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기도 무서운 ‘살인도로’...악취와 범죄 온상이던 곳의 대변신 [사-연]

한주형 기자(moment@mk.co.kr) 2023. 5. 13.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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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 위주의 아카이빙을 시작합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 같은 장소 현재의 모습과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청계천 삼일교 인근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온 일대 직장인들이 산책하고 있다. [한주형기자]
따뜻한 봄날, 정오쯤 청계천 광교 위에 서면 점심시간 잠깐의 여유를 즐기며 산책하는 직장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천변에 앉아 물소리를 들으며 해바라기를 하다 보면 시간 이 언제 이렇게 지났나 싶곤 하죠. 지금의 청계천은 잉어와 왜가리가 오가는 아름다운 하천이지만 지난날 사진을 들여다보면 이곳이 ‘상전벽해’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청계천을 따라 걸으며 이야기를 이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개천에서 청계천까지
1822년 제작된 <한양도>에 나타난 한양도성과 사대문, 청계천. [서울역사아카이브]
청계천은 사대문 안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지르는 서울의 중심 하천입니다. 과거 자연하천 청계천은 인왕산이나 북악산, 남산에서 발원한 줄기들을 시작으로 수많은 지천들과 궁궐의 내수 등이 합쳐지며 흐르다 왕십리 인근의 살곶이 다리에서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이어졌습니다. 청계광장에서 시작하는 지금의 청계천도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경로로 복원되었으며, 길이 10km에 스물두개의 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1910년에 촬영된 청계천 수표교(왼쪽)과 지금의 수표교(오른쪽). 수표교는 홍수에 대비해 청계천의 수량을 측정하는 수표가 설치되어 있는 다리였다. 왼쪽 사진의 본래 수표교는 청계천 복개 공사 당시 이전해 현재 장충단공원에 놓여 있다. 현재 청계천에 설치된 수표교는 수표교의 이름만 딴 임시 다리이다. 청계천 복원 당시 본래 수표교의 이전을 추진했으나 교각 길이가 맞지 않아 무산되었다. [서울역사아카이브·한주형기자]
과거 청계천의 이름은 그저 ‘개천’이었습니다. 조선시대 개천은 장마철이나 비가 잦을 때만 물이 흐르는 건천에 가까웠습니다. 평시에는 메마르고, 물이 고인 일부분에선 악취가 진동하고, 온갖 오물이 나뒹굴었다는 점을 보면 개천은 ‘하천’보다는 ‘하수도’의 개념에 더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한양이 조선왕조의 도읍지가 되면서 인구가 폭증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개천 관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태조와 영조 등의 임금들이 개천의 폭을 넓히고 제방을 쌓는 등의 공사를 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도성 중심부에 위치한 개천은 자연스레 한양의 생활권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개천을 기준으로 위는 북촌, 아래는 남촌으로 불렸습니다. 개천의 구간을 따라 상류는 상촌, 중류는 중촌, 하류는 하촌으로 나누었습니다. 궁 근처 북촌에는 고관대작들이, 시장과 관공서가 밀집한 중촌에는 중인들이, 남촌에는 하위직과 벼슬하지 못한 양반들, 무인들이 무리지어 살았습니다.

청계천에서 빨래하는 여인들. 1930년대 촬영 [국립민속박물관]
일제 강점기 하천명칭을 개정하며 개천을 ‘청풍계천’의 줄임말인 청계천으로 명명합니다. 일제는 이름과 달리 구정물이 흐르는 청계천을 ‘탁계(濁溪)천’이라고 부르며 비웃었다고 합니다.
구정물이 흐르던 천에서 번듯한 신작로로
청계천을 따라 늘어선 판잣집들. 1960년대 노무라 모토유키 촬영. [청계천박물관]
지금은 서울시민들의 대표적 도심 휴식처로 자리매김한 청계천이지만, 과거 청계천은 오히려 골칫덩어리였습니다. 20세기 초 근대화가 진행되며 서울로 수많은 인구가 유입되고, 청계천은 도시 빈민들이 판잣집을 짓고 거주하는 빈민촌으로 거듭납니다. 당시 청계천의 별명이 ‘도시의 암종’, 제방도로의 별명이 ‘살인도로’였다고 하니 그 참상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이 모습은 소설가 박태원의 <천변풍경>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추억의 드라마 ‘왕초’나 ‘야인시대’ 역시 이 시대 청계천 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청계천 하류(현 성동구 사근동 일대)의 판잣집. 판자촌 너머 건축중인 건물은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이다. 1960년대 노무라 모토유키 촬영. [청계천박물관]
해방 직후 전재민들, 한국전쟁 이후 월남민들과 상경민들이 더해저 청계천변 판잣집은 포화 상태에 이릅니다. 통계 자료를 살펴보면 1970년대 서울의 판잣집이 전체 주택의 30%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청계천변 판잣집은 다른 판잣집에 비해 구조가 더욱 취약했습니다. 하천 바닥에 세운 기둥에 의지해 쌓아올린 집들은 홍수가 나면 쓸려내려가기 일쑤였습니다. 한평생 청계천 빈민을 위해 봉사한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가 기증한 사진 자료를 들여다보면 개천을 따라 빼곡하게 들어선 판잣집들이 제방 위에 위태위태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1960년 10월 청계천 복개공사가 진행되며 판잣집이 철거되고 있다. [정부기록사진집]
1965년 8월 복개공사가 진행 중인 청계천. [정부기록사진집]
악취와 전염병, 범죄의 온상이 되는 청계천을 바꿀 방법이 무엇이었을까요. 모든 것이 풍족하지 못했던 그 시절에는 ‘덮어버리는 것’외에 선택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숱한 문제가 발생하는 청계천을 복개(覆蓋)하라는 여론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복개공사 시도는 1930년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등으로 일본 제국주의가 기울던 시대적 상황에서 물자와 비용 부족 등의 문제로 광화문 일대 일부 구간을 제외한 전체 복개공사는 시행되지는 못했습니다.
1965년 복개공사가 마무리된 평화시장과 청계로(위)와 현재 청계천 오간수교에서 바라본 평화시장과 청계천(아래). [정부기록사진집·한주형기자]
청계천 복개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제1공화국시대 1958년이 되어서였습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재정과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복개는 매년 몇백미터씩 더디게 진행되었습니다. 공사가 탄력을 받은 것은 군사정권 이후부터입니다. 60년대 구간별 복개를 마무리짓고 1977년 청계천 전 구간이 복개됩니다. 이로서 청계천은 폭 50m의 도로인 청계로로 다시 태어납니다. 오염된 개천이 번듯한 길로 다시 태어나니 시민들은 복개 공사에 대해 열광적인 호응을 보였습니다.
1977년 복개를 마친 청계로. 현재 청계천이 시작되는 지점인 청계광장 인근이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청계천의 복개 이후 유행처럼 ‘하천 복개 붐’이 일었습니다. 청계천의 자잘한 지류들을 포함해 후암천, 성북천 등이 복개되어 길이나 주차장 등으로 사용됩니다. 당시 서울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복개 공사가 번져 콘크리트 속으로 사라진 하천의 총연장이 500-600km에 달할 것으로 추측됩니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씨는 그의 저서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1960년대를 ‘복개의 연대’였다고 서술합니다. 지금은 생태 하천을 복원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하는 지금과는 정반대의 모습인 점이 흥미롭습니다.
판자촌에서 달동네로
냄새나고 지저분하던 천변은 깨끗한 신작로로 바뀌었고, 청계천 판자촌에서 거주하던 빈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군사정권은 당시 도시정비를 위해 청계천, 용산 등 무허가 판자촌 빈민들에게 서울 외곽의 토지를 저렴하게 분양하고, 공장 등에서의 일자리까지 제공하겠다는 인센티브 정책을 내놓습니다. 단, ‘다시 서울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서약 아래서요. 이 정책으로 봉천동, 신림동, 광주대단지(성남)등으로 청계천 거주민 2만여명의 대규모 이주가 이어집니다.
1970년 12월 촬영된 광주대단지의 모습. 빈민들의 이주지는 전기와 수도조차 들어오지 않는 황무지였다. 엉성하게 지은 집 천막 위 ‘서울특별시’라는 글자가 보인다. [서울역사아카이브]
하지만 당시 인프라가 전무해 허허벌판에 다름없던 이주지역은 도시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열악한 환경 개선에 대한 약속 역시 치일피일 미뤄집니다. 상하수도나 전기 같이 가장 기초적인 도시기반시설조차 누리지 못한채 생활하던 주민들이 폭발하여 집단 항거를 일으킵니다. 이것이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입니다. 서울 외곽에 달동네가 형성되게 된 배경도 이때의 빈민 이주가 시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청계천 고가도로와 복원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참고문헌>

ㅇ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한울출판사

ㅇ청계천 박물관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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