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 사장 사퇴
전기·가스요금 인상 곧 결정
정승일 한국전력 사장이 40조원을 웃도는 누적 적자와 방만 경영의 책임을 지고 12일 사퇴했다. 정 사장은 이날 전기요금 인상의 전제조건으로 여겨졌던 한전의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추가 자구안과 한전 비상경영을 밝힌 뒤 사퇴 의사를 밝혔다. 지난달 28일 여당에서 첫 사퇴 요구가 나온 지 보름 만이다. 정 사장은 산업부 주요 보직과 가스공사 사장을 거쳐 문재인 정부 때인 2021년 5월 한전 사장에 임명됐다.
정 사장은 입장문에서 “전기요금 조정절차의 첫 단추인 자구 노력 계획을 발표하게 되어 다행”이라며 “전기요금 적기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점에 대한 국민 여러분의 깊은 이해를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정 사장은 한전 경영난과 함께 직원들의 태양광 사업비리 의혹, 한전공대 감사 은폐 의혹 등이 불거지면서 여권 내에서 공개적인 사퇴 압박을 받았다.
지난해 비핵심 자산 매각 등 20조1000억원의 자구안을 내놓은 한전은 이날 5조6000억원의 재정건전화 계획과 핵심 부동산 매각·임대, 임금 인상분 반납 등을 내용으로 하는 추가 자구안을 발표했다. 이날 가스공사가 내놓은 추가 자구안까지 합치면 두 회사가 작년과 올해 내놓은 자구안 규모는 41조1000억원이다.
하지만 한전은 1분기(1~3월)에도 6조원 넘는 영업손실을 내면서 자구안으로는 그동안 누적된 손실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정 사장의 사퇴와 한전의 자구안 발표가 동시에 이뤄지면서 이르면 오는 15일 2분기 전기·가스요금 인상이 결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전은 12일 지난해 발표한 20조1000억원에 이어 5조6000억원의 추가 자구안을 내놨다. 2026년까지 총 25조원 넘는 재무구조 개선 계획이다. 한전은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의 고강도 자구 계획을 신속하고 확실하게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전의 누적 적자 규모와 현재 전기요금 수준을 감안할 때 단시일에 한전 경영 정상화가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특히 재무구조 개선 과정에 송전망 확대 등 전력 설비 투자가 축소되거나 미뤄질 수 있어 전력 공급에 차질이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전 직원 임금 동결은 후퇴해... 한전공대 지원 축소는 감사 후 추가 발표키로
2021년 한 해 5조8000억원 영업손실을 낸 한전은 작년 1분기에 7조8000억원 영업손실을 기록하자 같은 해 5월 6조원 규모의 자구안을 냈다. 이후 영업손실 규모가 커지자 작년 8월 20조1000억원으로 자구안을 확대했다. 여기에 추가로 한전이 3조9000억원, 발전사 등 10개 전력 그룹사가 1조7000억원을 더 감축하기로 했다. 한전 창사 이래 최대 규모 자구안이다. 앞서 한전은 첫 적자를 기록한 2008년 1조6000억원 규모 자구안을 추진한 적이 있다.
이번 추가 자구안을 보면 전력설비 건설을 미루고, 건설 규모를 축소해 1조3000억원을 절약한다. 또 업무 추진비 등 일상 경비 1조2000억원, 전력시장 제도 개선을 통한 전력구입비 2조8000억원을 줄이고, 발전 자회사 수익 확대를 통해 3000억원을 추가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이와 함께 수도권의 핵심 자산인 서울 여의도 남서울본부 건물 매각을 추진하고, 양재동 한전아트센터와 서인천지사 등 10개 사옥은 임대하기로 했다.
임금 동결에 대해서는 당초 알려진 ‘전 직원 동결’에서 후퇴해, 부장급 이상만 올해 인상분(1.7%)을 반납하고, 차장급은 50%만 반납하기로 했다. 일반직원 임금 반납을 위해 노조와 협의에 착수하기로 했다. 성과급은 오는 6월 공기업 경영평가 결과가 확정되면 처·실장급 이상은 전액, 부장급은 50% 반납하겠다고 밝혔다.
한전공대 출연금 축소 계획이 추가 자구안에 담길 것으로 알려졌지만, 감사원과 산업부 감사가 끝난 뒤 종합적으로 검토해 발표한다는 계획이다. 한전 관계자는 “부동산 매각이나 임대에 따른 재무구조 개선 규모는 구체적인 금액이 산출되지 않아 제외했다”고 밝혔다.
◇5분기 연속 6조원대 영업손실
한전은 이날 1분기 실적도 발표했다. 영업손실은 증권업계가 예상했던 것보다 1조원 가까이 많은 6조1776억원이었다. 작년 1분기(-7조7869억원), 작년 4분기(-10조8209억원)보다 줄긴 했지만 2021년 2분기부터 8분기 연속 영업손실, 5분기 연속 6조원대 영업손실을 이어갔다. 2021년부터 올 1분기까지 영업손실 규모는 44조7000억원이다.
올 1분기는 작년 1분기보다 전기요금이 30% 이상 오르며 매출은 31.2% 늘어난 21조5940억원을 나타냈지만, 전기 판매단가가 구매단가를 밑도는 역(逆)마진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며 대규모 적자를 냈다. 올 1분기 한전은 kWh(킬로와트시)당 평균 174원에 전기를 발전사에서 사왔지만, 소비자에겐 147원에 팔면서 kWh당 27원씩 손해를 봤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지금의 자구안이나 전기료 인상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면서 “이대로 한전의 적자가 이어지면 내년에는 전력 구입비 지급 불능 상태까지 몰릴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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