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응에 휘둘리는…‘올인 외교’의 부작용

김찬호 기자 2023. 5. 13.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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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5월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한·일 정상 확대회담에서 악수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주간경향] 미국과 일본을 향한 윤석열식 ‘외교’가 질주하고 있다. 지난 3월, 한·일 정상회담으로 시작한 ‘공조’ 외교는 한·미 정상회담을 거쳐 5월 19일 개막하는 일본 히로시마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로까지 이어지게 됐다. 특히 이번 G7 회의에서는 한·미·일 3국 정상의 만남이 예정돼 있어 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한 공동협력 방안이 논의되리란 전망이 나온다.

한·미·일 공조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 역시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한·미 정상회담 직후인 지난 5월 7~8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한국을 방문해 한·일 협력에 이상이 없음을 재확인했다. 김대중 정부 이후 양국 우호를 상징한 ‘셔틀외교’가 재개되며 윤 대통령의 일본을 향한 ‘구애’도 화답 받은 모양새다. 특히 기시다 총리는 윤 대통령의 G7 참석 전 조기 방한을 고집한 것으로 알려지며 한국 여론까지 고려하는 전략가임을 재확인시켰다. 미국 역시 “한·일 정상회담을 환영한다”며 “진정한 리더십의 사례”라고 평가하며 힘을 실었다.

윤 대통령은 이러한 반응을 바탕으로 취임 1주년을 맞아 그간의 가장 큰 성과로 ‘외교’를 꼽았다. 확장억제 강화, 핵협의 그룹(NCG)을 내세우며 “외교·안보만큼 큰 변화가 이루어진 분야도 없다”고 자평했다. 그런데 미국과의 협력은 역대 한국 정부가 견지해온 입장이라는 점에서 큰 변화를 체감하기 어렵다. 미국과 우의를 다지는 식의 외교가 변화로 인식되기는 힘들다는 의미다. 결국 윤석열 정부가 ‘외교 성과’를 부각시킬수록 두드러지는 것은 실질적 조치가 동반된 ‘한·일 관계’다.

한·미·일 공조는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가 핵심 구조다. 한국은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동아시아에서의 ‘한·일 협력’을 제공한다. 이 관계를 도식화하면, 한국이 미국과의 안보 거래에서 성과를 내려면 일본과의 관계를 ‘잘’ 관리해야 하는 그림이 나온다. 문제는 이 구조에서 한국은 일본의 결정에 대응하는 ‘반응국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미 이와 관련한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일본에 양보만 하느냐”는 볼멘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 대표적이다. 일본의 대응 역시 유사한 징후다. 외교가에는 “아이보시 고이치 주한일본대사가 일을 안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떠돈다. 역사문제에 민감한 한국 야당과의 접촉은 줄인 채 한국 정부로부터 최대한 얻어내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관건은 정부가 해당 구도를 언제까지 모른 척할 수 있느냐다. 내년 4월 총선이 주목받는 것도 그래서다.

일본을 옹호해야 하는 구조적 모순

“혹독한 환경에서 많은 분이 매우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겪으셨다는 것에 대해 마음이 아프다.”

지난 5월 7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총리가 ‘개인 자격’으로 말한 한·일 역사문제에 대한 발언이다. 대통령실 표현대로라면 “부담 갖지 말고 오라”는 윤 대통령 발언에 감응한 것처럼도 보인다. 일각에서는 기시다 총리가 일본 자민당 내 소수 파벌인 ‘고치카이’의 수장이란 점까지 들어 의미부여를 한다. 자민당 최대 파벌이자 보수적인 ‘아베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한국 정부를 배려했다는 것이다.

일본 총리의 공식 입장도 아니고, 사과라기에도 불명확한 표현은 두 가지 상황을 잘 보여준다. 하나는 외교에서 잔뼈가 굵은 기시다 총리의 특성이다. 이미 일본 내부에서 “윤 대통령을 전략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 상황이다. 기시다 총리의 발언은 역대 일본 정부의 역사인식에서 한발 더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않은 상태에서 외교적 필요만 절묘하게 충족시켰다. “완전한 승리는 위기를 부른다”는 외교사의 격언을 잘 안다는 평가도 그에게 따라붙었다.

기시다 총리가 국내 정치적으로 손해를 본다는 증거도 없다. 박정진 일본 쓰다주쿠대 교수는 “한국 언론에서 기시다 총리 지지율이 한·일 정상회담 결과로 상승한 것처럼 보도하지만 인과관계가 검증되지 않았다”며 “이미 3월부터 기시다 내각에 대한 지지율 반등 조짐이 있었고, 해당 기조가 이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일 정상회담 한 번에 일본 내각 지지율이 폭등할 정도로 일본 여론이 한국에 관심이 많지는 않다”고 덧붙였다.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1박2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부부와 지난 5월 7일 서울 한남동 관저에서 만찬을 하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다른 하나는 이에 대한 정부·여당의 반응이다. “당장 100% 만족하지는 못해도 우리가 바라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거나 “지난 3월의 입장보다 진전된 태도”라고 설명하는 식이다. 기시다 총리의 발언이 나온 뒷이야기부터 의미 해석까지 정부 관계자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다. 그런데 기시다 총리의 발언은 “20세기 전시하에 많은 여성이 존엄과 명예에 깊은 상처를 입었던 과거를 가슴에 계속 새기겠다”는 과거 일본 총리의 발언과도 비교해볼 수 있다. 인류가 겪은 아픔에 대한 감상 수준의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두 발언은 닮았다. ‘가슴에 새긴다’는 표현을 반성에 대한 의지로 해석한다면 후자가 한국 입장에서는 더 나은 표현으로도 읽힌다. 해당 발언은 2015년 아베 신조 전 총리가 발표한 담화 내용이다.

정부·여당이 긍정 평가한 기시다 총리의 인식이 아베 전 총리의 인식보다 전향적이라는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문제는 윤석열 정부가 만든 한·일 관계의 구조상 이러한 일본 정부의 발언, 결정을 한국 정부가 긍정 해석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정부의 한·일 관계 기조는 어떤 상황이든 ‘문제없다’는 쪽으로 자기 구속을 하게 된다”며 “사실 국가 간 관계에서 이렇게까지 양보하고 들어가면 상대국이 작은 호응이라도 할 수밖에 없고, 이걸 성과라고 해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에 놓이게 된다”고 말했다.

“과거사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고 해서 현안과 미래 협력을 위해 한 발짝도 발걸음을 내디뎌서는 안 된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윤 대통령의 발언도 같은 맥락에 있다. 주로 강제동원 해법 등에 대한 국내 반발을 비판한 내용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사실관계를 재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사법부 판결로 한·일 관계가 경색됐을 때, 당시 문재인 정부는 일본 측에 역사와 경제·안보 문제 등을 분리하자고 여러 차례 제안했다. 일본은 당시 화이트리스트 배제 등 선제조치를 취하며 우리 측에 역사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했다. 윤 대통령 발언은 전임 정부, 한국 국민을 대상으로 하기 이전에 역사와 경제·안보를 분리하지 못한 아베-스가-기시다로 이어지는 일본 내각을 먼저 향했어야 한다는 평가가 나오는 까닭이다.

윤 대통령의 발언과 행보가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더 큰 문제다. 한·일 정상회담 전 마치 선물처럼 강제동원 문제의 해법을 제시한 것은 윤 대통령이었다. ‘통 큰 결단’이라는 포장지를 벗기면 “강제동원 문제 해법을 만들어오라”는 일본 정부의 요구에 호응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된다. 이는 윤 대통령 스스로 과거사 문제를 정리하지 않으면, 협력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는 비판을 낳는다. 한·일 관계 개선을 한미동맹 강화를 위한 전제로 인식하고 해결하려다가 각종 모순에 빠져든 꼴이다. 이는 그 결과로 탄생한 한·미·일 공조 역시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는 토대 위에 세워졌음을 의미한다.

산 넘어 산, 한·일 관계 지속될 수 있나

윤석열 정부가 최대 ‘성과’로 꼽은 외교는 윤 대통령의 지지율이 여전히 30% 중반대에 머무는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여론조사 결과대로라면 조사 참여자의 다수는 외교를 윤 대통령의 ‘실책’으로 꼽았다. 부정평가의 주요 근거는 한·일 관계에서 나타난다. 여론 수렴 없이 ‘집단기억’인 역사문제를 일방적으로 결정한 상황이 반발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결정에 한국 정부 지지율이 영향을 받는 구조를 형성했다. 당장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사도광산 세계문화유산 등재 등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면 한국 정부가 딜레마에 빠지는 상황이다.

지난 5월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동시에 열린 한·일 동맹 구축 중단 집회(앞)와 기시다 총리 환영 집회 / 권도현 기자

오염수 문제는 과거사 문제와는 맥락이 다르다. 이는 윤석열 정부가 강조한 현안, 미래의 문제다. 한·일 정상회담 직후 양국 정상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관련 한국 전문가들의 현장 시찰단 파견에 합의했다. 이를 두고 윤 대통령은 “과학에 기반을 둔 객관적 검증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 반면, 기시다 총리는 “IAEA(국제원자력기구) 리뷰를 받으면서 높은 투명성을 갖고 과학적인 근거에 바탕을 둔 성의 있는 설명을 한국에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미묘한 차이지만 시찰단이 후쿠시마 원전을 ‘직접 검증한다’와 ‘설명을 한다’가 맞붙은 셈이다. 양 교수는 “일본 내에서는 절차에 따라 후쿠시마 오염수를 방류하는 것이 원칙인 상황”이라며 “IAEA 리뷰도 있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시찰을 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요식행위”라고 말했다.

사도광산 세계문화유산 등재 문제 역시 기존의 강제동원 문제와는 다르다. ‘배상을 할 것이냐’와 ‘역사를 인정할 것이냐’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일본 사도광산은 과거 조선인을 대규모로 강제동원한 곳이다. 일본 정부는 그러나 명부의 존재도, 강제동원 자체도 인정하지 않는다. 기시다 총리는 “근거 없는 중상에 대해 의연히 대응하겠다”고 사도광산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해당 사안에 윤석열 정부는 ‘과거사 문제와 현안의 분리’, ‘엄중한 안보 상황’ 등을 들고나올 수 있다. 문제는 앞으로 6개월 안에 해당 사안을 매듭짓지 못하면 외교 문제가 국내정치 사안으로 들어오게 된다는 점이다. 당장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있다. 이미 전문가들은 지지율 30% 중반대의 대통령을 내세워서는 여당이 총선에서 승리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윤석열 정부가 성과로 포장 중인 한·일 관계에서 악재가 발생하면 대통령 지지율은 더욱 급락할 수 있다. 이미 한·미·일 공조라는 구도에 깊숙이 발을 담근 윤석열 정부가 정책을 선회하기는 어렵다. 익명을 요구한 외교전문가는 “국내 지지율이 낮은 한국 정부를 상대하며 일본은 하나라도 더 얻으려고 하지, 양보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며 “총선이 가까워질수록 한국 정부는 한·일 관계가 시끄럽지 않게 또 일본에 요청하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애초에 외교·안보 참모들이 이 구조가 초래할 예상 문제를 대통령에게 제대로 조언한 것인지조차 잘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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