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도, 사랑도, 연대도…마음은 ‘말’을 타고 온다네[플랫][싸우는 여자들]

유선희 기자 2023. 5. 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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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이주민 김나현씨가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와서 일하면서 스스로 한국어 공부를 한 노트. 김씨 제공

‘당신은 미리 나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무서워’

‘와카노’

‘나는 모릅니다’

‘그렇게 서두르지 마세요’

‘나는 나의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베트남 이주여성 김나현씨(50)가 한국어 공부를 다짐하고 적은 문장들이다. 삐뚤빼뚤하게 한 글자씩 써 내려간 단어장 노트엔 김씨의 감정도 함께 새겨졌다. 28년이 지나 색이 바랜 김씨의 노트엔 ‘꾸짖’ ‘스트레스’ ‘사유서’ ‘슬픈 표정’ 등과 같은 단어도 눈에 띄었다. 김씨는 “워낙 일이 힘들다 보니 이런 단어들을 찾게 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항의하자 따귀 날린 상사,한국어 배울 결심하다

김씨는 1995년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처음 왔다. 산업연수생 제도는 이주노동자를 노동자로 보지 않고 ‘연수생’으로 받아들인 제도다. 노동자가 아니다 보니 노동법 사각지대에 놓여 ‘현대판 노예제도’라는 비판이 일었다. 2004년 고용허가제 전면 도입 이후 사라졌다.

김씨는 부산 연산동의 한 어망공장에서 일했다. 그물을 짜기 위한 실을 교체하는 업무였다. 기계 오작동으로 툭하면 실이 손에 감겨 늘 긴장 상태였다. 김씨가 일하는 3년 동안 이주노동자만 3명이 다쳤다.

김씨는 근무 첫해 하루에 11시간 일하고 30만원을 손에 쥐었다. 김씨는 이 사업장에서 3년 가까이 일했는데, 가장 많이 받은 게 70만원이었다. 그마저도 추가 노동시간이 빠져 돈이 적게 나오는 날이 있었다. 김씨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업무시간을 체크해 둔 달력을 통째로 들고 가 항의했다”고 말했다.

한국에 오기 위해 두 달 정도 베트남에서 한국어를 배웠지만, 간단한 인사 정도가 전부였다. 함께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 37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국어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한 건 다름 아닌 먹는 문제에서 발생한 폭행 사건 때문이었다.

지난달 19일 부산시 부산진구 전포동 이주민과함께 사무실에서 김씨를 만났다. 책상(사진 왼쪽)엔 김씨를 포함해 이주활동가 6명의 이야기를 기록한 <곁을 만드는 사람> 책이 놓여 있다. 유선희 기자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 힘들어했다. 김씨는 “배추를 넣은 시락국(시래깃국의 방언)이 그렇게 많이 나왔다”고 떠올렸다. 당시 급여에서 빼는 식대가 월 6만원이었는데, 이주노동자들은 이를 3만원으로 줄이고 나머지 끼니는 직접 해 먹겠다고 건의했다. 주말엔 식당 운영을 하지 않아 이미 기숙사에서 음식을 해 먹던 터였다. 돈을 조금이나마 저축할 목적도 있었다. 회사는 이를 거부했고 상사는 항의하는 노동자의 뺨을 휘갈겼다.

“동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언니 뺨을 때렸어요. 앞으로 저희 앞날이 어떨지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너무 분했습니다. 저희 모두 화가 나서 일을 하지 않겠다며 출근을 거부했어요. 결국 사측은 식대 3만원 요구를 받아들였어요. 그러나 뺨을 때린 것에 대해선 사과하지 않더라고요.”

첫 ‘싸움’을 계기로 김씨는 “한국어를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려면 언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장과 기숙사만 오가는 탓에 김씨가 한국어를 배울 여건은 열악했다. 베트남에서 가져온 사전 하나에 기대 스스로 공부했다. 궁금하거나 하고 싶은 말을 베트남어로 찾아 한국어로 번역하는 식이었다. 한국어 실력을 키우면서 김씨를 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말’을 하자 함부로 대하는 일이 바로 줄었다.

김씨는 “내 권리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언어라는 게 결국 ‘정서’를 소통하는 것이기도 하잖나. 언어를 배우면서 다른 사람의 감정도 살피고 어울릴 수 있게 됐다”며 “소통을 통해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꾼다”고 말했다. 김씨의 싸움 무기는 ‘언어’였다.

김나현씨가 주경야독하며 공부한 한국어 노트. 김씨 제공
“가르쳐달라”고 요구하던 나현씨,선생님으로

김씨는 공장에서 만난 한국인 남성과 만나 결혼했다. 결혼하고 두 아이를 키우면서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자랐다. 김씨 포함 결혼이주여성 6명이 부산의 외국인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현 사단법인 이주민과함께)을 찾았다.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상담과 교육을 하는 단체였다. “무작정 우리도 한글을 가르쳐 달라”고 문을 두드렸다.

그렇게 2002년 ‘이주여성 한글 교실 1기’가 열렸다.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이때 처음 생겼다. 한글을 가르쳐 준다는 소문이 나면서 한때 인도네시아, 중국 등 80여 명의 이주여성들이 모였다. 국제결혼을 한 이주여성들이 많이 늘어나는 시기이기도 했다. 김씨는 “한국 정부는 사람은 데려오면서 ‘결혼은 개인의 문제’로 두고 아무런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고 했다.

선배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던 김씨는 한국어 교육 봉사를 자원했다. 베트남 이주여성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상담을 하는 일도 함께했다. “한글을 가르쳐달라”던 김씨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이주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된 것이다. 김씨는 “한국에 먼저 온 선배로서 제가 겪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씨가 이주여성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는 모습으로, 2006년 자원봉사을 시작해 2007년부터 5년여 동안 시간제로 일했다.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제공

이주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싸웠던 김씨의 관심은 결혼 이주여성들로 옮겨갔다. 김씨는 “상담을 해보면 중간 브로커(알선업체)의 잘못된 정보에 속아 결혼한 이주여성들이 많았다. 그건 한국 남성들도 마찬가지여서 결국 가정불화로 이어지는 경우가 잦았다”고 했다. 최근엔 국제결혼도 어느 정도 틀을 갖추기 시작했지만, 2000년대 초중반만 하더라도 아예 한글을 모른 채 한국에 와서 의사소통으로 불거지는 문제가 유독 많았다.

김씨는 이주여성들의 처우개선을 위한 활동에 발 벗고 나섰다. 무분별한 알선업체를 통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정책을 비판하는 캠페인도 벌였다. 김씨는 법무부의 사회통합 프로그램을 지적했다. 김씨는 “법무부는 ‘한국어 공부’를 국적 취득 조건으로 내세웠는데, 현실적으로 이주여성 대부분은 경제적 문제로 당장 생계에 뛰어들어야 한다. 한국어 공부를 할 시간도 여유도 없을뿐더러 한국어 공부 인프라도 부족하다”고 했다. 김씨는 2007년 이주여성들의 실태를 설문조사하고, 2009년엔 베트남에서 열린 국제이주기구의 세미나에서 사례를 발표했다.

김씨가 꾸준히 ‘싸움’을 해나갈 수 있는 동력이자 갑옷이 되는 존재는 ‘가족’이다. 김씨는 “남편과 아이들이 저를 자랑스러워한다. 저를 믿어주니까 저도 자부심을 느끼고 일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본명 팜티안뚜엣에서 ‘김나현’으로 개명한 것은 남편이 작명소를 통해 받아온 이름이다. ‘어찌나(那)’에 ‘밝을현(炫)’이라는 뜻이다. 이름으로 차별적인 시선을 받으면서 속상해하는 아내를 보고 남편이 나서 개명을 도왔다.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해 계속 싸운다
이주민과함께 사무실에 ‘더불어 사는 삶’ 간행물이 비치돼 있다. 유선희 기자

언어를 배우고 20년 넘게 ‘차별’과 ‘편견’에 맞서 왔지만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내가 베트남 사람이라는 걸 늘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떤 상황에 닥쳤을 때, 그것으로 인해 내가 차별과 배제를 당하는 순간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죠.
- <곁을 만드는 사람> 저서 中 발췌

김씨를 포함해 이주활동가 6명의 이야기는 책 <곁을 만드는 사람>으로 묶여 지난달 3일 출간됐다. 김씨는 “여전히 많은 이주민이 차별과 편견에 맞서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한국의 이주민 정책은 필요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고무줄’ 같다”고 했다.

최근 정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단속하겠다며 콘서트 현장을 급습하거나 예배 중인 노동자들을 현장 체포했다. 김씨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생기는 이유도 결국 노동력 수요가 있기 때문인데, 사람이 필요할 땐 쓰고선 인제 와서 불법이라며 노동자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은 가혹하다”고 했다.

현 ‘사업장 변경 제한 정책’이 미등록 불법 체류자를 양산한다는 비판도 있다. 이주노동자들에게 적용되는 고용허가제는 3년 취업 기간 동안 사업장 변경이 3번까지만 허용된다. 고용노동부는 “성희롱·폭행·상습적 폭언 등 사용자의 부당한 처우는, 노동자가 희망하면 사업장 변경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이주노동자들의 설명이다. 증명책임이 노동자에게 있고, 추후 불이익을 받을 우려도 장애물이다. 부당한 처우를 견디지 못한 이주노동자들이 스스로 사업장을 탈출하면서 미등록 불법 체류자가 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사단법인 이주민과함께는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와 매주 일요일 오전마다 무료 진료소를 운영한다. 일반진료와 치과 치료가 이뤄진다. 보험이 없는 ‘사각지대’에 있는 이주민들이 찾는데, 맹장 수술이 시급한 노동자가 전전하다 이곳에서 도움을 받고 응급실로 옮겨진 적도 있다.

이주민과함께와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가 매주 일요일에 진료를 하는 곳으로 치과진료실과 일반진료실로 나눠 운영하고 있다. 유선희 기자

김씨는 현재 이주민과함께 부설기관인 이주민통번역센터링크에서 센터장으로 일한다. 의료분야의 통번역 총괄 업무가 김씨의 일이다. 김씨는 “아플 때가 가장 서럽잖나. 급박한 상황에서 언어장벽 때문에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게 하려고 통번역 일에 나서게 됐다”며 “의료통번역은 특히 어려운 의료용어와 병원 체계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의사소통 채널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근엔 의료통역 예산이 줄어 걱정이 크다. 김씨가 제공한 부산시 의료통역 예산 현황에 따르면 2012년 500만원에서 시작해 지난해 1억원까지 대폭 늘었다가 올해 5000만원으로 절반 삭감됐다. 담당 부서도 부산시 보건위생과에서 여성가족과로 변경됐다. 부산시는 “시 재정의 어려움으로 삭감됐다”고 했다.

김씨는 “당장에 병원 내 통번역 인력의 상주 시간이 줄었다. 담당부서도 바뀌면서 본래 하던 의료통역 지원사업이 실종됐다”며 “통번역 활동가들은 통번역뿐만 아니라 환자가 사망했을 때 영사에 연결하는 등 관련 업무도 했는데, 예산이 줄어들면서 이런 업무를 할 여력이 없다. 환자의 중증 여부를 따져가며 통번역을 결정할 수밖에 없어 이주민 건강권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걱정했다. 김씨는 의료 통번역시스템 구축을 위한 별도 운영 방법을 고민 중이다.

김씨에게 언어가 주는 의미는 뭘까? “마음을 연결하는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언어를 배우고 가르치고, 이제는 통번역 업무 총괄을 담당하는 김씨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고 했다. 단순히 언어를 통번역 하는 것을 넘어 ‘마음’을 나누기 위한 틀을 제대로 갖추고 싶은 김씨의 마음인지도 몰랐다. 부당한 처우에 대항하는 ‘싸움의 무기’였던 한국어는 이제 서로를 연결하는 ‘평화의 도구’가 됐다.

2020년 이주민 건강권 실태와 개선방안 토론회엔 온라인 줌으로 참여한 김씨의 모습으로, 김씨는 현재 이주민통번역센터링크에서 센터장으로 일하면서 의료분야 통번역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제공
싸우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싸움의 대상은 노동환경이나 성차별적 편견만이 아닙니다.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려 싸우고, 모든 것을 태우는 불꽃과 싸우고, 잊혀져가는 기억과 싸웁니다. 실제 ‘싸움’이 직업인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항상 싸움의 연속입니다. 플랫은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대상과 ‘싸우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조명합니다. 싸움의 ‘대상’은 누구인지, 지지 않기 위한 자신만의 ‘무기’가 있는지, 온갖 역경과 방해물에도 싸움을 이어나갈 수 있는 ‘갑옷’은 무엇인지 들어봅니다. 싸움의 온도와 단계도 함께 담아볼 예정입니다. 싸우는 과정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부산 | 유선희 기자 y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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