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대명사 속 특별한 이야기들…오은 시집 '없음의 대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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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세대의 문해력을 문제 삼으면서 농담처럼 떠도는 맞춤법 실수 얘기가 오은의 시에서는 웃지 못할 속사정이 있는 특별한 이야기가 된다.
거침없는 언어유희와 전복적 사유를 감행해온 시인 오은이 여섯 번째 시집 '없음의 대명사'(문학과지성사)를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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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그는 맞춤법에 약했다 첫 직장에 입사할 때까지 '이래라저래라'가 '일해라 절해라' 인줄 알았다. (중략) 일해라 절해라 부어라 마셔라… (중략) 일하고 절하고 붓고 마시다 보면 회사의 숙주宿主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에서)
젊은 세대의 문해력을 문제 삼으면서 농담처럼 떠도는 맞춤법 실수 얘기가 오은의 시에서는 웃지 못할 속사정이 있는 특별한 이야기가 된다.
"열심히 일하다가 상사가 지나가면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하게 절하라는 거 아니었어? 그는 그런 줄 알았다 매일 일하고 절했다"
거침없는 언어유희와 전복적 사유를 감행해온 시인 오은이 여섯 번째 시집 '없음의 대명사'(문학과지성사)를 내놨다.
수록시 '그'의 주인공은 매일 "일하고 절하는" 삶을 사는 이 시대의 여느 젊은 직장인들을 대변하는 인물.
'그'는 맞춤법을 몰라 동료들의 비웃음을 사는 어리숙한 직장인이긴 하지만, "누구에게 보이지도 않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 '일'을 "잘하고 싶었"던 사람이다.
시인이 '나는 이름이 있었다' 이후 5년 만에 펴낸 이번 시집에도 이처럼 번뜩이는 언어유희와 전복적 사고는 여전히 빛난다.
전작에서 "나는 이름이 있었다"라고 했던 시인은 이번엔 '이름을 가린 대명사'와 '없음'에 대한 사유를 전방위로 펼쳐 보였다.
대명사는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을 대신 나타내는 말 또는 그런 말들을 지칭하는 품사다. 이번 시집의 1부에선 지시대명사, 2부에서는 인칭대명사를 제목으로 한 시들이 수록됐다. '그곳'이라는 제목의 시 3편, '그것들' 6편, '그것' 16편, 그들 '9편', '우리' 9편, '너' 4편 등 총 58편이다.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가운데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지기도 한다. 서시 '그곳'이 그렇다.
"그날 밤 꿈에 아빠가 나왔다. "은아, 오늘은 아빠가 왔다." (중략) 가마득한 그날을 향해 전속력으로 범람하는 명랑."('그곳'에서)
이처럼 시인은 봇물 터지듯 터지는 슬픔을 "전속력으로 범람하는 명랑"과 같은 자리에 둔다.
너와 내가 모인 '우리'에서는 구심력과 원심력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괄호는 안을 껴안고 / 괄호는 바깥에 등을 돌리고 / 어떻게든 맞붙어 원이 되려고 하고 (중략) 우리는 / 스스로 비밀이 되었지만 / 서로를 숨겨주기에는 / 너무 가까이 있었다"('우리'에서)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서도 안 되는 세상의 모든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시다.
마지막 시는 '나'. 이 시의 화자는 혼자 있고 싶을 땐 늘 화장실에 간다. 거울을 보고 활짝 웃어보지만 주위에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입꼬리는 잘 올라가지 않는다.
"혼자인데 / 화장실인데 / 내 앞에서도 / 노력하지 않으면 웃을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솔직해져야 하는 나에게조차 잘 웃지 못하는 사람이 비단 이 시의 화자인 '나'만은 아닐 것이다.
'나'라는 제목은 시집에서 이 시 하나다. 세상에 '나'는 오직 나 하나뿐이라는 걸 새삼 환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오은은 누구보다도 언어의 물성과 자기 지시성에 관심을 두고 자기만의 고유한 스타일과 작법을 구축해온 개성의 시인이다.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오연경은 "그런 시인에게 대명사는 말이 말을 가리키는 세계, 말들에 대한 말이 숲을 이루는 왕국의 입구로 삼기 맞춤한 것"이라면서 "우리는 어떤 구체적인 대상도 떠올리지 않은 채 말과 말이 모여 특별한 이야기가 되어가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고 했다.
문학과지성사. 156쪽.
yongl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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