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기지 앞 아홉 살 전쟁고아, 주한미군의 30년 스승 되다
주한 미군에게 한국어 강의
메릴랜드大 이청자 선생
31년째 미군기지 출근
제자 1000여명 배출해
영어로 give and take, 한국어로는 주고받기. 서로 번갈아 가진 것을 내어주는 오랜 미풍양속.
이청자(82)씨는 30년 넘게 주한미군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부모 없이 거리에 나앉은 아홉 살 꼬마에게 내밀어 준 손길”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 장병에게 구조돼 영어를 익힌 이씨는 “페이백(pay back)하는 심정으로” 1992년부터 ‘캠프 롱’ ‘캠프 페이지’ ‘캠프 이글’ 등 전국의 미군 기지를 돌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미국 메릴랜드대학 글로벌 캠퍼스(UMGC) 소속 객원 부교수로 지금은 경기도 평택과 오산의 미군 기지로 출근해 매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하루 3시간씩 강의한다. 강원도 원주 집을 출발해 왕복 250㎞, 흰색 소형차를 몰고 4시간 거리를 달린다.
이씨는 지난해 대학에서 30년 근속상을 받았다. 지난 2월에는 학생들이 선정하는 최고 영예의 ‘Stanley J. Drazek Teaching Excellence Award’를 수상했다. 이 소식이 미국 일간 ‘볼티모어 선’에 소개되며 이씨의 인생사(史)도 함께 세상에 알려졌다. 수강생 앤서니 콜린스(41) 대위는 “여러 나라에 주둔하면서 대학을 세 곳이나 다녔지만 이 선생님처럼 따뜻한 분은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27일 찾은 평택 ‘캠프 험프리스’ 교육동 강의실 분위기는 거의 할머니와 손주들이었다. 이씨가 한국말로 천천히 물었다. “불고기 맛있어요?” 이어진 학생의 대답. “그~져 그뢔요.” “그럼 무슨 음식 좋아요?” “삼겹살, 소주 맛있어요.” 웃음이 계속 터졌다.
◇“나는 황홀한 고아였다”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났다. 부잣집이었다. 8·15 광복 이후 남한으로 내려와 충북 제천에 터를 잡았다. 이윽고 전쟁이 났다. 인민군에게 부친을 잃었다. “총살됐다고 들었다. 북한 살 때 지주(地主)였다는 이유로. 엄마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땅 있는 게 무슨 죄라고….” 그해 피란길, 난리 통에 모친과 헤어졌다. “남동생 손을 붙잡고 어찌어찌 춘천까지 갔다. 차를 탔는지, 그냥 걸었는지, 왜 하필 거기였는지도 알 수가 없다.” 거지꼴로 미군 기지 ‘캠프 페이지’ 앞에 쓰러져 있었다. 그때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미군 병사였다. ‘쟌’이라고 했다.
–무섭지 않았나요?
“아뇨, 오히려 구세주 같았죠. 제 기억으로는 그 사람이 부대에 들어가서는 먹을 걸 가져왔을 거예요. 배고픈데 초콜릿 주니까 얼마나 좋던지요. 아마 나쁜 사람이었어도 따라갔을 거예요.”
–고아원에 데려간 거군요.
“부대 근처 애민보육원. 지금도 있어요. 미군들이 봉사활동 하러 자주 왔어요. 저는 미군 모두를 ‘쟌’이라고 부르면서 잘 따랐어요. 하도 ‘쟌’ ‘쟌’거리니까 당시 고아가 80명 정도였는데 다들 저를 ‘쟌’이라고 불렀죠. ‘쟌’들이 오면 항상 영어를 가르쳐줬어요. ‘유어 네임 이즈….” “세이 재킷!” 이렇게 하나씩 명사를 배웠어요. ‘잇’ ‘드링크’ ‘딜리셔스’ 같은 표현도 몸짓으로 익히고. 미국 50개 주(州) 이름은 지금도 외워요.”
고통이 없을 리 없었겠지만, 그는 고아원에서의 나날을 ‘황홀했던 시절’이라 표현했다. “그때 다들 어려웠잖아요. 그 정도면 황제같이 살았다고 생각해요. 신기한 건요, 제가 한국어를 가르친 미군들이, 과거 제가 영어를 배운 애민보육원에 가서 또 영어를 가르친다는 거예요. 그들은 애민보육원을 ‘A-men’ 보육원이라고 부르더군요. 아멘.”
–슬프기도 했을 텐데요.
“나는 바보예요. 비참함이 뭔지 몰라요. 행운이죠. 보육원엔 보모, 식모, 옷 꿰매 주는 분도 계셨어요. 교육도 서구식이었는데, 우선 레이디 퍼스트였어요. 다들 까만 고무신 신고 다닐 때 우리는 샌들을 신었죠. 안남미로 지은 밥에 치즈를 비벼 먹던 기억. 어느 달밤에 한 흑인 장교가 포도 넝쿨 아래서 ‘그리운 켄터키 옛집’을 불러주기도 하고. 성탄절 파티도 했는걸요. 저는 정말 산타가 있다고 믿었어요.”
–거의 원어민 수업이었네요.
“제게는 고향이에요. 유년의 언어가 거기서 형성됐어요.”
◇학교 못 간 게 평생의 恨
그러나 정규 교육은 이어지지 못했다.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자 고아원 애들을 학교에 보냈어요. 저는 5학년 2학기에 입학해서 1년 뒤 졸업했는데 그게 제 마지막 학교 생활이었죠.” 이씨는 “교복 못 입어본 게 천추의 한”이라고 했다. 보육원에서 스무살을 맞았다.
–불안했겠군요.
“공부가 하고 싶었어요. 1961년에 ‘10만 어린이 부모 찾기 운동’이 있었어요. 아이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는데 제 이름은 안 불리더군요. 엄마가 보고 싶다기보다는, 엄마를 찾으면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었죠. 직접 찾아나서기로 했어요.”
–찾으셨나요?
“버스 타고 예전 살던 제천으로 갔어요. 거기 주민들 붙잡고 묻다 보니 충주 어디로 가보라 하더군요. 결국 만나긴 했어요. 그런데 제가 생각한 그런 엄마의 모습이 아니더군요. 술에 취해 있었어요.”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당시 원장 부인이 운영하던 ‘춘천 서울산부인과’에서 병원 일을 도왔다. “청소도 하고 가끔 주사도 놓고 날라리 간호사였죠.” 1965년 결혼했고 1970년 아들을 낳았다. 등교는 언감생심, 집 앞에 문구점을 차렸다. “장사치고는 왠지 지적인 것 같았어요. 공부하는 학생들 드나드는 곳이잖아요.” 아들이 국민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됐다. “기록부에 부모 학력란이 있더군요. 거기에 ‘국졸’(國卒)을 쓰면서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죠. 다짐했습니다. 아들이 중학교 입학할 때는 결코 ‘국졸’을 안 쓰리라.” 그러나 시간은 물같이 흘렀다.
–그래서 검정고시를 준비한 건가요?
“이러다간 계속 ‘국졸’ 엄마가 될 것 같았죠. 영어는 기초가 있으니 괜찮았어요. 덕분에 중학교 과정 시험은 한 번에 붙었습니다.”
1982년, 이씨의 고입 검정고시 합격은 꽤 화제가 됐다. 한 잡지에 ‘만학 여성 분투기’라는 문패로 대문짝만 한 글이 실리기도 했다. ‘고입 검정 시험 합격에 이어 내년의 대입 검정과 대학 입학을 꿈꾸고 있는 그녀는 토·일요일에는 예식장에서 피아노를 치는 것으로 아르바이트해 가며 학비와 교통비를 마련하고 있는 억척 주부이기도 하다….’ 이씨는 “따고 나니 그것도 초라해 안 되겠더라”며 “고졸 검정고시에도 도전했다”고 말했다. “물론 여러 번 미끄러졌지만요.”
–몇 번요?
“세 번요.”
–어떻게 하셨나요?
“열심히 학원을 다녔습니다. 원주에서 매일 새벽 5시 10분 기차를 탔어요. 청량리에서 다시 종로 ‘고려검정고시학원’까지 왕복 6시간 여정이었어요. 기차가 공부방이었죠. (이혼한) 남편이 외항선을 탔어요. 국민학교 4학년짜리 아이 혼자 집에 두고 나오는데, 기차가 철다리 지날 때 덜컹덜컹 소리가 크거든요. 아이 깰까봐 마음이 깨지는 것 같았죠. 보온밥통이 없어서 밥을 보자기에 싸서 아랫목에 넣어두고, 난로에 국 올려 놓으면 다 태우고…. 애꿎은 애만 지르밟은 거죠.”
1986년에는 집 근처 상지대학병설전문대학 관광영어통역과에 입학했다. 주경야독이었다. 1988년 야간으로 상명여대 영문과를 갔다. “면접 보려고 줄 서 있는데 누가 부르더라고요. 아줌마, 아줌마는 거기 서는 거 아니라고. 학부모인 줄 알았나봐요. 천안까지 학교 다니면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버스 타면 얼마나 차가 막히던지…. 제 아들은 ‘어머니 있는 고아’였죠.” 1999년에는 상지대에서 영어 교육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군 앞에 강사로 서다
알음알음 배운 피아노로 집앞 예식장에서 결혼행진곡을 연주하며 생활비 벌던 시절, 동네에서 알게 된 미군 장병들은 고마운 친구였다. “아들과 놀아주기도 하고 함께 포켓볼도 치고요.” 1991년이었다. “집 근처 ‘캠프 롱’ 성당 수녀님이 한국말을 배우고 싶어해서 미사 끝나고 혹은 가끔은 제 집에서 가르쳐주곤 했죠. 어느 날 그분이 지금 UMGC에 한국어 강사 자리가 났으니 지원해보라고 알려주더군요.” 이듬해 1월, 대학 시간강사가 됐다.
–첫 수업 기억 나나요?
“강의실이 흔들릴 만큼 떨었어요. 누가 장교인지 사병인지 모르지만 미군 10명 앞에 섰는데, 땀으로 겨울 내의가 다 젖었죠. 실수도 했겠지만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주로 뭘 가르치나요?
“먼저 숫자 발음을 가르쳐줘요. 1·2·3·4·5를 알면 일상 생활에서 전화번호 말할 수 있고, 년·월·일을 얘기할 수 있으니까요. 당시만 해도 한국말 하는 미군은 한 명도 없었어요. 30년 전과 지금의 교수법은 확연히 달라요. 지금은 ‘가나다’를 가르치지 않아요. 이미 가벼운 대화는 할 수 있는 상태로 오거든요. 언어의 위상이 달라진 거죠.
–수업에서 꼭 하는 말이 있나요?
“첫날 제 인생 이야기를 들려줘요. 나는 고아였고, 너희 선배들에게 빚을 졌고, 지금 이 수업은 일종의 페이백이라고. 뒤처진다고 느끼거나 결석을 했다면 언제든 보강 신청하라고. 나는 너네 컴퍼니(company·동료)라고.”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다면요?
“따스한 순간이 많아요. ‘캠프 롱’에서 수업할 때 어느 군의관이 있었어요. 졸업할 때쯤, 병원에 한 번 들르라고 하더군요. 다이아몬드 반지라도 주려나(웃음) 기대하고 갔더니, 수업 잘 들었다면서, 의사로서 자기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인생 팁을 알려주겠다더군요. 병이 나면 의사도 답답할 때가 있다면서요. 기분이 안 좋으면 걸어라, 기분이 좋으면 걸어라, 할 일이 많으면 일단 걸어라…. 그 말이 지금도 잊히질 않아요. 지금도 하루에 7~8㎞는 걸어요. ‘저 할머니 용 삶아 먹었다’고 할 정도로.”
–한때 반미 감정이 거셌습니다.
“부대 앞에 텐트 치고 ‘물러가라’ 외치고, 대학 캠퍼스에서도 ‘양키 고 홈’이 떠들썩했죠. 저도 숨어다녔어요. 죄지은 사람처럼. 부대에 강의하러 갈 때 차를 끌고 통과해야 하는데, 안 보이려고 운전석에서 몸을 얼마나 굽혔는지요. 가슴이 아팠습니다. 문구점 할 때도 가끔 ‘외국인들 좀 안 오면 좋겠어’ 그러는 주민들이 있었어요. 풍기문란이라고. 근데 저는 서로 어울리는 게 재밌고 좋았어요.”
◇군대는 사라져도 학생은 남는다
주한 미군은 속속 철수했다. ‘캠프 페이지’는 2005년, ‘캠프 이글’은 2009년, ‘캠프 롱’은 2010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30년간 가르친 1000여 명의 학생은 지금도 생활이라는 새 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다. “한국 회사에 취업했다며 명함을 보내오기도 해요. 한국이 살기 좋아지면서 최근엔 여기에 제대로 자리 잡으려는 군인이 많이 늘었어요. 뿌듯하죠.”
–‘캠프 페이지’ 마지막 수업 기억나세요?
“그럼요. 학생들 10명 있었는데, 거의 다 A 학점 줬을 거예요. 저한테는 너무 특별한 곳이니까. 거기 갈 때마다 제가 거지였을 당시의 장면이 떠올랐어요. 그 기억이 너무 싫어서 강의를 거절하기도 했는데…. 학생들에게 늘 말했죠. 공부해라. 내가 너희를 이렇게 좋아해도 내가 공부 안 했으면 하느님도 날 여기 못 보내줬을 거다. 사는 데 학위는 쓸모없을 수 있다. 그러나 네 삶의 자부심은 공부만이 줄 수 있다.”
마지막 날, 학생들이 롤링 페이퍼를 써서 이씨에게 건넸다. “Thank you, you’ve been the best teacher ever”(고마워요, 당신은 최고의 선생님이었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선물”이라고 그는 말했다.
–개인 과외도 하신다고요?
“예전의 저 같은 무학자들, 아직 청춘의 몸인 주부들. 1995년부터 20년간 원주 여성회관 등에서 영어를 가르쳤는데, 제가 대학 보낸 사람만 수백 명 돼요. ‘젊게 살려면 공부해야 한다’고 서로 용기를 냈죠. 작년에는 77세 여성 분이 늦깎이 대학생 됐어요. 영어학원 원장이 된 주부도 있고요.”
–수업마다 ‘5분 교양’ 강의를 하셨다고요.
“동기 부여가 필요하잖아요. 우리가 왜 공부해야 하는가, 책임감을 주는 거죠. 신문에서 읽은 거나 주로 제 이야기 했어요. 제 과거사가 그리 흔한 편은 아니니까요. 애들 보고 ‘공부 좀 해라’ 말하지 말고, 조금 거짓을 보태더라도 ‘엄마 도서관에서 책 읽다가 늦었다’고 말하라고. 그럼 공부로 아이와 파트너십이 생긴다고. 이런 식이었는데 나름 입소문이 났는지 서울에서 수업 들으러 오는 부부도 있었죠.”
공부에는 정년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몸소 보여주고 있다. 2002년에는 미국 하버드대학교 서머스쿨을 수료했다. “어학연수라는 걸 한번 다녀오고 싶었는데 당시에 미국에서 일하던 아들이 등록을 해줬다”며 “에세이 써서 상도 받았다”고 말했다. 에세이 주제는 ‘나는 왜 영어를 배우는가’였다. “책을 읽든 글을 쓰든 하루도 영어를 거르지 않습니다. 학생들에게 말하곤 하죠. 그래도 이렇게 내 영어 실력이 형편없으니, 너네도 한국어 서툰 걸 안타까워 말라고요.”
–영어 잘하려면 어떻게 하나요?
“몰라도 매일 부딪쳐라. 그게 기본이에요. 발을 씻으려면 물에 담그는 수밖에 없지요.”
–여든둘, 힘에 부치지 않으세요?
“나이 좀 세지 마세요(웃음). 아직은 괜찮아요.”
코로나로 멈췄던 대면 강의가 올해 재개됐다. 이날 수업에는 세 명이 출석했다. 2040 장병들은 교재에서 생소한 표현이 나오면 머리를 긁적이다가도 이씨와 대화하며 이내 쾌활해졌다. 오후 6시 시작된 수업이 9시쯤 끝났다. “많이 파세요!” 전날 배운 표현을 응용(?)해 한 장병이 작별 인사를 건넸다. 강의실을 빠져나온 이씨가 웃으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안 피곤해요. 젊은 장병들이 그저 ‘우리 선배들이 좋은 일 했구나’ 생각한다면 그걸로 족해요.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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