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비행기타고 원정 다닌 기생 출신 가수 김복희
90년 전 ‘비행기원정’이란 신조어가 등장했다. 서울의 부잣집 호사가들이 이름난 평양기생들을 비행기 삯을 내가며 초청한다는 내용이었다.
‘김양은 평양산(産)의 가수로서 일찍이 평양기주(妓主)학교를 졸업하고 빅타-전속 가수가 되었는데 얼굴이 예쁘기로 이름이 높거니와 목소리도 얼굴에 지지않게 아름답다. 평양에 있으면서 서울은 취입할 때만 조금씩 들렀다가 간다. 그의 인기가 높아지자 서울의 호사가들이 전화로 김양을 불러올리게 되었으니 여객기의 임금은 물론 팬의 부담이었으나 비행기를 타고 경성에 날아와서 세상이 시끄럽게 구는 비행기원정이란 새로운 술어를 만들었던 것이다.’
‘순정을 노래하는 北國의 歌人’(조선일보 1937년1월6일)이라는 제목을 단 이 기사는 ‘금년 스무살 이 가수는 북국적인 침착과 성량의 풍당(豐當)한 것이 레코드 유행가수중에서는 그 유가 없다하니 빅타가 이 가수를 금(金)간판으로 삼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고 소개했다. 김복희가 누구길래, 비행기까지 태워가며 서울로 초청했을까.
◇경성~평양 구간 편도 13원
우선 당시 경성~평양 구간을 정기운행하는 항공편이 있었다는 사실부터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29년 9월 도쿄~대련 구간 운항이 시작됐다. 도쿄~오사카~후쿠오카~울산~경성~평양~신의주~대련을 잇는 여객서비스였다. 각 구간마다 착륙, 이륙을 반복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경성~평양 구간만 해도 기차로 대여섯시간 걸리던 소요시간이 1시간 남짓으로 줄었다. 기차로 오갈 여유는 없지만 비행기는 단숨에 여의도 비행장까지 날아올 수있으니, 호사가들이 비행기 티켓까지 대가며 가수를 초청한 것이다. 경성~평양 편도 티켓은 13원이었는데, 전화교환수 월급이 25원~50원, 백화점 점원이 20원~30원 하던 시절이었다. 샐러리맨 월급에 맞먹는 돈을 교통비로만 쓰면서 가수를 불러들였다는 얘기다.
◇평양기생 출신 김복희
김복희는 1938년 신년 좌담회에서 ‘평양서 자라나 기생학교를 다니면서 빅터의 가수로 ‘애상곡’(哀傷曲)을 불러 출세했다’(‘新版새타령’, 조선일보 1938년1월3일)고 이력을 소개했다. 가요연구가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한국근대가수열전’)에 따르면, 김복희는 1917년 평남 안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일찍 평양기생학교에 들어갔다. 평양기생학교는 당시 우편엽서로 만들어질 만큼, 유명한 기생교육기관이었다. 이 학교 출신 왕수복이 유명가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친구 선우일선도 폴리돌 레코드사 전속가수로 뽑혀 음반을 냈다. 김복희도 이들처럼 돈과 명성을 쌓을 스타를 꿈꿨을 것이다.
열일곱살이던 1934년 마침내 기회가 왔다. 가수 발굴에 골몰하던 빅터레코드사 문예부장 이기세의 귀에 노래 잘하고 예쁜 김복희가 들어간 것이다. 이기세는 김복희를 경성에 불러올려 노래를 시켰다. 김복희는 가녀린 목소리로 간들어지는 고음을 소화했다. 이기세는 작곡가 전수린과 시인 이하윤에게 김복희에게 맞는 곡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김복희 목소리에 맞춰 작곡, 작사
전수린은 이애수가 불러 히트한 ‘황성옛터’ 작곡가였고, 이하윤도 시인 겸 작사가로 이름을 날린 작가였다. 파인 김동환이 내는 대중 월간지 ‘삼천리’(1935년11월)에 작곡가 전수린과 작사가 이하윤 증언이 실려있다. ‘처음에 김복희가 노래를 우리 회사에 와서 부르는데 그 노래를 들음에 그 몸집같이 휘청휘청 마치 능라도 수양버들같이 그만 그 목청조차 몸 스타일에 따른 듯하겠지요. 그래서 그 성대를 들음에 간드러지고 늘어지고 흔들리는 것이 애상적이었어요. 그래서 돌아가서 이 멜로디에 맞는 곡조를 지어본 것입니다.’
김복희의 목소리에 맞춰 곡를 썼다는 것이다. 이하윤도 이 곡조에 맞는 가사를 쓰기 위해 김복희를 테스트했다. ‘그 목소리는 보통의 목청이 아니고 갈피갈피의 눈물과 한숨이 섞인 듯 연약한 여자가 달빛아래 홀로 서서 검푸른 못을 들여다 보는 그 미묘신비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몇날을 두고두고 생각하면서 작사한 것이나 이것을 김복희의 목에 맞춰 몇번이나 수정한 지 사실 나로서 힘든 작사에 하나이외다.’
1934년 빅터레코드에서 출시된 데뷔곡 ‘애상곡’은 이렇게 나왔다. 작곡가가 노래를 먼저 만들고, 이 곡을 부를 가수를 찾은 게 아니라, 김복희를 스타로 키우기 위해 맞춤곡으로 만들었다는 얘기다. 데뷔음반은 호평을 받았다. 월간지 ‘개벽’(1934년11월)은 빅터 레코드가 ‘평양기생 김복희양을 전속으로 하고 제 1편으로 ‘애상곡’을 취입발매중인데 대호평’이라고 소개했다. 유튜브에서 이 음반을 들어보면, 상당히 높은 고음을 부드럽게 넘기면서 착착 감기는 목소리의 매력이 있다. ‘별을 따라 나는 가네 내 사랑아/잘 있거라 나는 가네 님을 두고 가네’ 후렴구 뒷부분은 반주를 없애고, 김복희의 목소리로만 고음을 처리하도록 해 장점을 살렸다. 이별과 한의 정서를 담은 이하윤의 가사도 ‘애상곡’의 인기에 기여했을 것이다.
◇경성방송국에도 출연
열일곱에 데뷔한 김복희는 5년 가깝게 빅터 전속 가수로 활동하면서 87편의 노래를 발표했다. 김복희는 전수린의 작품을 15편, 역시 빅터 전속인 나소운(홍난파)의 작품을 7편 부르는 등 당대 최고 음악인들과 작업했다. 공연도 자주 다녔다. 조선일보가 1938년 6월30일, 7월1일 주최한 축음기기념제에 빅터 소속 가수인 김정구와 함께 출연했고, 경성방송국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자주 나왔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가수로 인기를 얻었으면서도 기생을 겸업했다고 한다.
김복희는 1938년 신년좌담회에서 ‘스무살이라고 했으나 나이를 조금 에누리한 것을 자백한다’고 했다. 당시에도 연예인들은 요즘처럼 어리게 보이려고 나이를 줄여 선전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던 모양이다. 1936년 신곡 ‘가시옵소서’를 발표했는데, 매일같이 레코드사로 팬레터가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한다.
◇은퇴이후 행적 묘연
1939년4월 폴리돌 레코드로 이적한 후에도 5개월간 11곡을 발표했다. 하지만 서서히 잊혀졌다. 김복희가 부른 노래 중에 오늘날까지 불리는 곡은 거의 없다. 신민요를 주로 불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요계를 은퇴한 김복희의 이후 행적도 제대로 알려진 게 없다. 1960년대 동아방송에 잠시 출연했다는 정도다. 비행기까지 타고 원정다닌 예전의 명성을 생각하면 쓸쓸한 퇴장이다.
◇참고자료
이동순, 한국 근대가수 열전, 소명출판, 2022
‘거리의 꾀꼬리’인 10대가수를 내보낸 작곡, 작사자의 고심기, 삼천리제7권제10호, 1935년11월
레코-드 라듸오,개벽 신간 제1호, 1934년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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