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K!제보] 68년 경력 이발사의 특별한 은퇴식…"내일의 희망을 위해!"
40년 단골 "이제 어디 가나"
(서울=연합뉴스) 임지현 조서연 인턴기자 = "고진감래라는 말을 평소에 자주 합니다. 참고, 견디고, 헤쳐 나가세요."
40여년간 서울시 망원동을 지켜온 이발사 박정은(83)씨. 68년만에 가위를 놓는 박씨의 특별한 은퇴식이 13일 오후 망원동 일흥이발소에서 열렸다.
좁쌀죽으로 끼니를 때우고 그마저도 없는 날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시던 시절, 박 씨는 생계를 위해 1954년부터 광주광역시에서 이발을 배웠다.
6남매 중 장남으로서 돈을 벌기 위해 1964년 서울로 올라온 박씨는 이문동, 아현동 등에서 미용 기술을 더 배우다가 1981년 망원동 일흥이발소를 인수해 자신만의 사업장을 차렸다.
한 자리에서 43년을 버티며 주변 환경은 쉼 없이 바뀌었지만, 일흥이발소만은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박 씨는 여전히 가게 한편에 있는 연탄으로 난방하고, 때 묻은 플라스틱 통에 차가운 물을 부어 냉장고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투박한 겉모습과 달리 손님을 위한 서비스엔 최선을 다해왔다. 체구가 작은 박 씨는 키가 큰 손님의 머리를 다듬기 위해 10㎝ 높이의 나막신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박 씨는 "내 편함보다는 항상 손님을 먼저 생각했다"며 "개인적으로 화나는 일이 있어도 손님이 오면 웃으면서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마음이 통했는지 일흥이발소에는 오래된 단골들이 많다. 이발소 옆에서 40년째 세탁소를 운영하는 이승환(67) 씨는 "80년대에 망원동에 세탁소를 열고 가까이 있는 이발소에 갔더니 처음부터 마음에 들게 미용을 해줘서 지금까지 쭉 일흥이발소만 다녔다"면서 "이웃이고, 형제처럼 지내다가 갑자기 사라진다고 하니 섭섭하다.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주변 상인들에게 박 씨는 모범이 되는 어른이기도 했다.
일흥이발소 앞에서 케이크 집을 운영하는 이해명(42) 씨는 "4년 전에 처음 망원동에서 가게를 시작하려고 할 때 가게 인테리어부터 직접 봐주셨다"며 "평소 간판도 직접 사다리 타고 고치시고 페인트도 직접 칠하시는 등 검소하고 부지런하신 분이셨다"고 전했다.
가난했던 시절을 극복하려고 하루에 12시간 넘게 일했던 박 씨는 "지나고 보니 오래 교감할 수 있는 손님들을 만난 게 이발사로서의 뿌듯함"이라고 한다.
승진했다는 손님의 기쁨을 전달받고, 가족 이야기 등 내밀한 속사정까지 터놓는 단골을 만든 기억이 박씨에게는 젊은 시절 고생 이후 찾아온 즐거움이었다.
지난해 5월 구강암 수술을 받은 박 씨는 "아파보니 건강이 최고"라며 은퇴를 결심했다.
박 씨의 은퇴 소식은 평소 박 씨와 자주 대화하던 주민들의 입을 타고 망원동 청년회에도 들어갔다.
망원동 청년회는 '어른들도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모인 청년 공동체다.
박찬희(29) 망원동 청년회장은 "변화무쌍한 청춘들이 망원동을 바꾸는 한편, 박정은 할아버지처럼 오랜 기간 한 자리를 지켜주는 어르신들이 계시기에 망원동이 정감 있는 동네가 된 것 같다"며 "이런 좋은 동네를 만들어준 어르신들에게 감사함과 존경의 마음을 담아서 은퇴식을 계획하게 됐다"고 전했다.
은퇴식은 일흥이발소 역사 소개, 40년 단골의 고별사, 근처 상인의 축하 연설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망원동 청년회 측에서는 68년간 이용한 가위에 박 씨의 이름을 새겨 박씨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가수 남진의 '님과 함께'에 맞춰 현대무용가 청년의 헌사 무용도 이어졌다.
'님과 함께'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는 일이 평생의 꿈"이었다는 박 씨의 애창곡이었다.
주최 측에서 참가자들에게 돌린 막걸릿잔을 들며 "이 순간을 위하여, 내일의 희망을 위하여"라는 박 씨의 건배사와 함께 은퇴식도 끝났다.
박씨는 이제 가위를 놓지만, 이발소의 삼색등은 계속 자리를 지킬 예정이다.
일흥이발소 자리에 새 가게가 들어오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 주민 방현주(49) 씨가 자리를 그대로 받아 6월부터 '마음 이발소'라는 이름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이발 대신 동네 사람들이 함께 대화하는 사랑방처럼 운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방씨는 "화려한 새 가게가 들어오면 오래된 정서가 깨지는 느낌이 들어 덥석 인수해서 운영하겠다고 했다"며 "따뜻하게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고 한다"고 밝혔다.
은퇴가 시원섭섭하다던 박씨는 "은퇴하더라도 이발소가 많은 사람이 좋은 소식을 주고받고 행복함을 느끼는 장소로 이어지면 좋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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