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기에 진심이 탄생시킨 ‘투뿔’, 와인에 진심이 탄생시킨 ‘UGA’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3. 5. 13.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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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마~이 벌믄 뭐할낀데, 소고기 사묵겠제”

10여년 전 한 인기 개그 프로그램에서 탄생한 유행어입니다. ‘돈을 많이 번다’가 ‘소고기 마음껏 사먹는다’로 치환될 만큼, 우리가 얼마나 소고기에 진심인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유행어였습니다.

기름기가 자르르한 차돌박이, 부드러운 안심, 로스의 정석 등심 뿐만 아니라 제각기 특색있는 새우살, 치마살, 부채살, 갈비살… 한우의 부위들을 생각만해도 군침이 돕니다. 우리나라처럼 소고기를 부위별로 세분화해서 먹는 곳도 드물다고 하죠. 그만큼 소고기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시중에 판매되는 한우의 개채식별표시. 등급(마블링) 부분에 ‘1++(9)’라고 적혀있다. [사진 = 전형민 기자]
개그콘서트의 ‘어르신’ 코너에 출연한 개그맨 김대희의 모습. 김대희는 코너에서 ‘소고기 사묵겠제’라는 유행어를 탄생시켰다. [사진=개그콘서트 유튜브 화면 캡쳐]
우리가 어디 한우 고기 부위만 세분화하던가요? 일명 ‘투뿔(1++, 정식명칭 일투플러스)’부터 1+, 1~3등급 등 한우 소고기의 질을 따지는 등급은 무려 다섯 단계나 됩니다. 지난 2019년부터는 1++를 다시 3가지(7·8·9등급)로 세분화해 현재는 총 8가지에 이릅니다. ‘투뿔’은 맛있는 최고급 소고기의 대명사로 쓰이죠.

우리가 한우에 진심이듯, 수천년 간 와인을 마셔온 유럽인들도 와인에 진심입니다. 한우처럼 다양한 등급제를 나라, 지역별로 만들어서 시행해오고 있죠. 오늘은 와인 종주국 이탈리아의 등급 체계를 간단히 둘러보겠습니다. 시행을 코앞에 둔 키안티 클라시코 지역의 새로운 등급체계도 소개합니다.

와인을 고르는 치트키, 레이블을 잘 보자
대형마트나 로드숍에서 와인을 골라본 적 있나요? 가뜩이나 잘 모르는데, 아무거나 일단 집어든 병에 그나마 친숙한 영어도 아닌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이 잔뜩 써있다면 머리 한쪽이 지끈 아파옵니다. 이런 복잡함이 와인을 우리 사회 대중 주류(酒類)로 자리잡지 못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와인쟁이로서 변명하자면, 레이블에 복잡하게 적힌 정보들은 구매자에게 풍부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양조자의 불가피한 선택입니다. 그만큼 오랜 역사와 전통, 다양한 이야기를 지닌 자신의 와인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하죠. 그리고 한번 잘 정리해두면, 레이블만 보더라도 병 속에 담긴 와인의 캐릭터를 짐작해볼 수 있는 치트키가 되기도 합니다.

이탈리아 와인 품질 피라미드. 초창기 슈퍼투스칸은 최하위 등급인 Vino(VdT)를 받았다. 현재는 슈퍼투스칸의 원조격인 사시까이아의 경우, DOC 등급으로 상향됐다. [출처=italianwinecentral.com]
이탈리아 와인 등급제, 망할뻔 하다
이탈리아 와인 등급체계는 DOCG(Denominazione di Origine Controllata e Garantita·최상위)와 DOC(Denominazione di Origine Controllata·상위), IGT(Indicazione Geografica Tipica·지리적 표시 와인)와 VdT(Vino da Tabola·테이블 와인) 등 크게 네 가지로 나뉩니다.

사실 이탈리아의 등급제는 와인 등급 체계가 품질의 기준이 되지 못하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한때 아무도 따르려하지 않아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뻔 했거든요. 과거 와인프릭에서 언급했었는데요. 등급제와 상관 없이 절대적인 인기를 누린 슈퍼투스칸 덕분입니다.(와인프릭 슈퍼투스칸편 참고)

키안티 클라시코 품질 피라미드. 가장 기본급부터 상급으로 갈수록 아나타, 리제르바, 그란 셀레지오네로 불린다. [출처=와인21]
초창기 슈퍼투스칸은 이탈리아 와인 중 가장 비싼 축에 속하고 전세계인이 찾는 와인이지만, 등급 체계상 최하위인 VdT에 속했습니다. 이탈리아 와인 등급체계가 유난이 엄격하기 때문입니다.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해서는 토착 품종의 포도를 규정 비율 이상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양조 역시 오래 전부터 내려온 전통의 방식으로만 양조도 해야 하는데요. 토착 품종이 아닌 국제 품종을 변주해 양조한 슈퍼투스칸은 최하위 등급을 받았죠.

그런데 슈퍼투스칸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으면서 오히려 최상위 등급인 DOCG 와인들보다 더 비싼 값에 팔리기 시작합니다. 이는 등급체계가 유명무실해지는 계기가 됐고, 너도나도 등급을 무시하고 와인을 양조하게 됩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1992년 등급 체계 관련 법률이 개정되면서 대부분 슈퍼투스칸이 IGT 등급으로 상향, 원조격인 사시까이아는 DOC 등급을 획득했습니다. 어느 정도 상위 등급으로 인정을 받은 셈이랄까요.

키안티 클라시코가 도입을 앞둔 UGA 지도. 키안티 클라시코 지역을 토양과 기후의 특성에 따라 11개의 작은 지역으로 쪼갰다. 떼루아에 따라 생산되는 와인의 풍미도 달라진다. [출처=키안티 클라시코 와인협회]
검은 수탉의 새로운 도전, UGA
앞서 여러 차례 소개해드렸던 키안티 클라시코는 와인 종주국 이탈리아 내에서도 가장 오래된 양조 역사를 가진 곳입니다. 요샛말로 근본이랄까요. 키안티 클라시코 양조자들의 연합체인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 협회(Consorzio Vino Chianti Classico)는 내년 설립 100년을 맞는데요. 기존 이탈리아법에 따른 DOCG 등급체계에 자체적으로 준비한 UGA(Unita Geografiche Aggiuntive)를 추가로 도입하는 새로운 도전에 나섭니다.

UGA는 키안티 클라시코 지역을 떼루아의 특성에 따라 11개의 지역으로 잘게 나누는 추가적 지리 표시입니다. 마치 프랑스 부르고뉴가 와인의 등급을 레지옹(region·지역)에서 코뮌(commune·읍), 빌라주(village·마을), 크뤼(cru·밭) 단위까지 쪼개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세세한 분류가 가능한 것은 석회질 점토인 알베레제(Alberese)부터, 갈레스트로(Galestro)로 불리는 회색 편암 점토, 마시뇨(Masigno·단단한 비석회질 사암), 피에트라포르테 마시뇨(Pietraforte Macigno·석회질 사암), 실라노(Sillano·점토질 이회토) 등 키안티 클라시코 지역의 토양이 다양한 특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특성있는 토양에서 자란 포도로 양조한 와인들은 사뭇 다른 맛과 풍미를 냅니다. 숙련된 전문가라면, 설사 같은 품종이더라도 양조에 쓰인 포도가 어디서 자랐는지를 유추해낼 수 있을 정도죠. 뿌리를 깊게 내리고 토양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다양한 영양분을 흡수해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만의 매력입니다.

키안티 클라시코 UGA 11곳 중 한 곳인 판자노(Panzano) 지역 석회질 사암(Pietraforte Macigno). 키안티 클라시코에서 발견되는 토양의 특징 중 하나다. 잘린 단면이 깔끔해서 마치 조각난 암석 같아 보이지만 가볍고 진흙이 바싹 마른듯 매끈한 겉표면이 인상적이다. [사진=전형민 기자]
베낄 수 없는 것은 오직 땅과 기후 뿐
UGA가 적용되는 것은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 중에서도 가장 상급인 그란 셀레지오네 등급 입니다. 기존 키안티 클라시코에서 생산된 와인은 크게 아나타(Annata), 리제르바(Riserva), 그란 셀레지오네Gran selezione) 등급으로 나뉘는데요.

아나타는 최소 12개월 숙성, 리제르바는 최소 24개월(병숙성 3개월 포함), 그란 셀레지오네는 최소 30개월(병숙성 3개월 포함)을 숙성해야 합니다. 조반니 마네티(Giovanni Manetti)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협회장은 “만약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올해 중 UGA가 공식 도입될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올해 도입된다면 그랑 셀레지오네 2020년 빈티지부터 UGA 표시를 달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쯤되면 궁금해집니다. 이들이 왜 굳이 등급을 나누고 새로운 단위를 도입하는지요.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은 이미 세계 시장에서 공고한 자리를 잡은 베스트셀러거든요. 굳이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 시장에 혼란을 줄 필요가 있을까요.

마네티 협회장은 “와인을 만드는 모든 요소를 보면, 옮길(베낄) 수 없는 것은 오로지 땅과 기후”라며 “이를 와인에 표현해내는 게 바로 독창성”이라고 답했습니다. 키안티 클라시코 만의 토양과 기후를 담아 차별화된 최고급 와인을 생산하겠다는 자신감이 돋보입니다.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땅과 기후, 그리고 자신들의 양조 기술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키안티 클라시코의 그랑 셀레지오네 2020년 빈티지가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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