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별천지] ④ 금강산 소풍길에서 폐허로, 다시 평화의 관문으로

박영서 2023. 5. 13.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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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군 서화마을, 전쟁통에 굴곡진 인생사·군 복무 희로애락 한 보따리
상흔 딛고 평화지역 발돋움…70년 만에 DMZ 노선 개방·마을 현대화 박차

[※ 편집자 주 = 낯섦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의 발걸음은 길을 만들고, 그 길은 다시 사람을 모아 마을을 만듭니다. 강원도의 산과 강, 바다와 호수를 따라 굽이치는 길 끝에는 반짝이는 주민들의 삶이 모여 있습니다. 북적이던 발걸음은 지역소멸이라는 화두와 함께 잦아들고 있지만, 마을은 그 생생함을 되찾고자 새로운 사연들을 만들어갑니다. 길과 마을에 깃든 27개의 이야기를 연합뉴스가 1년 동안 격주로 소개합니다.]

1966년 서화면 면사무소(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서화면 서흥리 사천리 모습, 서화면 천도리 거리, 서화면 시가지 하수도 정비 모습. [인제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인제=연합뉴스) 박영서 기자 = 전쟁에 울고, 아픔을 거름 삼아 공동체를 이룬 소박한 마을이 이제는 아픔을 딛고 평화의 중심지로 나아가려는 힘찬 날갯짓으로 떠들썩하다.

상서로울 서(瑞)에 화할 화(和)로 이뤄진 강원 인제군 서화마을.

서로 뜻이 맞아 사이좋은 상태가 되라는 의미처럼 남북이 뜻이 맞아 복되고 길한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하니 한반도의 평화를 확산하고 정착시키는 시작점으로도 손색없다.

전국 방방곡곡 크고 작은 마을 모두 저마다 이야기 한 보따리쯤 갖고 있겠지만, 총성과 포성이 끊이지 않았던 서화마을은 그 이야기가 몇곱절은 된다.

그래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군대 이야기고, 마을 주민 모두가 전쟁을 변곡점 삼아 인생의 실타래를 푼다.

금강산 소풍도, 오일장 추억도 모두 앗아간 6·25 전쟁

서화면은 6·25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큰 마을이 있는 지역이었다.

제법 큰 땅을 갖고 농사를 짓는 이가 적지 않았고, 인근에서 가장 큰 오일장이 열릴 정도로 번화했다.

옛 동네 주민 중에는 금강산에서 놀다 온 사람들도 꽤 됐다.

새벽에 집을 떠나 저녁을 먹을 때쯤이면 금강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하니, 그 굽이진 소풍길에 아로새긴 추억도 꽤 된다.

인제의 대표 특산물로 자리 잡은 황태 같은 수산물도 서화면을 따라 들어왔기에 그 길목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옛 서화면 면사무소 인근 모습 [인제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전쟁 전까지만 해도 서화마을은 이북에 속해 있었다.

홍천에서 44번 국도를 따라서 오다 보면 38도선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는데, 서화마을은 그곳에서도 한참을 북쪽으로 올라와야 있는 곳으로, 전쟁 초기에는 전쟁터에 속하지 않았다.

북한군이 전쟁을 개시하기 직전에 서화마을보다 더 남쪽에 있는 원통리 일대에 집결해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가 역전되고,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서화마을 주민들도 전쟁에 휘말리게 됐다.

전쟁은 마을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마을 주민들이 남과 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농경지는 황폐해졌고, 옹기종기 모여 있던 집들도 폐허가 됐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영서와 영동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던 서화면은 그렇게 황량하게 변했다.

38도선 이북 지역이었던 탓에 마을 주민들 대부분 북쪽으로 피난을 떠나면서 토박이 어르신들이 그리 많지 않다.

어르신들 증언에 따르면 전쟁 중 그 참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반동분자로 몰려 죽임을 당한 일가족, 전쟁의 참화에 스러져간 군인들, 전쟁 중반부터 휴전 직전까지 치열했던 고지전 등 아름다웠던 추억만큼 아픈 기억을 가진 곳이다.

1960년대 서화면 천도리 모습 [인제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라스베이거스, 구구골…군대로 말미암은 수식어와 유래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화면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을 켜고 생활했을 정도로 낙후했다.

끼니를 챙기는 것조차 쉽지 않았기에 군부대가 가축을 직접 기르거나 배추를 재배해 김치를 담가 먹는 등 자구책을 세워야 할 정도였다.

주민들은 국가로부터 분배받은 토지를 일구며 농사를 짓고, 산채나 버섯, 약초를 캐며 살았다.

탄피나 고철을 주워 내다 팔아 돈을 버는 이도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군인들과 주민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았다.

농번기가 되면 군인들이 대민 지원을 나와주고, 주민들도 군인들에게 소소한 도움을 주며 더불어 살았다.

새마을운동 때 인프라가 개선되고 전기가 들어오면서 1970∼90년대 서화면 천도리는 술집, 다방, 여인숙이 즐비해 '라스베이거스'로 불릴 정도로 유흥가로 이름을 날렸다.

서화면 서흥1리 마을회관 준공 모습 [인제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다방 여성들을 두고 군인들 간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학식이 부족해 진급이 안 됐던 군 부사관이 우연히 클레이모어 지뢰로 간첩 다섯을 잡아 화랑무공훈장을 받고 대대장은 3성 장군으로 진급한 무용담, 만난 지 15일 만에 결혼한 아내와 전차 중대까지 드라이브하고 최전방 소초(GP)에서 5개월간 근무하고 돌아왔더니 아내가 '누구세요?'라고 되물었던 황당한 일까지.

허풍이 아닌, 나라를 지킨 이들의 실제 사연은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해도 모자랄 정도다.

육군 12사단 52연대 2대대 6중대 서무계에 있었다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편지나 책 따위가 가득 든 더블백을 짊어지고 연락병 역할을 하며 동동주를 나눠마셨다는 어르신도 있다.

그뿐이랴. 99포병대대가 주둔했다가 철수한 곳에는 '구구골'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7사단이 길을 닦았다고 해서 '7성 고개'라는 이름이 붙는 등 지명의 유래를 찾다 보면 어김없이 그 끝에 군대가 있다.

1052고지에서 바라본 맑은 날의 금강산 [설악금강서화마을 제공. 연합뉴스 자료사진]

DMZ 길 열고 경관 개선하고…평화지역으로 탈바꿈

접경지역으로서 발전에서 소외돼있던 서화마을에는 최근 들어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전쟁의 폐허로 남은 땅 비무장지대(DMZ)는 70여년 만인 지난해 9월 'DMZ 평화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민간인의 발길을 허락했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차로 1시간가량 올라가면 동서남북으로 탁 트인 '1052고지'에서 DMZ, 양구 해안면 펀치볼, 소양강의 발원지로 여겨지는 무산, 무산 앞뒤로 위치한 미수복지역인 이포리와 가전리, 금강산을 만날 수 있다.

인제에서 내금강으로 가는 최단 거리가 60㎞, 고성에서 외금강까지의 거리가 100㎞라고 하니 금강산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 차량 이동 구간이지만, DMZ 일대를 직접 걸어볼 수 있는 1.5㎞가량의 하늘길 도보 탐방 구간 '을지스카이웨이'가 포함돼있다.

1052고지에 있는 854고지 전적비와 양구 해안면 펀치볼 등과 엮인 역사 이야기도 관광해설사로부터 들을 수 있다.

서화 만남의 광장 조성 전(왼쪽)과 후 [인제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화면의 이미지를 바꿀 평화지역 경관개선사업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인제군은 서화면 도시공간 개선은 물론 시가지 활성화를 위해 2019년부터 184억원을 들여 경관을 개선했다.

군은 2021년 천도리 시가지 경관개선 사업과 서화리 공영주차장 조성, 서화리 전선지중화 공사 등을 완료한 데 이어 2022년에는 물빛테마공원, 비득고개광장, 서화리 만남의광장 조성 사업 등을 마쳤다.

평화지역 경관개선사업과 함께 추진하고 있는 천도리 택지조성사업도 순항 중이다.

낡고 낙후된 곳으로 여겨졌던 서화마을은 이제는 쾌적하고 안락한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옛일들을 기억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기록으로 남겨두기 위해 토박이 어르신들과 군인 출신 주민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하며 채록집을 펴내고 있다.

최상기 인제군수는 "사업을 끝까지 잘 마무리해 지역 발전과 주민소득 창출이라는 두 가지를 모두 이루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서화면 물빛테마공원(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비득고개 정자, 서화만 주차장, 서화면 전체 모습. [인제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conany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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