결과에 따라 논의해도 결코 늦지 않다. 다만 어떤 경우든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연대연합을 지속할 수 있는 형태의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중집에게 두 가지를 주문하고자 한다. 먼저 모든 논의를 가능한 한 공개적으로 그리고 대중적으로 진행했으면 한다. 논의를 중집 내부, 그 속에서도 '논의 기구'에 가둔다면, 이제까지의 중집 논의를 단지 반복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제 당분간 중집 논의에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중집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의견과 주장을 담는 저수지 같은 역할을 해야 하며, 동시에 그것들을 하나로 녹여 내는 용광로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아무리 단일(안)을 마련한다고 해도 과정을 모른 채 어느 날 갑자기 내 놓는 방식이라면 동력을 창출하기 어렵다.
다음으로 논의를 최대한 '안' 대 '안'으로 해줬으면 한다. 그래야 논란이 아닌 논쟁이 이루어질 수 있다. 대대 전까지의 양상을 봐도 알겠지만 위원장(안)에 대한 철회 요구와 반대가 있었던 것에 비해, 그에 대응하는 별도의 (안)은 제출되지 않았다. 모든 의견은 그것이 객관화되기 위해서 하나의 (안)으로 성안되어 제출되어야 한다. 그래야 논쟁이 가능하다.
[고민택 더레프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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