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 대신 시든 꽃만 잔뜩... 일상이 된 ‘봄 냉해’ [이한호의 시사잡경]
작고 풋풋한 열매가 방울방울 맺혀 있어야 할 가지엔 말라비틀어진 꽃잎과 꽃받침 등 '봄꽃'의 흔적들만 축축 늘어져 있다. 10일 경기 안성시의 한 배나무 농장. 이날 배나무 한 그루에서 나온 시든 꽃을 세어 보니 298송이였는데, 열매는 100송이가 채 되지 않았다. 충분한 영양분 확보를 위해 열매를 솎아내는 적과(摘果) 작업 전이었지만 맺힌 열매 숫자가 이미 예년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해 솎아내고 말 게 없었다. 며칠 사이 기후가 여름과 겨울을 오간 탓에 꽃의 태반이 수분되기 전에 대부분 얼어 죽었기 때문이다.
안성은 전남 나주에 이어 전국 2위의 배 생산지다. 도로 이름조차 ‘배꽃길’인 이곳에서 주민 대부분이 배 농사를 짓는 건 자연스럽다. 그런데 길을 따라 늘어선 과수원 중 냉해 피해를 보지 않은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올해 냉해는 모든 과수 농가의 고민거리다. 평년 대비 10도 이상 높은 초여름 기온으로 시작했지만 4월 초 갑자기 영하권으로 곤두박질치면서 꽃들이 버티지 못한 것이다.
인근 경기 이천 관측소 기록에 따르면 지난 4월 3일 이 지역 최고기온은 25.6도였지만 사흘 후에는 11.3도로 급락했다. 최저기온 역시 4일 9.6도에서 9일 영하 0.5도까지 떨어지는 등 늦봄과 겨울을 순식간에 오가면서 냉해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8일 기준 농림축산식품부에 접수된 냉해 피해 면적만 1만 헥타르(ha)에 육박한다. 안성에서 농원을 일군 지 50년이 된 이충희(78)씨는 “이틀간 아내와 새벽 4시부터 깡통(서리를 방지하기 위해 농원에서 쓰는 작은 고체 연료)을 피웠는데도 이쪽은 열매가 15%밖에 안 맺혔다”며 한탄했다.
이씨와 같은 수십 년 차 베테랑 농민도 냉해에 속절없이 당하긴 마찬가지다. 봄철 냉해는 과거에는 매우 드물었던 ‘최신’ 재해였기 때문이다. 한반도 기후 특성상 농민들에겐 평년 대비 강한 한파가 내린 겨울의 동해(凍害)나 태풍 피해가 심한 여름의 냉해가 주된 걱정거리였다. 꽃샘추위로 인한 봄철 냉해가 없진 않았지만 피해 규모나 발생 빈도 모두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서며 봄철 냉해가 점점 기승을 부리더니 2018년 역대 최대 규모의 피해를 당한 후로는 거의 매해 반복되고 있다.
정부 관계 부처가 합동으로 발간한 ‘2011년 이상기후 보고서’에서 “과거에 없던 대규모 냉해 피해”를 언급하며 이후 매년 통계를 내고 있는데 최근 6년 동안 대대적인 냉해 피해가 접수되지 않은 해는 지난해가 유일하다. 10년에 한 번 정도, 국지적으로 발생했던 이변이 어느덧 매해 전국을 덮치는 습관성 재해가 된 것이다.
최근 몇 년간 냉해가 반복됐지만 농촌을 벗어나면 체감 정도가 확 떨어졌고, 봄철 개화한 전체 꽃 중 90% 이상이 시들어버리지 않는 이상 평년과 비슷한 출하량을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과실당 거리, 한 열매송이에서 몇 번째로 열렸는지 등 여러 요소에 따라 맛과 육질이 달라지기 때문에 ‘좋은 열매’를 골라 솎아야 우리가 평소에 먹는 맛있는 과일이 된다. 대대적인 냉해로 많은 꽃이 죽어버리면 선택권 없이 살아남은 열매를 키우는 수밖에 없어지므로 품질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결국 갈수록 더 비싸고 더 맛없는 과일이 우리 식탁에 오르고 있는 셈이다.
최악의 경우 해당 작물을 더 이상 키우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설령 평균 기온이 비슷하더라도 올해처럼 짧은 기간 내 극단적인 변칙성을 보이는 경우 이미 다른 기후로 봐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1년 봄철 냉해로 와인 생산량 30%가 날아간 프랑스의 사례가 우리에게도 남일이 아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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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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