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N수학] 빌 게이츠도 주목...남아공서 에이즈와 맞선 생물통계학자
아프리카 최남단의 나라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2010년 월드컵을 치른 아프리카 대륙 내 경제 대국이지만 빈부격차와 범죄, 인종차별 같은 사회 문제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치명적인 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있는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에이즈)이다.
남아공은 세계에서 에이즈 환자가 가장 많은 나라다. 남아공의 사망 원인 1위도 에이즈다. 특히 경제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19~45세의 약 20%가 에이즈에 감염돼 남아공 경제를 흔들고 있다. 심지어 에이즈로 인해 부모가 숨지면서 ‘에이즈 고아’가 생겨나 가난, 범죄 등 또 다른 사회 문제를 키운다.
남아공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에이즈인 셈이다. 아프리카에 전 세계 에이즈 환자의 3분의 2가 몰려 있어, 아프리카 전체를 위해서라도 에이즈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다.
2022년 12월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가 자신의 블로그 ‘게이츠 노트’에 에이즈와 최전선에서 맞서 싸우고 있는 한 남아공 생물통계학자를 소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게이츠는 블로그에 혁신적인 생각이나 인류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는 인물을 소개한다. ‘빌 앤 멀린다 게이츠 재단’은 남아공 에이즈 연구기관(CAPRISA)을 지원하고 있는데, 게이츠도 주목한 이곳의 통계 분야 책임자 논할라 옌데-주마 연구원을 화상으로 인터뷰했다.
○ 에이즈와의 전쟁
“질병이 마을 하나를 무너뜨리는 모습을 본 적 있나요? 전 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오랫동안 동네에서 매주 장례식이 열렸어요. 끔찍했죠. 그들이 어떤 이유로 세상을 떠났는지 아무도 입으로 뱉진 않았어요. 하지만 모두 알고 있었죠. 에이즈 때문이란 걸요.”
논할라 연구원이 어렸을 적 겪은 에이즈에 대한 기억은 공포 그 자체다. 그가 나고 자란 곳은 제대로 된 의료시설이 없는 남아공의 한 시골 마을이었다. 점입가경으로 당시 에이즈에 감염됐다는 사실을 알리길 꺼리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치료를 제때 받는 사람도 드물었다. 어쩌면 그가 에이즈로 가족을 여럿 떠나보낸 건 당연했다.
논할라 연구원이 통계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수많은 금융 회사의 제안을 뿌리치고 바로 ‘CAPRISA’에 들어간 이유는 그래서 간단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앗아간 에이즈를 내 손으로 해결하고 말겠다는 의지였다.
CAPRISA는 2002년 미국 국립보건원이 주도해 에이즈 문제에 국제적으로 대응하고자 만든 기관이다. 남아공 정부가 에이즈 예방 기관으로 지정한 곳이며, 이곳에선 에이즈 환자의 치료 방법과 전염 양상 등에 관해 대규모 임상시험을 설계하고 연구한다.
그는 대학 마지막 학기에 들은 생물 통계 강의에서 CAPRISA를 처음 알게 됐다. 그때 보건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에이즈에 관한 통계를 해석해서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설명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내가 CAPRISA에서 그런 역할을 한다면 에이즈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변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강의를 들은 직후, CAPRISA에서 인턴으로 에이즈를 통계적으로 연구하는 일을 시작했다. 에이즈의 연령별지역별 사망률, 약물 치료율, 완치율 같은 수많은 수치가 있을 때 이중 어떤 것에 주목해야 하는지, 서로 어떤 관계인지 등을 사람들에게 쉽게 설명했다. 그리고 어떤 치료 방법이 효과적인지를 알기 위해 시험 기간, 방법, 시험에 참여하는 환자 수 등을 고려해 임상시험을 설계하고 진행한 뒤 결과를 해석했다.
○ 숫자로 보여주다
“이 일은 숫자만 잘 다룰 줄 알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인내심이 가장 필요했습니다.”
임상시험이 진행되는 지난한 시간을 견디는 건 당연했고, 무엇보다 연구에 참여하는 환자들을 관리하는 일이 가장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사가 달린 문제라 조급해진 환자가 갑자기 시험에서 이탈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예를 들어 3개월 동안 A 약물만 복용하기로 한 환자가 개인적으로 알게 된 B 약물을 먹어버리는 식이었다. 그런 일을 예방하기 위해 임상시험 전 환자에게 쉬운 언어로 시험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여야만 했다.
그렇게 일에 매진하던 논할라 연구원은 에이즈 치료에 대한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적인 지침을 바꾸는 중요한 연구 결과를 냈다. 아프리카엔 에이즈뿐 아니라 결핵도 심각하다. 그래서 결핵과 에이즈에 동시에 걸린 환자가 많은데, 이들을 어떻게 치료할지도 화두다. 기존엔 처음 6개월 동안 결핵에 집중해서 완치시킨 뒤, 에이즈를 치료해왔다.
하지만 이 방법이 정말 최선인지 궁금했던 논할라 연구원은 2005년 6월부터 2010년 7월까지 632명을 대상으로 결핵과 에이즈를 동시에 치료하는 시험을 했다. 수치를 열어보니, 기존 방법에 비해 사망률이 7%가 낮았다. 숫자로 증명되자, WHO에서 지침을 동시 치료로 과감히 바꿨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웠을 때도 논할라 연구원은 숫자로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사람들이 처음에 코로나19 백신을 믿지 못했습니다. ‘서구에서만 임상시험이 진행됐을 텐데, 과연 우리에게도 안전할까?’ 같은 우려가 많았죠.”
그와 동료들은 발빠르게 대처했다. 2021년 2월 남아공 의료종사자 약 47만 명을 대상으로 특정 백신이 남아공 사람들에게 효과가 있는지 시험했다. 결국 백신을 한 번만 투여해도 사망률이 꽤 낮아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대중에게 백신을 맞을 것을 독려하는 정부의 TV 광고에 출연해 백신의 효과를 알렸다.
“질병을 하루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일에 대한 압박감이 엄청나요. 하지만 제가 제시한 숫자로 정책이 조금이라도 바뀔 때, 통계로 생명을 구했다는 생각에 힘듦은 정말 씻은 듯이 사라져요.”
○ 소녀에게 수학 공부 강조
“무조건 수학을 해야 해. 그리고 뭐라도 영어면 무조건 읽고, 들어.”
논할라 연구원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학업을 놓지 않고, 생물통계학자로 자란 건 삼촌 페트로 싯홀의 이 말 덕분이다. 논할라 연구원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직후에 숨졌다. 그러자 그와 어머니, 삼촌, 언니, 오빠 등 가족들은 할아버지가 일하는 농장의 단칸방에서 함께 살았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을 켜야만 했고, 그들은 종종 끼니를 굶었다. 게다가 사회적 분위기상 대부분 여성이 학교에 다니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여겼다.
“남자들이 숙제와 축구를 할 동안, 여자들은 청소를 하고, 물을 길어오고, 그릇을 씻었죠. 게다가 학교가 집에서 10km나 떨어져 있어 여자들은 공부를 쉽게 포기했어요.”
그때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여자들도 계속 학교에 나가야 한다고 가족을 설득한 사람이 페트로 삼촌이었다. 제빵사였던 삼촌은 매일 아침 7시면 영어로 진행되는 뉴스 방송을 틀어 조카들에게 국제 정세를 알려줬다.
특히 논할라 연구원에게는 영어 신문 기사를 억지로 읽게 하고, 이웃 마을에서 열리는 영어 토론 그룹에도 참여하게 했다. 무엇보다 삼촌은 그에게 수학을 열심히 해야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실 그게 아니어도 수학과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시 줄루어(남아공 모국어 중 하나)밖에 몰랐다. 그런데 교과서는 온통 영어로 쓰여 있어서 영어를 몰라도 할 수 있는 수학 공부를 가장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점점 수학 문제에 도전하고 해결하는 재미를 알게 됐다. 집안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늘 수학 문제를 풀었다. 결국 대학에 들어가서 통계학을 전공했다.
여전히 논할라 연구원은 정확한 수식과 수학적인 논리를 기반으로 숫자를 해석하는 통계학자가 너무 멋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좋은 통계학자가 되기 위해 논문을 꾸준히 읽으며 최신 통계, 수학 지식을 쌓는다. 통계학도 계속 발전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숫자 하나로 결과가 크게 바뀔 수 있기 때문에 통계학자는 자신의 통계에서 오류가 발견되면 잘 받아들이고 바로 고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논할라 연구원 인생의 전환점이었던 페트로 삼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페트로 삼촌은 현재 남아공 오지를 돌아다니며 여학생이 수학을 배울 것을 강조하는 강연을 한다. 이 강연에서 삼촌이 늘 언급하는 사례가 바로 논할라 연구원이다. 급기야 삼촌이 “네가 이 학생이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해”라며 연결해 준 학생이 한둘이 아니다.
논할라 연구원은 이메일이나 SNS를 통해 틈날 때마다 그들과 연락하며 조언하고, 책을 사주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재단과 연결시켜주는 등 학업에서 헤매는 일이 없도록 돕는다. 덕분에 그들 중에서도 현재 논할라 연구원처럼 CAPRISA에서 일하거나 대학에서 통계를 전공하는 학생이 나왔다.
“사실 남아공의 많은 여자 어린이는 에이즈의 위험에 쉽게 노출돼 있습니다. 이러한 질병과 사회적인 편견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여성은 더 많이 배우고 사회에 진출해야 해요. 제가 쉴 수 없는 이유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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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린 기자 rini11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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