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으로 인정받지 못한, 어느 여성 홈리스의 죽음
말해지지 않는 죽음에 대한 뒤늦은 부고
서부역 인근서 3시간 폭행 사망한 여성 홈리스
피의자 구속됐으나 동료·가족은 모르는 ‘마지막’
죽음 과정과 이유 직접 찾으며 던지는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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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죽음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살았을 때 말해지지 않던 존재는 죽어서도 말해지지 않는다. 말하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으면 어떤 죽음은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는다. 뉴스 한줄 되지 못한 그 죽음은 ‘말하지 않으려는 세계’를 향해 그렇게라도 말해져야 한다.
광장의 속보
“김목화(가명·55)님이 어제 사망했다네요.”
3월17일 오전 ‘홈리스인권지킴이’의 텔레그램 대화방에 최현숙(작가)이 긴급 소식을 띄웠다.
“사망 경위는 미확인. 광장에서 누구한테 걷어차였다는 말도 있고.”
안타까움과 탄식들이 문장 아래로 주르륵 흘렀다.
“서울역 나가는 팀에서 만나시던 분이실까요?”
이동현(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이 물었다. 지킴이 자원활동가들은 매주 금요일 저녁 서울역과 남대문 등지에서 거리 홈리스들을 상담하고 인권침해를 감시했다.
“네. 바짝 마르고 얼굴 까맣고 차분했던.”(최현숙)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흥분하고 들끓는 세상이었다. 그 세상이 한 여성 홈리스의 죽음을 ‘뉴스’에서 제외하고 있을 때 김목화의 사망(3월16일)은 서울역 홈리스들 사이에서 속보로 전파되고 있었다.
최현숙에겐 강자혜(가명·67)가 소식을 전했다. 서울역 광장을 다녀온 그가 분도이웃집(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용산구 동자동에 운영하는 여성 홈리스 쉼터)에 먼저 와 있던 최현숙에게 알렸다. 강자혜는 윤연정(가명·47)한테 들었다. 그날 아침 광장에 나가 있던 윤연정은 서울역파출소 노숙인전담경찰이 내미는 사진을 봤다. 경찰은 광장 홈리스들에게 시시티브이(CCTV)에서 따온 사진을 보여주며 사진 속 남자를 아는지 물었다.
서울역 광장은 고속으로 질주하는 삶과 속도가 떨군 죽음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김목화의 사망 사실이 신속하게 퍼진 까닭은 죽음 그 자체보다 죽음의 과정 때문이었다.타살이었다.
경찰이 만나지 않은 목격자가 있었다.
신호성(가명·41)은 8년째 서울역 주변에서 지냈다. 김목화가 숨을 거두기 열흘 전(3월6일)의 일이었다. 고시원에서 몸을 뒤치던 그는 자정께 밖으로 나왔다. 역 광장에서 바람을 쐬고 돌아오던 그는 고시원을 300여m 앞두고 길을 꺾었다. 대로변의 한 건물 옆 골목으로 들어섰다. 고시원이 답답할 때 가끔 하룻밤을 묵던 값싼 모텔이 그 골목 안쪽에 있었다. 골목을 올라가던 그의 눈에 “목화 누나”가 보였다. “몸이 축축 늘어지는 누나를 뒤에서 한 남자가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신호성은 두 사람을 지나쳐 모텔로 들어갔다. “특별히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목화 누나는 평소 술을 좋아했다. “술 취한 누나를 지인인 남자가 부축해 누나 거처로 데려다주는 줄” 알았다.
그날 신호성이 목격한 장면은 건물 시시티브이에 찍힌 영상과도 일치했다. 사망 직후 경찰은 건물 경비실을 찾아가 시시티브이 녹화본을 확보했다. “사건 발생 사실을 모르고 있던” 경비는 녹화 영상을 돌려보는 경찰 옆에서 그 장면을 봤다. “남자가 여자를 발로 연거푸 툭툭 찼”다. “남자가 여자를 일으켜 세우는데 여자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계속 주저앉았”다.
신호성의 목격담은 ‘서울역 사람들’ 사이로 번졌다. “김목화를 차서 죽인 60대 남자”의 인상착의가 목격담을 따라다녔다. 윤연정이 본 사진 속 남자와, 신호성이 직접 본 남자와, 건물 경비노동자가 녹화 영상으로 본 남자의 생김새·옷차림은 일치하는 듯 일치하지 않는 듯했다.
범인은 오래지 않아 체포됐다. 경찰은 시시티브이 증거자료와 탐문으로 가해 남성을 쫓아 붙잡았다. 수사를 끝내고 검찰로 송치했다. 사건은 쉽게 종결됐다.
종결되지 않았다
“이 세상 미련일랑 다 접어두고 잘 가시라. 간절히 소망했던 모든 일들, 못다 이룬 꿈들, 살아오면서 서운했던 모든 일들 함께 내려놓으시고….”
4월17일 서울시립승화원(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무연고 사망자 빈소에서 강자혜가 나눔과나눔(서울시 공영장례 지원 법인)이 제공한 조사를 읽었다. 김목화 사망 한달 만에 치러진 장례였다. “우리에겐 이런 죽음이 일상인데도 그때마다 털썩 주저앉을 정도로 충격을 받는” 강자혜는 “나라도 안 가면 너무 쓸쓸할 것 같아” 빈소를 찾았다. 강자혜와 윤연정과 원상희(가명·48)가 이동현과 화장장에 동행했다. 그의 사망을 처음 전했던 사람들이 그의 마지막 길도 지켰다. 장례에 고인의 가족은 없었다. 행정기관이 유족을 찾아 시신 인수를 통보했으나 14일(인수 또는 처리 위임 기한) 동안 아무 연락이 없었다.
원상희가 김목화의 상주를 맡아 영정을 들었다. “하늘나라는 따뜻한 곳이니까 아프지 말고 편히 쉬시라”며 마음 다해 빌었다. 유골은 윤연정이 품에 안고 유택동산(공동산골장)으로 옮겼다. 뜨거운 뼛가루를 한줌씩 집어 뿌리면서도 그들은 고인의 시간이 마무리됐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종결’일 수 없었다.
수사는 종결됐을지 몰라도 죽음은 종결되지 않았다. 김목화의 홈리스 동료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아는 것은 고인이 범죄 피해로 사망했다는 사실뿐이었다. 사망 과정도 몰랐고, 사망 원인도 몰랐다. 범인이 누군지도 몰랐고, 범행의 이유도 알지 못했다. 고인이 왜 그렇게 삶을 마쳐야 했는지 그들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문과 억측이 부풀었다. 저마다의 입을 타며 추측되고, 변형되고, 왜곡됐다. 누구는 서울역 광장에서 병으로 쓰러져 죽었다고 했고, 누구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었다고 했다. 빌린 돈을 못 갚아 빚쟁이들한테 맞아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생전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지 못했던 김목화의 이야기는 세상을 떠난 뒤에도 조각을 맞추지 못해 뒤틀리고 있었다. 죽음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겨레>가 이유를 물었을 때 경찰은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
“합당한 수사를 했고 결과를 검찰에 송치했다. 그 이상은 이야기할 수 없다. 유명인도 아니고 피해자와 피의자의 개인적인 문제여서 알려줄 수 없다. (가해 이유도) 두 사람 간의 사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확인해줄 수 없다. 돌아가신 분의 가족도 고려해야 한다.”
고인은 실수나 사고가 아니라 폭행과 범죄로 숨졌다. 오히려 유명인이 아니어서 그 사실조차 묻혔다. 장례를 치른 사람들은 가족이 아니라 고인의 홈리스 동료들이었다. 그에 대한 기억을 나눠 가진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슬퍼할 정보가 없었다.
“가족과 인연을 끊고 살았더라도 인연 없는 사람은 없다. 고인과 인연을 맺어온 사람들이 애도하고 싶어도 죽음의 이유를 모르니 애도마저 제대로 할 수 없다.”(이동현)
‘사건’으로 인정받지 못한 죽음은 어디까지 말할 수 있고 어디서부터 말하지 말아야 하나. 삶이 보이지 않던 사람의 범죄 피해는 어떻게 비가시화되나. 말해선 안 되는 죽음과 말하기 성가신 죽음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나. 증발하듯 죽은 김목화가 세상에 던지는 두꺼운 질문들이었다.
직접 찾아나선 고인의 마지막
“사건 현장 바로 건너편이 텐트촌이잖아.”
한기훈(가명·56)은 2년 전 서울역 광장에서 김목화의 수급비 통장을 주웠다. “이젠 필요 없다”는 고인의 손에 쥐여주며 “잘 간직하라”고 당부했다. 고인과 처음 나눈 대화를 떠올리던 한기훈이 추리했다.
“목화는 누굴 함부로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야. 목화가 그 골목으로 따라 들어갔다면 절대 처음 보는 사람일 리 없어. 남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분명 목화랑 아는 사람이야.”
김목화의 홈리스 동료들과 인권지킴이 활동가들이 그의 자취를 더듬었다. 그의 마지막 행방을 직접 되짚으며 죽음의 경위와 애도의 근거들을 모았다.대로를 사이에 두고 사건 현장과 마주 보는 장소에 서부역 텐트촌(거리 홈리스 주거지)이 있었다. 길만 건너면 고인이 폭행당한 건물 골목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여기예요.”
서울로7017 다리 기둥 아래 숨어 있는 텐트를 ‘할배’(57)가 손으로 가리켰다. 자신을 “할배라고 부르라”면서도 할배라기엔 아직 젊은 그가 황성철(홈리스행동 활동가)에게 텐트 하나를 보여줬다. 텐트촌의 끄트머리에 김목화가 몸을 눕혔던 작은 텐트가 있었다.
“작년 여름쯤 내가 목화를 이리로 데려왔어요.”
“청소년 때부터 서울역 주변에서 살아온” 할배는 “여자가 광장에서 자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는 “마침 텐트가 하나 비었길래 목화한테 알려줬”다. 김목화는 지난해 여름부터 12월까지 세개의 텐트를 옮겨다니며 지냈다. 할배가 가리킨 ‘김목화의 첫 텐트’는 이제 다른 홈리스가 쓰고 있었다. 반대쪽 구석 끝에 끼어 있는 ‘김목화의 마지막 텐트’에도 현재 분홍 여행가방을 끄는 여성이 살았다.
“고시원 들어간 뒤에도 역엔 나왔으니까.”
할배가 고인을 “마지막으로 본 건 지난 2월 광장에서”였다. “경기도에서 한달 일을 보고 4월 초에 돌아왔”을 때 “목화 죽었다는 이야기가 광장에 파다했”다. “고시원에서 잘 살고 있을 줄 알았던 목화가 그렇게 죽다니” 할배는 “깜짝 놀랐”다.
김목화가 사망 직전까지 살았던 고시원(중구 중림동)은 사건 장소에서 걸어서 5분도 안 걸리는 위치에 있었다. 홈리스 임시주거지로 활용되는 고시원이었다. 거리 노숙을 거친 사람들이 수급 자격을 얻는 동안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머물렀다. 김목화도 그랬다.
그는 2020년 여름 처음 기초생활수급자가 돼 용산구 청파동의 한 고시원에 주소를 두고 살았다. 그해 가을 다시 거리 생활을 하면서 수급 자격(주거지 등록이 필수)을 잃었다. 서부역 텐트촌에서 지내던 지난해 12월 다시서기센터가 그의 수급 회복을 도우며 중림동 고시원에 방을 잡아줬다.
3월2일 센터 사회복지사가 고시원을 방문했을 때 원장은 김목화를 내보내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음주가 잦고 시끄러워 민원이 많다는 이유였다. 이튿날(금요일) 상담 기록에서 그 내용을 읽은 김목화의 담당 복지사(전날 방문자와는 다른 사람)가 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했다. “다음주 월요일 다른 곳으로 방을 옮길 테니 그때까지만 강제 퇴실을 멈춰달라”고 했다. 그가 3월6일(월요일)에 찾아갔을 때 김목화는 이미 고시원에 없었다. 복지사의 요청을 원장이 김목화에게 전달하지 않았을 수도, 전달했으나 마음 상한 김목화가 고시원을 나갔을 수도 있었다.(당시 상황을 묻는 <한겨레>에 원장은 “그런 사람 기억 못 한다”며 차갑게 반응했다.)
그날 복지사는 서울역 주변으로 김목화를 찾아다녔으나 찾지 못했다. 그가 고인의 이름을 다시 들은 건 꼭 열흘 뒤였다. 3월16일 오후 경찰의 전화가 걸려왔다. “사망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며 고인의 최근 행적과 대인 관계 등을 물었”다. “타살”이란 말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그가 고시원에서 고인을 만나지 못했던 그 시각 김목화는 서울역이 아니라 종로구의 한 병원에 누워 있었다.
교제 살인?
김목화는 3월5일 가해자와 ‘그 골목’에 있었다.
가해자는 저녁 8시께부터 자정까지 3시간 가까이 고인을 폭행했다. 발로 배와 성기를 가격했다. 고인은 가해자가 자리를 뜬 골목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됐다. 지나가는 사람이 그를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3월6일 새벽 2시15분 119에 출동을 요청했다. 구급대원들이 4분 뒤 현장에 도착했을 때 고인의 의식은 흐릿했다. 통증 자극(어깨 등을 세게 누른 뒤 반응 여부로 의식 확인)엔 반응했지만 말을 하진 못했다. 경찰이 동행해 적십자병원으로 옮겼다. 새벽 2시40분 강북삼성병원으로 재이송됐다. 김목화는 열흘 뒤인 3월16일 자정께 사망했다. 사체 곳곳에서 다수의 멍 자국과 상처들이 발견됐다. 사인은 ‘다발성 손상’이었다. 무수한 폭행이 가해졌을 때 피해자가 몸에 기록하는 증거였다. 사망진단을 내린 의사가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의 연락을 받은 가족 중 고인의 형부가 병원에서 시신을 확인했다. 오래전 연락이 끊긴 처제를 주검으로 만났다. “온몸이 멍투성이였고 사망 과정에서의 출혈로 피범벅”이었다. “장기가 파열됐다고 했”다. 가해자와 폭행 이유에 대해선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60대 중반의 남자라고 했고 서울역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정도”였다. 고인의 여동생이 경찰에 전화해 물었을 때도 “수사가 마무리되지 않았고 직계 유족이 아니어서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 수사 종료 뒤에도 설명을 듣지 못한 가족이 고인의 사십구재(5월4일) 다음날 경찰에 연락했다. “범인이 구속 기소돼 재판받는 중”이라고 했으나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부터 심각한 폭행이 의심됐을 텐데 병원은 왜 사망 뒤에야 경찰에 신고했는지, 병원 이송 과정에서 고인의 상태를 확인했을 경찰은 왜 사망하고 나서야 수사를 시작했는지, 양쪽 모두 으레 행려자로 보고 쉽게 방치한 것은 아닌지” 가족은 궁금했다.“알고 싶었지만 상세히 물어보진 못했”다.
“열흘치 병원비가 1300만원이라고 했다. 못 본 지 20여년 만에 사망 소식을 듣고 달려갔는데 그 큰돈을 수납해야 시신을 인수할 수 있다고 했다(형부). 사정이 안 되면 무연고로 처리하고 자치단체로 장례를 이관하는 방법이 있다고 해서 상의 끝에 시신을 포기했다(여동생). 직계인 딸이 경찰서에서 포기 각서에 서명한데다(형부) 우리까지 포기했다는 자책감에 적극적으로 경위를 따지지 못했다(여동생).”
병원도 <한겨레>에 “환자 개인 정보여서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 알려줄 수 없는 수사·의료기관의 원칙과, 알고 싶지 않은 직계 유족의 원망과, 알고 싶어도 묻기 힘든 방계 가족의 곤란이 합쳐져 김목화의 죽음은 질문되고 말해질 기회를 잃었다. 취재 과정에서 어렵게 들은 수사 관계자의 한마디가 있었다.
“(가해자는) 서울역 사람이 아니고 (피해자와) 알고 지낸 지 몇년 된다. 과거 교제했던 사이였다.”
사실이라면 ‘교제 살인’이란 의미가 된다. 사건 성격이 전혀 다른 차원으로 도약하지만 추궁해줄 사람을 갖지 못한 죽음은 그조차 말해지지 않는다. 고인의 동료들과 활동가들은 “그렇다면 매우 중요한 문제”라면서도 다른 쟁점을 제기했다.
‘교제 관계’란 판단은 가해자의 진술을 경찰이 검증 없이 수용한 결과는 아닐까.
가해자의 정체는
“목화 어디 사는지 알아요?”
목격자 신호성이 지난 1월 역 광장 자판기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말을 걸었다. 낯익은 남자였다. 서울역 홈리스는 아니었다. 보통 해 저문 뒤 나타났다. 신호성은 서울역 3층이나 지하철역 출입구 계단에서 그를 봤다.
“알아요. 우리 고시원에 살아요.”
신호성은 그때 김목화와 같은 고시원에서 지냈다. 한달 뒤 고시원 쪽 언덕을 올라가던 신호성은 반대쪽에서 내려오는 남자와 마주쳤다. 사건 당일 건물 골목에서 김목화를 일으켜 세우다 신호성에게 목격될 그 남자였다. 그날 모텔로 자러 가던 신호성이 큰 의심 없이 지나친 것도 남자가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다른 여자 홈리스들에게도 자주 말을 걸었”다. 언젠가 한 여자가 신호성에게 “목화 언니 봤냐”고 묻고 있을 때 “그 남자가 나타나 ‘내가 안다’며 데려가기도 했”다. “정말 목화 누나에게 데려간 건지 다른 데로 데려간 건진 알 수 없었”다.
“목화님과 무슨 사이예요?”
‘서울역 김씨’(66)의 질문에 남자는 “목화 지켜주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텐트촌 사람들이 기억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서울역 김씨는 고인이 머문 ‘마지막 텐트’ 옆자리에서 살았다. “목화님 주변을 맴도는 남자”가 그의 눈에 자주 보였다. “가끔 빈 텐트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 “자기가 한때 택시를 몰았다고도 했”다. “저 남자 누구냐”고 묻는 김씨에게 고인은 “그냥 아는 사이라고 했”다. 인권지킴이 활동가 김윤영(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이 “텐트촌을 방문했을 때 목화님이 자리를 비운 텐트 앞에서 그 남자가 서성이고 있었”다. “신분과 주소지를 묻자 얼버무렸”다. 강자혜는 서울역 2층에서 “여자 홈리스들에게 친절한 60대 남자”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김목화를 찾아다니던 남자”였다. “소문에 따르면 트럭 운전을 한다고 했”다. ‘그 남자들’이 같은 인물인진 확인할 방법이 없으나 고인의 지인들은 동일인일 것으로 추정했다. 기억을 되살려 ‘몽타주’를 그려보기도 했다. 사건 이후 서울역에서 남자를 봤다는 사람은 없었다.
광장에 의탁해 살았지만 광장이 살 만한 공간은 아니었다.
서울역 주변에선 “값싼 밥과 잠자리를 미끼로 여성 홈리스들을 노리는 남자들이 드물지 않게 눈에 띄었”(이동현)다. 강자혜는 “햄버거를 사준다며 여자들을 데려가는 남자들”을 자주 봤다. 서울역 홈리스로 22년째 사는 동안 “나 좋아한다고 소문내며 쫓아다니는 남자 때문에 너무 무섭고 힘들었”던 그는 언제부턴가 자신이 잠자는 곳을 말하지 않았다. 원상희는 “죽으려고 수면제 탄 술을 마시고 역 지하도에 누워 있던 스무살의 어느 날”이 아직도 또렷했다. “홈리스도 아닌 젊은 남자들이 의식이 가물거리는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가길래 죽어라 몸부림쳤더니 발길질을 해댔”다. 그가 “머리를 박박 밀고 다니는 이유도 하도 건드리는 놈들이 많아 남자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2017년엔 대전역에서 생활하던 여성 홈리스를 한 남자가 ‘술을 마시자’며 집으로 데려가 살해한 뒤 여행가방에 담아 공원에 버린 사건도 있었다.
여성 홈리스들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숨겨야 했다. 정부 실태조사에서 여성들이 과소 파악(2021년 보건복지부가 집계한 ‘노숙인’ 1만4404명 중 여성은 23.2%인 3344명)되는 까닭이었다. 돈을 내더라도 찜질방이나 피시방 등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은 조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통계의 젠더 불평등’은 여성들을 투명하게 만들고 남성 중심 정책을 강화했다.
여성 홈리스들은 임시주거지원을 받아 고시원 방을 얻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동현이 방을 잡으려고 같이 다녔을 때 “여자를 들이면 남자들이 꼬여 시끄러워진다며 거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목화님의 죽음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안전을 지킬 수 있는 복지체계의 선택지를 넓혀줘야 한다”고 김윤영은 강조했다. 여성 홈리스 전용 일시보호시설(서대문구에 한곳 있으나 생활 현장과 너무 멀어 접근성 취약) 확충과 종합지원센터 설립은 오래된 요구였다.
뒤늦게 쓰는 부고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서울 반포대교 아래에서 원상희가 “목화 이모 좋아했던 소주”를 종이컵에 따라 강에 뿌렸다. 불붙인 담배 한대도 돌 위에 놓았다. 휴대폰으로 ‘반야심경’을 틀었다. 두 손 모아 좋은 데 가시길 기원했다. 다리를 떠날 때 약속했다.
“이모, 추석날 또 올게요.”
원상희는 3년 전 서울역 광장에서 김목화를 처음 만났다. 말수 적은 김목화가 유독 원상희에겐 말수를 늘렸다. 원상희는 소주를 사서 목화 이모에게 주며 “추우니까 조금만 드시고 따뜻한 데 가서 주무세요” 했고, 김목화는 상희 동생에게 500원을 주며 “자판기에서 뜨거운 커피 빼 먹어” 했다. “제 고향은 울산”이라고 원상희가 말했을 때 김목화는 비밀을 알려주듯 목소리를 낮췄다.
“난 반포대교 아래에서 태어났어.”
“어머니가 다리 아래에서 나를 낳고 탯줄도 직접 끊었다”는 이야기를 이모는 동생에게 여러차례 했다. 장례를 치른 그 주 토요일(4월22일)에 원상희는 “이모 고향”을 찾아 명복을 빌었다.
김목화는 뼈밖에 안 보일 만큼 바짝 마른 사람이었다. 그에 대한 광장의 기억들은 그의 몸만큼이나 앙상했다. ‘흩어진 기억들을 모아 고인의 삶에 이야기의 살을 입히는 일은 기록을 갖지 못한 죽음을 애도하는 의식’(박진옥 나눔과나눔 상임이사)이기도 했다. ‘서울역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그에 대한 기억을 꺼내 애도에 보탰다. 그 기억들과 가족의 말 등을 종합해 뒤늦은 부고를 쓴다.
김목화는 1968년 2월 남해 바다를 낀 한 도시에서 태어났다. 1남6녀 가운데 다섯째였다. 부유하진 않았지만 크게 가난한 집도 아니었다. 결혼을 일찍 해 서울에서 살았다. 몇년 뒤 딸 둘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했다. 남편은 곧바로 재혼했고 딸들을 데려갔다. 어느 날 고향에서 사라졌고 오래 소식이 없었다.
2000년께 충북 음성 ‘꽃동네’(사회복지시설)에서 고향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야산에서 뭔가를 태우다 화재 사고를 낸 뒤 소방서를 통해 꽃동네로 보내졌다고 수녀가 알렸다. ‘갈 곳이 없어 꽃동네 어르신들을 보살피며 살고 싶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2010년께 고인의 큰딸이 “엄마를 찾고 싶다”며 막내 이모에게 왔다. 금융 기록을 조회했더니 아무 기록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13년 뒤 범죄 피해로 사망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 조카들도 재혼 가정에서 평화롭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인의 형제자매들은 그의 죽음을 계기로 만난 둘째 조카에게 들었다. 두 딸은 집을 나와 살았고 엄마를 찾았던 큰딸은 3년 전 세상을 떠났다. 엄마에 대한 원망이 컸던 둘째 딸은 시신 포기 각서를 쓴 뒤 연락을 끊었다. 고인의 형제자매들은 공영장례 일정 문자를 받았으나 참석하지 않았다. 고인을 데려오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발길을 붙잡았다. 대신 고향에 모여 사십구재를 올렸다. 고인이 집 없이 살았다는 말을 들은 여동생은 “추웠을 언니의 시간을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다.
2020년 4월 서울 반포지구대 경찰이 다시서기센터에 김목화를 인계했다. 반포대교 근처에서 다리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져 있던 그를 경찰과 119가 출동해 응급실로 이송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서울역으로 데려왔다. 김목화가 센터 사회복지사에게 밝힌 ‘상경 전 가정사’는 고인의 가족이 들려준 이야기와 많이 달랐다. 센터가 수급 자격 취득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고인은 “필요한 도움이 없다”고 했다. “나보다 곤란한 여자 찾아서 도와주라”는 말은 고인을 아는 사람들의 공통된 기억이었다. 구술생애사 작업을 하며 여성 홈리스들을 만나온 최현숙을 고인은 “볼 때마다 엄마라고 불렀”다. “세시간 동안 맞아서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최현숙은 “세시간을 채우기 전에 죽어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 느꼈기를 바랐는데 열흘 뒤에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 광장 구석에서 종이커피를 파는 홈리스 할머니에게 “김목화는 너무 착해서 그렇게 죽기 아까운 아이”였다. “광장에 앉아 술 먹다가 앞에 공돈이 떨어져도 절대 자기 주머니에 넣는 법이 없었”다.
고인과 동갑인 최철영(가명·55)은 친구의 죽음을 듣고 통곡했다. “그 빼빼 마른 애를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세시간이나 때렸냐”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가 광장 모퉁이에 ‘거리 제사상’(4월17일)을 차리고 무릎을 꿇었다. 상엔 무료급식소에서 받아온 짜장밥과 주머니를 털어 산 치킨을 올렸다. 고인을 아는 홈리스들이 뒤따라 절했다. 통행 많은 광장이었다. 상을 오래 펴두진 못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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