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도 퀸메이커도 없는 한국 정치…尹정부, 여가부 폐지 앞서 고민할 것들[윤다빈의 세계 속 K정치]

윤다빈 기자 2023. 5. 13.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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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의 수준은 왜 나아지지 않을까?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를 각각 두 번씩 취재하며 가졌던 의문입니다. 닫힌 섬과 같은 여의도만 보고선 해답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시야를 넓혀 세계 각국의 정치 현실을 살펴보고 한국 정치와 신랄하게 비교하겠습니다. 때로는 ‘우리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위로를, 때로는 우리 정치의 품격을 높일 해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언젠간 K팝, K드라마, K푸드처럼 K정치도 호평받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최근 일본에서는 여성 정치인 대상 성범죄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올해 1월 거리 연설을 하고 있던 모델 출신 여성 정치인에게 사진을 찍자며 접근해 껴안으며 입을 맞춘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지난해 6월에는 이노세 나오키 전 도쿄도지사가 유세 중 같은 당 여성 후보의 어깨, 가슴을 만지는 영상이 온라인에 퍼지며 성추행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여성 정치인 대상 범죄가 늘어나자 올해 2월에는 ‘여성의원 학대 상담센터’가 개설됐습니다. 센터가 진행한 기자회견에 참석한 한 도쿄도의원은 “남성 유권자와 악수할 때 팔과 겨드랑이까지 손이 올라오는 일이 다반사였다”며 “밤에 술 취한 사람에게 강제로 안겼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유신회 소속 이노세 나오키 전 도쿄도지사가 지난해 6월 거리 유세 중 같은 당 여성 정치인 에비사와 유키의 몸을 만지는 모습이 담긴 영상. 일본에서는 여성 정치인을 상대로 한 성범죄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유튜브 캡처

오죽하면 일본 내각부는 지난해 4월 실제 있었던 성적 괴롭힘 사례 1324건을 바탕으로 정치인 학대 방지 드라마를 제작해 유튜브에 공개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여성 정치인은 ‘여자는 젊고 예쁘면 정치인이 될 수 있다’는 모욕을 듣고, 남자친구가 있냐는 SNS 메시지를 수시로 받고 있습니다.

● K정치에는 문소리도 김희애도 없다

지난달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퀸메이커’는 비영어권 TV 부문 1위를 차지하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극 중 문소리 배우는 서울시장 선거에 뛰어든 인권변호사 오경숙 역할을, 김희애 배우는 오 변호사의 서울시장 선거를 진두지휘하는 ‘퀸메이커’ 황도희 배역을 연기합니다. 여성이 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해 현실 세계의 암투를 극복하는 모습이 펼쳐집니다.

퀸메이커는 이미지 메이킹의 귀재이자 대기업 전략기획실을 쥐락펴락하던 황도희(김희애)가 정의의 코뿔소라 불리며 잡초처럼 살아온 인권변호사 오경숙(문소리)을 서울시장으로 만들기 위해 선거판에 뛰어들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넷플릭스 시리즈다. K정치에서 여성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판타지 드라마’에 가깝다. 넷플릭스 캡처

K정치의 현실은 드라마와는 다릅니다. 지난해 대선에서 여성 유력 후보는 없었습니다. 국민의힘은 여성 후보가 단 한 명도 출마하지 않았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후보, 정의당 심상정 후보가 출마했지만 선거에서의 존재감은 미약했습니다.

우리나라 21대 국회의원 당선자 300명 중 여성은 57명으로 19%입니다. 21대 국회에서 역대 최다 여성 당선자가 나왔음에도 지난달 기준 세계 평균인 26.8%보다 낮습니다. 국제의회연맹(IPU)이 193개국 중앙의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을 집계해 순위를 매긴 자료를 보면 한국은 2018년 기준으로 전 세계 120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여성 후보에게 인색한 지방 권력으로 가면 상황은 더 열악합니다. 지난해 지방선거를 통해 당선된 17명의 광역단체장 중 여성은 한 명도 없었고, 기초단체장은 전체 226명 중 7명에 그쳤습니다. 여성 할당제가 적용된 비례대표를 제외하면 광역지역구의원 14.8%, 기초지역구의원은 25%만이 여성입니다.

국회의 경우 4~9급 보좌진 3명 중 1명은 여성입니다. 가장 높은 자리인 4급 보좌관은 7~8명 중 1명만이 여성입니다. 대신 9급 비서관 10명 중 6명이 여성입니다. 하급일수록 여성 보좌진의 비율이 높고, 위로 올라갈수록 낮아지는 피라미드 구조가 여전합니다.

● 학연‧지연‧혈연…네트워크 소외되는 여성들

정치는 어느 분야보다도 연줄과 조직력이 중요한 영역입니다. ‘공천이 생명’인 정치인으로서는 숙명과도 같은 일이죠. 여성 정치인을 가로막는 장벽도 여기서 발생합니다. 여성 정치인 대부분은 연줄의 크기와 강도가 약합니다. 지역구에서의 조직 동원 능력도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이죠. 그렇기에 주로 대중적인 인지도에 의존해 정치적 경력을 쌓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국민의힘에서 인지도가 높은 한 여성의원과 식사를 하면서 이 주제를 두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해당 의원은 이런 설명을 내놨습니다.

“여성 의원들은 남성 의원보다 상대적으로 학연, 지연, 혈연에 기대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선거 때 자신을 도와준 이들의 조직적 도움이나 대중적 인지도가 유일한 정치적 자산이다. 결국 이 두 집단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는데, 그러려면 크고 작은 선거에 계속 출마해야 한다. 준비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잦은 출마를 하다 보면 실수를 하거나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미 워싱턴포스트는 한국의 21대 국회의원 선거를 분석한 기사에서 “(한국은) 일반적으로 높은 인지도와 강력한 지원 네트워크를 가진 후보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는 여성 후보자에게 도전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성 보좌진의 경우도 한국 사회 특유의 학연, 지연에 따른 네트워크 형성 과정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입니다. 국회에는 학벌, 지역, 나이 등으로 이뤄진 크고 작은 모임이 정말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국회 특성상 승진, 선거 캠프 파견, 외부 기관 취업 등 이동이 잦기 때문에 나를 끌어줄 수 있는 사람과의 우호적 관계는 필수입니다.

사적 모임은 대부분 남성 보좌진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만나 정보를 교류하고, 네트워크를 쌓습니다. 남성 중심 술자리 문화에서 여성 보좌진은 소외되는 편입니다. 여성 보좌진의 경우 결혼과 출산, 육아가 발목을 잡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여성 정치인 개개인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민주당 일부 여성 의원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비서 성추행 사건 당시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으로 규정했습니다. 최근 박 전 시장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다큐멘터리가 제작됐지만 2차 가해의 문제를 짚는 민주당 여성 의원은 없습니다.

‘젠더 문제’에 대한 정체성과 소신은 없어도 외모를 앞세워 소위 ‘얼굴마담’을 자처하는 의원은 심심찮게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과 유사한 캐릭터의 후배 여성 정치인을 잠재적 경쟁자로 생각해 음해하고 싹을 자르곤 하죠. 지금 고위직에 있는 한 여성 정치인은 자신과 비교될까봐 여성 보좌진에게 화장을 진하게 하거나 화려한 옷을 입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치 현장에서 여성 정치인이 겪는 일을 취재해보면 단순히 개인의 문제만을 탓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미투운동을 거치면서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여의도 정치권에서 여성 보좌진, 당직자를 상대로 한 성범죄는 꾸준히 일어났습니다.

한 여성 대변인은 회식 자리에서 남성 고위 당직자에게 “분 냄새가 좋으니 가까이 와서 앉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여성 보좌진은 “영감(의원)이 자꾸 저녁 늦은 시간에 따로 술자리로 불러내 고민”이라고 토로했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여성할당제, 여성가족부 폐지 등 반페미니즘 관련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사회를 이끌 리더라면 할당에 기대는 게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능력을 인정 받아야 한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이 남성 정치인보다 차별적 대우를 받거나 불공정 경쟁에 놓이는 현실도 함께 논의해야 공평한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인 지난해 2월 페이스북에 여성가족부 폐지를 재차 강조하는 글을 올렸다. 대선 기간 캠프 내홍으로 지지율 내림세를 겪던 윤 대통령은 여가부 폐지를 주장하면서 이대남의 표심을 흡수했다. 페이스북 캡처


● 193개 유엔 회원국 여성 수반은 13개국뿐

중국을 제치고 전 세계 인구 1위 국가로 등극한 인도는 전통적으로 가부장적 사회 질서를 바탕으로 여성의 성역할을 제한해온 나라입니다. 올해 3월 인도 유력 영자 일간지인 인디언 익스프레스(Indian Express)가 분석한 인도 여성 정치의 현실은 K정치와 묘하게 닮았습니다.

2021년 10월 기준 인도에서 전체 국회의원 중 여성은 10.5%입니다. 인도 주와 연방 자치령 전체에서 여성 장관은 3명뿐입니다. 내무부, 재무부, 국방부, 인사부 장관에는 한 번도 여성 장관이 임명된 적이 없습니다. 여성은 사회복지, 문화, 여성 및 아동 청소년과 같은 소위 ‘부드러운’ 부처에 써야 한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있다고 합니다.

인도 여성 정치인은 제한된 네트워크 속에서 불평등한 기회에 놓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과 가정의 양립이 어려운 근무 조건도 정치 참여를 주저하게 하는 요인입니다. 온라인상의 폭력과 괴롭힘으로 인해 정치적 발언을 하기 어려운 여건도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올해 3월 기준으로 193개 유엔 회원국 중 여성이 정부 수반으로 있는 국가는 13개국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59개국만이 여성 지도자를 배출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정치에 도전하는 여성의 절대적 숫자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교육 수준이 비슷하고 공직을 맡은 경험도 유사한 남성과 여성에게 ‘선출직에 도전할 의사가 있냐’고 물어보면 남성의 긍정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결과가 성별에 따른 도전 정신의 차이를 의미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박지현 전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당의 대선 패배 이후 비대위원장이 되면서 온갖 음해에 시달렸습니다. “정치 욕심에 눈이 멀었다” “당에 의전 차량을 요구했다” “벌써 공천을 노린다” 등등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풍문으로 떠돌았습니다. 26세 여성의 벼락출세를 시기하는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박 전 위원장을 공격하고 나섰습니다.

박 전 위원장은 지난해 7월 자신의 SNS에 “민주당 동작갑 권리당원이라고 밝힌 한 남성 유튜버가 제가 사는 집이라며, 어떤 주택 앞에 서서 1시간가량 저를 비난하는 공개 스트리밍 방송을 했다”고 토로했습니다. 대학생 시절 디지털 성착취물 N번방의 제작‧유포자를 추적했던 박 전 위원장은 정치권 입문 후 오히려 사이버공격과 협박의 피해자가 됐습니다. 대선에서 2030 여성을 결집시켰던 박 전 위원장은 지금 정치권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성 정치인에 대한 차별이 계속되는 한 남성보다 정치 참여가 낮을 수 밖에 없습니다. 여성 정치인의 능력이나 도전 정신을 탓하기에 앞서 능력 있는 여성이 도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정치 환경을 고민할 때입니다. 이것이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꺼낸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보다 의미 있는 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윤다빈 기자 empt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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