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도안 20년 철권 끝낼까… 野 단일후보 지지율 49% ‘1위’ [세계는 지금]

유태영 2023. 5. 13.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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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대선 D-1
‘21세기 술탄’ 향한 민심 싸늘
개헌 통해 ‘10년 더’ 집권 길 열었지만
인플레에도 저금리 유지 경제난 가중
2023년 초 대지진까지 겹쳐 지지율 43%
‘튀르키예의 간디’ 정권심판 선봉
‘평화행진’ 주도… 온화한 이미지로 인기
野 성향 군소후보 사퇴로 표 결집 관측
과반 득표 성공 땐 결선투표 없이 당선
정권 교체 땐 정책 대전환 예고
의회 해산권 가진 첫 ‘제왕적 대통령’
야권은 의원내각제 부활 공약 내세워
EU 가입 추진 등 서방 관계 복원 의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21년째 집권 중이다. 2003년 3월 처음 총리직에 올라 3연임을 한 뒤 소속 정당(정의개발당·AKP) 당규상 연임 제한 규정에 부딪히자 201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튀르키예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의원내각제로 공화국을 수립한 지 94년 만인 2017년에는 5년 중임 대통령제로 전환하는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관철했다. 의회 해산권, 고위 법관 임면권 등을 가진 제왕적 대통령의 첫 번째 대통령 자리 역시 에르도안의 몫이었다. 오는 14일(현지시간) 대선에서 생애 첫 투표를 하게 되는 유권자 약 500만명에게 튀르키예 통치자는 태어났을 때부터 줄곧 에르도안이었던 셈이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왼쪽),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AFP연합뉴스
보수적 무슬림의 지지, 입법·사법부와 언론 장악,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등을 기반으로 장기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그를, 외신들은 ‘21세기 술탄’이라고 부른다. 오스만제국의 군주를 뜻하는 술탄이 현대에 에르도안의 이름으로 재등장했다는 것이다.

개정 헌법하에서 에르도안은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치르면 2033년까지 최장 30년간 집권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대선은 그리 녹록지 않다. 오히려 정치 인생 최대 시험대에 올랐다는 평가가 많다. 25년 만에 최대치를 찍은 인플레이션과 석 달 전 대지진에 따른 민심 이반이 심상치 않아서다. ‘반(反)에르도안’이라는 기치로 뭉친 야권은 단일 후보를 내세워 대응 중이다.

그의 마이웨이 외교에 곤혹스러워했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국과 주변국들도 이번 튀르키예 대선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구조대원들이 지난 2월7일(현지시간) 튀르키예주 카라만라스에서 지진으로 파괴된 건물 잔해 속 생존자를 찾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인플레이션·대지진 여파는?

에르도안은 튀르키예가 경제위기에서 막 벗어날 무렵 처음 정권을 잡았다. 2003∼2007년 평균 7.2%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기록했고, 집권 초 3600달러(약 476만원) 수준이던 1인당 GDP는 한때 1만2600달러(1666만원)까지 올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경제 위기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에너지·곡물 가격 인상은 튀르키예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특히 물가가 급등했다. 지난해 10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기 대비 85%를 기록했다.

에르도안은 경제 상식을 역행했다. 미국, 유럽연합(EU) 등의 중앙은행이 물가를 잡겠다며 금리를 대폭 올린 것과 달리 저금리 정책을 유지한 것이다. 리라화 가치가 낮아지면 수출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고 경제 성장도 유지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으로 풀이됐다. 에르도안의 뜻에 반기를 든 중앙은행 총재들은 줄줄이 자리에서 쫓겨났다.

전문가들이 ‘비정통적 경제정책’이라고 이름 붙인 에르도안의 저금리 정책은 생활비 위기를 심화시켰다. 최대 도시 이스탄불에서 15년간 석탄을 팔아온 알리예 고가(47·여)는 결국 장사를 접기로 했다. 그는 지난달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에 “사람들은 돈을 빌리지 않고서는 충분한 식량조차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라며 “겨울에도 한 달에 1500리라(10만원)밖에 못 벌었다”고 하소연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리라당 0.83달러 수준이던 환율이 0.05달러까지 떨어지자 사람들은 금 사재기에 나섰다. 이스탄불에서 3대째 귀금속점을 운영 중인 자히트 아크바스는 “이제 30대 젊은이들까지 금에 투자하고 있다”며 “요즘은 금이 가장 안전한 자산”이라고 FP에 말했다.

지난 2월 남동부 지역을 강타한 규모 7.8의 대지진은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희생자만 5만여 명. 거기에 수백만 명이 집을 잃고 거리로 나앉았다. 에르도안 정권은 내진 규제 완화, 부실·늑장 대응 논란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인플레이션과 대지진은 정권 심판론에 힘을 실었다. 지진 피해가 큰 11개주 대부분이 에르도안 강세 지역인 점은 이번 대선에 또 하나의 변수로 지목된다. 튀르키예 선거관리위원회는 이재민 최소 100만명이 투표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야권 단일후보 박빙 리드

중도좌파 성향 제1야당 공화인민당(CHP) 등 야권 6개 정당은 이번이야말로 에르도안 장기집권을 끝낼 호기로 보고 단일대오를 구축했다. 에르도안 대항마로는 CHP 대표인 케말 클르츠다로을루를 내세웠다. 인도 건국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를 닮아 ‘튀르키예의 간디’, ‘간디 케말’ 등으로 불리는 그는 세무공무원 출신으로 공직 은퇴 후 CHP에 영입됐다. 온화한 학자풍으로 스트롱맨(권위주의 지도자) 스타일인 에르도안과는 정반대 이미지이다.

클르츠다로을루는 CHP를 이끌면서 주요 선거에서 일련의 패배를 겪었으나, 에르도안이 군부 쿠데타 저지 후 대대적인 숙청 및 야권 탄압에 나선 2017년 수도 앙카라에서 이스탄불까지 450㎞를 24일 동안 걷는 ‘정의를 위한 행진’을 주도해 대중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행진 마지막 날 이스탄불 말테페 광장에는 100만 인파가 모여 에르도안 집권기 최대 반정부 시위로 기록됐다. 2019년 지방선거에서는 CHP 후보가 앙카라·이스탄불에서 당선되는 데 힘을 보탰다.

여론조사 추이를 보면 야권 후보 단일화의 위력이 확인된다. ‘폴리트프로’(politpro)가 최근 한 달치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한 바에 따르면 클르츠다로을루 지지율은 48.9%로 에르도안 43.2%에 앞서 있다.

최근에는 0.01%차 초박빙 판세라는 조사 결과도 나왔으나, 약 5% 지지율을 점유 중이던 조국당 무하렘 인제 대표가 11일 후보직을 전격 사퇴해 야권의 표 분산 우려가 해소됐다. 인제 대표는 “나는 후보직에서 물러난다”며 “이는 조국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8년 대선에서 CHP 후보로 나와 에르도안과 맞붙었던 인물이어서 지지자들 표심은 대거 클르츠다로을루에게 향할 것으로 전망된다.

만약 클르츠다로을루가 14일 선거에서 과반 득표에 성공한다면 2주 뒤 결선 투표에 갈 필요 없이 대선은 바로 끝이 난다. 현재까지 양자대결 여론조사에서는 클르츠다로을루가 에르도안에 약 8%포인트 차로 앞서는 결과를 보여왔다.
케말 아타튀르크. 로이터연합뉴스
◆정권교체로 정책 대전환?

클르츠다로을루의 야권 6자 연대는 정권 교체에 성공하면 의회 권한을 강화하겠다고 공약했다. 의원내각제를 부활하고 법안 거부권 등 대통령 권한은 대폭 축소하겠다는 것이 골자이다. 대통령 임기는 7년 단임으로 조정하고 대통령의 정치적 중립도 의무화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선과 동시에 치러지는 의회 총선거에서 600석 중 400석을 차지해 개헌선을 돌파하거나, 개헌 국민투표 부의에 필요한 360석을 확보해야 한다. 야권 지지율은 폴리티프로 조사에서 CHP 29.5%, 좋은당(iYi) 11.0%, 녹색좌파당(YSP) 10.3%를 나타냈다. 여권인 AKP는 34.4%, 민족주의운동당(MHP)은 6.6%였다. 실제 의석은 7% 이상 득표율을 기록한 당에만 정당명부 비례대표 방식으로 배분되기 때문에 예측이 어렵다.

게다가 AKP가 야당으로 밀려나더라도 20년간 구축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거세게 저항할 것이 분명하므로, 클르츠다로을루가 이에 대적하려면 오히려 제왕적 대통령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고 FP는 지적했다.

야권은 서방과의 관계 복원 의지도 다지고 있다. 유럽연합(EU) 가입을 다시 추진하고, 오스만 카발라 등 반체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한 유럽인권재판소 결정도 따르겠다고 했다. 에르도안의 몽니로 지연되고 있는 스웨덴의 나토 가입에도 활로가 열릴 수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야권은 특히 에르도안이 ‘러시아판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라고 불리는 S-400 지대공미사일을 구입하면서 제외된 F-35 스텔스 프로그램에도 다시 들어가겠다는 각오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제프리 만코프는 프랑스24에 “에르도안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서로를 이용해 왔고, 러시아는 최근 천연가스 구매대금 지불유예를 허용하는 등 대선을 앞둔 에르도안을 돕고 있다”며 “에르도안을 상대하면서 좌절감과 피로감을 느낀 많은 서방 지도자와 관료들은 에르도안 정권이 무너지면 기뻐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클르츠다로을루 역시 국제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북키프로스튀르키예공화국의 권리를 보호하겠다고 공언했고 그리스와의 관계 회복 전망도 불투명하다. EU 회원국인 키프로스, 그리스와의 긴장이 해소되지 않는 한 정권교체가 되더라도 튀르키예의 EU 가입은 어려울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내다봤다.

유태영 기자 anarchy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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