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아름다운 잎사귀…5월, 초록빛 잔치가 시작됐다 [ESC]

한겨레 2023. 5. 13.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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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식물학자S의 열두달 식물일기]식물학자S의 열두달 식물일기 신록의 축제
폭발적으로 피어난 5월의 새순
연푸른 안개처럼 숲을 뒤덮고
광합성으로 영양분 생산 채비
스미소니언 식물 연구소 주변 메릴랜드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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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아름다운 잎사귀를 만나는 계절이다. 3·4월 봄꽃들의 잔치가 끝나면 가녀린 잎들이 펼쳐진다. 나는 이 여린 잎사귀 색을 좋아한다. 그건 연두색이나 초록색이라 부르기엔 부족한 것 같다. 스스로 빛을 내는 초록색이랄까. 그래서 ‘신록’(新綠)이라는 단어가 생긴 것 같다. ‘새로운 푸른빛’. 신록의 계절, 5월이다.

숲이 깨어나고 있다. 물론 겨우내 변함없던 마른 가지에 봄꽃이 피어날 때도 숲이 깨어나는 것 같지만 지금처럼 작은 잎사귀들이 온 천지에 흩뿌려져 피어날 때 진짜 숲이 깨어난다고 느낀다. 연한 새싹들이 곳곳에서 비집고 나온다. 미세한 틈과 균열들, 마디와 가지 끝마다 초록색을 피워올리는 식물의 생명력에 넋을 놓게 된다.

나무는 나무대로, 풀은 풀대로 숲 속 구석구석 작은 잎이 촘촘히 솟아난다. 하나씩 살펴보면 동그란, 길쭉한, 갈라진, 톱니가 있는, 매끈한 초록색 조각들이 작지만 저마다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 납작한 도형들이 모두 다 수평으로 펼쳐져 햇빛을 받으려 한다. 지금은 작은 초록 도형들이 점점이 뿌려진 듯 보이지만 여름이 되면 잎사귀들이 넓게 펼쳐져 거대한 지붕처럼 숲을 덮을 것이다.

지평선까지 펼쳐진 푸른 숲

내가 있는 연구소 숲 속엔 높은 첨탑이 있다. 철골로 만들어진 탑은 뱅뱅 돌며 계단을 오르게 돼 있고 그 꼭대기엔 기상관측과 실험을 위한 장비들이 설치돼있다. 연구소가 있는 메릴랜드의 숲은 오랫동안 잘 보존돼 거대한 나무들로 가득하다. 그런 나무들보다 첨탑은 더 높아서 꼭대기에 오르면 숲을 내려다볼 수 있다.

4년 전 선임연구관께서 ‘첨탑에 같이 올라가 보자’고 하셔서 무심코 따라갔다. 아래에서 보았을 때는 만만히 생각했는데 높이 올라가자 첨탑이 약한 바람에도 휘청거려 너무 무서웠다. 결국 꼭대기에서 본 전망은 기억나지 않고 아찔했던 느낌만 남았다. 그런데 올해에도 그분이 또 ‘함께 올라가자’고 제안하셨다. 나는 옛 기억에 주저하다 폭발적으로 새순이 피어나는 숲을 내려다보고 싶은 호기심에 다시 첨탑에 올랐다. 흔들리는 첨탑을 경험해서인지 이번엔 그리 무섭지 않았다.

산이 없어 지평선까지 펼쳐진 푸른 숲은 장관이었다. 멀리 동쪽 지평선을 따라 체서피크만이 보였는데 그 먼 곳까지 가려지는 것 하나 없이 다 숲이었다. 나는 첨탑 꼭대기에서 한참 동안숲의 푸른빛이 끝없이 넘실거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식물이 어떻게 저절로 초록색 덩어리로 자라나는가.’ 숲을 바라보니 나는 옛날 한 과학자가 새삼 왜 이 궁금증을 가졌는지 이해되었다. 식물은 사계절 주변에 늘 있지만 매년 이맘때 새로 나는 초록잎들은 항상 경이롭기 때문이다.

17세기 벨기에 화학자 얀 밥티스타 판 헬몬트는 토양의 질량과 식물이 자라며 증가한 질량을 비교해 토양의 질량이 거의 줄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초록색 덩어리가 토양을 흡수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물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뒤 영국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밀폐된 공간에 생쥐를 홀로 두면 죽지만 식물과 함께 두면 둘 다 생존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광합성과 호흡에 필요한 이산화탄소와 산소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또 네덜란드 생물학자 얀 잉엔하우스는 같은 조건에서 햇빛이 있어야 둘 다 더 생존할 수 있음을 깨달았고 식물의 성장엔 햇빛도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오랜 시간 과학자들의 실험을 통해 비로소 식물의 광합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는 모두 다 광합성에 대해 알고 있다. 광합성이 엽록체에서 일어나고, 엽록체에는 녹색의 원천인 엽록소라는 색소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머릿속에 광합성 회로를 떠올려 봐도 이 시기 새싹이 돋아나 천지를 초록색으로 물들이는 광경은 여전히 신기하다. 태곳적 땅 위에 살지 않던 초기 식물이 진화를 통해 점차 땅 위를 초록색으로 덮어가는 그 과정을 매년 일부러 반복하는 것 같다. 우리에게 아름다운 장관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도 동물도 초록에 열광

첨탑 위에서 숲을 내려다보며 내가 만난 동물들이 어디에 있을까 상상해 보았다. 겨울 숲 속에선 무리 지어 뛰어다니던 사슴들과 맞닥뜨리곤 했다. 메마른 가지만 있는 숲 속엔 사슴이 쉽게 눈에 띄었고 먹을 잎이 없어 배가 고픈지 이곳저곳 분주히 헤매는 모습이었다. 지금은 연푸른 안개처럼 숲에 새순들이 가득 피어나 사슴을 숨겨주고 있다.

숲 속에 사는 난초가 몇 개의 꽃을 피웠는지 조사하러 갔을 때 코코넛만 한 거북이도 만났다. 얼굴을 내밀길 기다려봤지만 오랫동안 꼼짝하지 않아 그냥 헤어졌다. 밤늦게 연구소 숲 속을 운전할 때는 길가에서 너구리들이 나를 구경하곤 한다. 해 질 녘 길 위에서 마주쳤는데 이제 그만 가라고 해도 계속 엎드려만 있던 수달, 좁은 숲길에서 당당하게 나타나 반대 방향으로 총총 걸어가던 여우의 뒷모습.

첨탑 위에서 연둣빛과 초록빛을 발산하는 숲을 보니 내가 만난 동물들이 여기저기서 초록 잎이 났다며 즐거워하고 있을 것 같았다. 잎사귀 잔치가 시작됐다고. 동물은 다른 생물을 잡아먹어야 하는 소비자다. 광합성을 통해 스스로 양분을 만드는 생산자인 식물은 기꺼이 동물의 먹이가 된다. 동시에 숲을 이뤄 동물의 보금자리가 된다. 동물인 우리 인간에게도 말이다. 우리가 이맘때 식물의 초록에 열광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글·사진 신혜우 식물분류학자

미국 스미소니언에서 식물을 연구하고 있다. <식물학자의 노트>, <이웃집 식물상담소>를 쓰고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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