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리그 우승 이끈 김민재, 박지성과 손흥민을 넘어서다
(시사저널=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5월4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남부 도시 나폴리 시내는 도시와 맞닿은 지중해를 닮은 하늘색으로 물들었다. 나폴리를 연고로 하는 SSC 나폴리(이하 나폴리)가 우디네세 원정에서 1대1로 비기며 조기에 세리에A 우승을 확정했기 때문이다. 리그 종료까지 5경기를 남기고 2위 라치오와의 승점을 16점으로 벌린 나폴리는 2022~23 시즌 우승에 성공했다. 클럽 역사상 통산 3번째 세리에A 우승이자 무려 33년 만의 리그 정복이었다.
깜짝 우승이었다. 나폴리는 전통적으로 우승 후보가 아니다. 97년 역사에서 하부 리그 강등만 7번이었고 심지어 3부 리그인 세리에C까지 간 적도 있었다. 주요 산업 발달이 북부에 몰린 이탈리아의 특성상 남부의 축구클럽은 재정 여건이 좋지 않아 늘 전력에서 열세였다. 지역감정도 치열했다. 북부를 대표하는 강팀 유벤투스와 AC밀란, 인터밀란의 팬들은 '이탈리아의 하수구'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으며 나폴리를 조롱하고 차별했다. 21세기 들어 유벤투스(11회), 인터밀란(6회), AC밀란(3회), 그리고 중부인 로마(1회)만이 세리에A 우승에 성공한 터였다.
소속팀 내 출전시간 2위…팀 내 비중 절대적
2004년 이탈리아 최대 영화제작사 필마우로 회장인 아우렐리오 데라우렌티스가 세리에C로 추락한 팀을 인수하며 재건의 꿈은 시작됐다. 나폴리를 기반으로 해온 집안 배경 때문에 데라우렌티스 회장은 이전부터 팀에 큰 애정을 보였다. 인수 후 투자를 늘렸고 2년 만에 승격에 성공했다. 라파엘 베니테스, 마우리치오 사리, 카를로 안첼로티 등 유명 감독과 경쟁력 있는 선수들을 영입했다. 하지만 리그 성적은 2위가 한계였다. 유벤투스에 막혀 준우승만 4차례 기록했다.
지난 시즌 3위였던 나폴리는 올 시즌이 시작될 때 로마와 함께 4~5위권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이런 평가 속에는 한 가지 놓친 변수가 있었다. 변방에서 온 숨은 진주들이었다. 빅터 오시멘(나이지리아), 흐비차 크바라츠헬리아(조지아), 잠보 앙귀사(카메룬), 그리고 대한민국의 괴물 김민재였다. 이들은 모두 가능성은 인정받았지만 우승을 이끌 주역으로까지 여겨지진 않았다. 오히려 첼시로 간 칼리두 쿨리발리나 파리생제르맹에 입단한 파비안 루이스의 공백만 언급됐다. 특히 세리에A 최고 수비수 쿨리발리의 대체자로 김민재를 데려온 것은 엄청난 도박으로 묘사됐다.
김민재는 나폴리 입성 한 달 만에 모두의 의구심을 지웠다. 지난해 9월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로 세리에A 이달의 선수상을 수상하는 놀라운 퍼포먼스를 보였다. 지난 3월에도 이달의 선수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시즌 내내 김민재의 경기력은 기복이 없었다. 불과 몇 달 사이 나폴리 팬들은 쿨리발리를 그리워하지 않는 상황이 됐다. 빅리그로 건너가 한 시즌 만에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 김민재는 라커룸에서도 주역이었다. 동료들과 함께 팀 응원가를 부르며 춤추고, 염색 스프레이로 하늘색 머리를 만들며 우승을 만끽했다. 김민재는 우승 직후 개인 소셜미디어를 통해 "우리가 이탈리아 챔피언이다. 역사적인 성과의 일원이 돼 매우 기쁘고 영광스럽다"는 소감을 밝혔다.
팀스포츠인 축구는 개인의 월등한 퍼포먼스가 모여 성과를 낸다. 그런데 그 조건이 달성됐다고 무조건 팀의 성과로 연결되진 않는다. EPL 득점왕을 차지한 손흥민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공격수로 인정받지만 함부르크, 바이어 레버쿠젠, 토트넘을 거친 지난 13년의 프로 커리어에서 클럽 소속으로 정상에 선 적이 한 번도 없다. 손흥민의 팀 동료이자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주장인 해리 케인 역시 마찬가지다. 리버풀의 전설 스티븐 제라드도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성공했지만 그토록 염원했던 EPL 우승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고 은퇴해야 했다.
김민재는 빅리그 입성 1년 만에 그 힘든 문을 열었다. 타이밍 좋게 나폴리에 승선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팀의 운명을 바꿨다. 한국 선수의 유럽 빅리그 우승 기록은 김민재가 처음이 아니다. 박지성이 잉글랜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시절 4회를 기록했다. 김민재의 대표팀 동료인 정우영도 독일 바이에른 뮌헨 시절 우승 스쿼드에 이름을 올렸다. 차이는 팀 내 비중이다. 김민재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팀 전력의 핵심 중 핵심이다. 올 시즌 김민재는 휴식 차원에서 단 1경기만 결장했을 뿐 나머지 리그 33경기에 모두 선발 출전했다. 출전시간도 총 2903분으로 풀백 지오바니 디로렌조(3049분)에 이어 2위다. 팀 내 비중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기록이다.
박지성은 맨유 시절 한 시즌 최다 출전시간이 1989분(2005~06 시즌)이다. 이 시즌에 맨유는 우승하지 못했다. 우승을 기록한 4시즌 중 최다 출전시간 기록은 2008~09 시즌의 1721분이고, 선발 출전 기록은 21경기였다. 무릎 수술 후 재기에 성공해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까지 뛰었던 시즌이지만 확실한 주전이라 정의하기엔 애매했다. 박지성은 맨유 시절 출전시간에서 팀 내 13~14위에 해당, 선발과 교체를 오가는 로테이션 멤버였다. 출전시간 이상의 전술 가치가 워낙 탁월했고, 큰 경기에서 중요한 골을 넣는 '빅게임 유닛'으로 큰 위상을 누렸다.
정우영(현 프라이부르크)은 바이에른 뮌헨 시절엔 2군이 주 활동 무대였다. 2018~19 시즌 우승 당시 1경기 출전 기록이 있지만 5분에 불과했다. 김민재 이전에 아시아인으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세리에A 정상에 섰던 일본의 슈퍼스타 나카타 히데토시도 2000~01 시즌 당시 프란체스코 토티의 백업 역할로 531분 출전에 그쳤다.
맨유와 맨시티, 벌써 치열한 영입 경쟁 돌입
내용과 평가도 압도적이었다. 김민재는 선수 평점에서 시즌 내내 세리에A 시즌 베스트11 자리를 굳게 지켰다. 이탈리아의 대표 스포츠 일간지인 '코리에레 델로 스포르트'는 우승 확정 후 나폴리 선수들의 시즌 평점을 발표했다. 김민재는 "벽이 되어 페널티박스를 점령하며 편견을 없앴다. 쿨리발리의 그림자까지 지웠다"는 평가 속에 10점 만점을 받았다. 스팔레티 감독과 빅터 오시멘, 흐비차 등 총 6명만 이 점수를 얻었다.
유럽에서도 수비의 본고장으로 통하는 이탈리아 무대에서 아시아인 김민재가 정상에 오른 것도 특이점이다. 190cm, 88kg의 큰 체격에도 발 빠른 윙어들의 배후 침투를 무력화시켰다. 제공권 장악 능력은 리그 1위였다. 빌드업이 힘든 상황에서는 직접 과감한 드리블로 상대 라인을 흔들었다. 2골 2도움으로 공격 가담 능력도 인정받았다. 단지 상대를 잘 막는 데서 그치지 않고 팀의 공격적인 축구를 전방위로 돕는 트렌디한 센터백으로 칭송받았다.
이런 김민재의 대활약은 우승 파티가 끝나고 나폴리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다음 시즌에도 김민재가 하늘색 유니폼을 입고 뛸지는 미지수이기 때문. 나폴리는 지난해 여름 2000만 유로(약 290억원)의 저렴한(?) 이적료로 김민재를 데려오는 대가로 바이아웃 조항을 설정했다. 오는 7월1일부터 2주 동안 이탈리아가 아닌 해외 클럽이 4500만 유로(약 655억원)의 이적료를 내면 김민재는 이적이 가능하다. 이적은 가능성을 넘어 현실로 변하고 있다. 김민재를 잡기 위해 맨유와 맨시티가 벌써 경쟁에 돌입했다는 보도가 이어지는 중이다. 유럽 최고의 센터백들의 몸값이 1000억원에 육박하는 이적시장 상황에서 세리에A에서 검증을 마친 김민재의 가치는 더 치솟을 수밖에 없다. 시즌이 종료되면 센터백 보강이 시급한 빅클럽들이 김민재를 영입 1순위에 두고 경쟁에 더 많이 참가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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