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8년 차’ 정운, “이젠 육지 생활 불편해... 대표팀 한 번은 갈 줄”

허윤수 2023. 5. 13.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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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 첫 실패 딛고 K1, K2, K3 베스트 일레븐 석권
여론에도 끝내 달지 못한 태극마크
"나도 한 번은 갈 줄 알았지만 월등하지 못한 탓"
정운(제주유나이티드)이 제주도민에 가까워진 자신의 모습과 대표팀 발탁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이데일리 스타in 허윤수 기자] ①편 <‘김민재 짝’ 라흐마니와 뛰었던 정운, “K리그 선수들 정말 뛰어나”>에 이어

벼랑 끝에서 크로아티아로 떠났던 정운(제주유나이티드) 2016년 3년간의 유럽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왔다. 그가 선택한 팀은 제주였다. 여러 팀의 제안이 있었지만 ‘감귤타카’라고 불린 제주의 축구 색에 끌렸다.

“국내에서 나를 원하는 팀이 있지 않다면 들어오지 않을 생각도 있었다. 세 팀 정도 제안이 있었는데 사실 조건은 다 똑같았다. 당시 제주는 ‘감귤타카’라는 철학을 추구했고, 유행이기도 했다. 제주에 가면 재밌게 축구할 수 있겠다고 판단해서 결정했다.”

2012년 울산현대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했던 걸 고려하면 금의환향이었다. 그의 두 번째 K리그 무대는 성공적이었다. 크로아티아에서 몸소 부딪치며 쌓은 실력을 발휘했다. 첫 시즌 리그 32경기에서 1골 5도움을 기록하며 K리그 클래식(현 K리그1)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됐다.

“자신감부터가 달랐다. 크로아티아에서 뛰며 힘도 강해지고 여유도 생겼다. 사실 겁날 것도 없고 무서운 것도 없었다. 뭣 모르고 한국에 와서 하고 싶은 대로 했던 게 첫 시즌에 잘 된 비결 같다.”

정운의 두 번째 K리그 도전은 성공이었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리그 최고의 왼쪽 측면 수비수로 자리 잡자, 대표팀 발탁에 대한 여론도 형성됐다. 당시 대표팀 사령탑은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었다. 그러나 정운이 태극마크를 다는 일은 없었다.

“당시엔 아쉬움이 있었다. 나도 워낙 자신이 있었고 개인적인 경기력도 좋았다. 한 번은 갈 거로 생각했지만 뽑히지 않을 걸 어쩌겠나(웃음). 내가 월등하게 잘했다면 되는 일이라 누굴 탓할 것도 아니다. 이젠 대표팀 욕심을 내려놨고 소속팀이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 제일 크다.”

정운은 어느새 제주살이 8년 차를 맞았다. 그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제주 사투리를 사용하는 등 토박이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정운 자신도 제주도민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한다. 그의 입에선 ‘육지’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정운은 스스로 제주도민이 다 됐다고 느낀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이젠 육지 생활이 조금 불편해진 걸 보니 제주도민이 다 돼 가는 거 같다. 가끔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때도 ‘내가 제주에서 할 일만 있다면 계속 살고 싶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제주 사람들도 좋고 도시 자체도 너무 좋다. 그만큼 행복하다.”

“제주 사투리도 어느 정도 알아듣는다. 제주에도 친구들이 있는데 사투리 쓰는 모습을 보며 배우게 된다. 이젠 우리 가족도 습관이 돼 가끔 사투리를 쓴다. 제주 사투리도 쓰다 보니 재밌어서 좋은 거 같다.”

제주 사투리까지 사용할 정도니, 팀에 대한 애착은 말할 것도 없다. 입단 동기 이창민, 안현범과 함께 가장 오래 제주를 지키고 있다.

“팀이 힘들 때면 그런 책임감이 더 생기는 거 같다. 오래 머물다 보니 뭔가 사명감도 있고 내 팀 같다. 좋을 땐 모든 게 좋기에 힘들 때 잘 헤쳐 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럴 땐 (이) 창민이나 (안) 현범이처럼 오래 있던 선수들이 책임감을 느끼고 더 하려고 한다.”

정운은 2019년 제주의 강등을 현장에서 목격했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정운은 2018년 5월 군 복무를 위해 김포시민축구단으로 떠났다. 이듬해 그는 K3리그에서도 베스트 일레븐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원소속팀 제주는 강등의 쓴맛을 봤다. 정운은 제주의 강등을 현장에서 목격했다.

“처음 제주에 왔을 땐 조금 이기적인 면이 있었던 거 같다. 공격 포인트 욕심이나 언론 노출 등 나를 더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바뀌게 된 계기가 있었다. 제주와 수원삼성의 경기를 보러 왔는데 그날 강등이 확정됐다. 응원하러 왔다가 너무 충격을 받았다. 와닿지 않았고 눈물이 막 흘렀다.”

정운은 그날의 기억이 아직 생생한 듯했다. 이야기하다가도 중간중간 말을 멈추고 감정을 억눌렀다.

“지금도 생각하니까 약간 좀 그렇다. 자연스럽게 눈물이 나오더라. 너무 충격받아서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후 남기일 감독님이 부임하시고 팀이 좋은 방향으로 가고자 했다. 나도 정상화를 위해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운은 강등당한 팀의 정상화를 위해 발벗고 나섰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정운은 그의 말처럼 정말 무엇이든 했다. 윙백에서 중앙 수비수로 포지션 변경까지 감행했다. 중앙 수비수치곤 크지 않은 180cm의 신장. 그는 자신의 장점에 집중했고 남기일 감독을 믿었다.

“감독님이 아니었다면 포지션 변경은 안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 선수가 없을 때 아니고선 소화한 적이 없는 자리였다. 감독님은 이미 3~4년 전부터 후방에서 주도적인 축구를 하는 걸 추구했다. 자연스럽게 공을 다룰 줄 아는 선수를 선호하다 보니 믿고 기용해 주신 거 같다. 나도 정말 재밌게 배우면서 성장했다.”

그해 제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K리그2 우승을 차지했다. 강등 1년 만에 다시 K리그1 무대로 복귀했다. 정운 역시 27경기 중 24경기에 나서 리그 최소 실점에 이바지했다. 이번에도 K리그2 베스트 일레븐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K리그1, 2, 3 베스트 일레븐을 모두 거머쥐는 이색 기록도 만들었다.

정운은 남기일 감독을 믿고 포지션 변경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사실 말도 안 되고 정말 웃기다. 난 어릴 때부터 잘했던 선수도 아니었고 우승 복, 상복 하나 없었다. K리그에서도 밀려 크로아티아를 거쳐 왔다. 시즌 통틀어 해당 포지션 한 명에게 주는 상을 K1, 2, 3에서 모두 받았다.”

“사실 아내를 잘 만난 것도 있다. 운동에 집중할 수 있게 자신을 희생한다. 은퇴하면 내가 보답해야 한다. 덕분에 난 준비를 잘할 수 있었다. 운 좋게 준비가 잘 돼 있었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잘난 선수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신기하면서도 영광스러운 기록이다.”

제주 클럽하우스에는 구단 전설에 경의를 담은 벽이 존재한다. 정운에게 목표를 묻자, 그 벽을 가리켰다.

“한 번씩 지나갈 때마다 보는데 아마 제일 많이 뛴 경기 수가 198경기였다. 내가 그 기록을 바꾸고 싶다. 내가 노력하면 ‘제주라는 팀에서 가장 많이 뛴 선수가 될 수도 있겠구나’ 한다. 사실 그 목표 하나만 보고 열심히 하고 있다.”

현재 정운은 제주에서 K리그 통산 173경기에 나섰다. 프로 첫 시즌 겪은 시련에 크로아티아를 거쳐 오느라 K리그 데뷔까지 4년의 세월이 걸렸다. 여기에 군 복무 기간과 코로나19로 인한 단축 시즌도 있었다. 정운이 198경기를 넘기 위해선 26경기가 필요하다. 공교롭게 올 시즌 제주에 남은 경기 수는 26경기다.

정운(제주유나이티드)의 목표는 구단 소속 최다 출장 기록을 세우는 것이다.

허윤수 (yunsport@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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